#28화 9서클의 실마리3
미지의 개척지라 불리는 사막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장벽처럼 산맥이 펼쳐져 있다.
칼날 산맥이라 하는데 칼처럼 뾰족하고 날카로운 봉우리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칼날 산맥은 와이번의 서식지였다.
긴 여정 끝에 드디어 칼날 산맥에 도착했다.
마침내 목적지에 왔으니 기쁠 법도 한데 일행의 표정은 침울하다.
이유는 하나였다.
키아라.
자고 깨어나는 것을 반복하던 키아라가 어느 순간부터 기나긴 동면에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깨어날 생각을 안 한다.
먹지도 않고 잠만 자니, 몸은 점점 야위었다. 통통하고 활기찬 키아라의 예전과 정반대의 모습이다.
엘레나는 키아라만 보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짧은 만남이지만, 키아라를 지극히 아꼈던 그녀였다.
다시 깨어나 활발하게 웃고 떠들었으면 좋으련만, 키아라는 그녀의 바람과는 다르게 도통 일어날 생각을 안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일행 모두 키아라로 인해 분위기가 무거웠다.
돌켄은 평소답지 않게 울적해 보였고, 케인과 자크 역시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반면, 루터는 무척 분주했다.
수레에 수많은 도식과 룬어가 적힌 마법진이 은은한 빛을 뿜는다.
치유 속성이 담긴 마력이 키아라를 에워쌌다. 당장 죽는다 해도 이상할 것 없는 키아라였지만, 포기 않는 루터의 노력 덕분에 근근이 버티고 있었다.
키아라를 보는 루터의 표정이 심각하다.
‘대체 뭐가 문제지?’
원인은 분명했다.
오염된 마력석. 몬스터의 특징 중 하나인 검은 마력이 사라져서 죽어가는 게 분명했다.
원인을 알았으니, 이제 해결하면 된다. 허나 그 일이 좀처럼 쉽게 풀리지 않았다.
루터의 손이 움직였다.
키아라의 몸속에 정순한 마나를 불어넣었다.
유유히 흘러가던 마나는 키아라의 내부를 유유히 흐르더니 다시 밖으로 빠져나간다.
또 실패했다.
루터의 미간이 다시 좁혔다.
‘몸이 마나를 거부한다.’
이 같은 현상은 또 처음 본다.
그가 불어넣은 성질은 빛 속성이라 몸속에 융해되기 쉬운 구조였다.
빛 속성은 따스한 품과 같아 생명체라면 거부하기 힘들다.
그런데 키아라의 신체는 그 빛 속성을 거부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다.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루터는 오염된 마력석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했다.
‘정말 드래곤이 한 건가?’
별 뜻 없는 가정이었고, 막연한 추측이었으나 이제 확신으로 굳어간다.
‘오염된 마력석을 대체할 방법이 없다.’
신체가 마나를 거부하고 흘려보내니 모든 게 허사다.
루터는 일단 차선책으로 마법진의 마나를 이용해 어떻게든 몸속에 마나를 가두어보기로 했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루터가 물러나자 초조하게 지켜보던 엘레나가 다급하게 물었다.
“루터 님. 키아라는 이제 치료가 되는 건가요?”
“기다려봐야 안다.”
“갑자기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아세요? 무슨 병에 걸린 건가요?”
절박한 그녀의 목소리는 애원에 가까웠다.
루터가 담담이 말했다.
“병이 아니라 저주에 걸렸다.”
엘레나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저, 저주요? 대체 누가요?”
“알 수 없다.”
루터는 엘레나를 물끄러미 보다 툭 말했다.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게 좋을 거다.”
엘레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케인이 다급히 물었다.
“죽을 수도 있는 겁니까?”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라는 얘기다. 현 상태라면 최악을 받아들여야 할 테니까.”
절망적인 소식에 참지 못한 엘레나가 눈물을 흘렸다.
“흑……. 키아라.”
믿기지 않는 듯 돌켄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럴 리 없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 뛰어다녔는데.”
통통 뛰어다니며 돌이라고 자신을 놀리던 키아라가 눈에 선하다.
돌켄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고, 고칠 수 있지 않을까요? 루터 님은 늘 그랬지 않습니까? 언제나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셨으니까 이번에도 하실 수 있지 않을까요?”
돌켄의 눈에 루터는 신과 같다.
막힘없고, 거침없다.
그는 돌켄에게 동경이자 존경의 대상이다.
그런 그가 해내지 못할 리 없다.
돌켄의 간절한 눈빛에 루터가 차분히 대답했다.
“때로는 불가능한 일도 있다.”
지금이 그랬다.
키아라는 자신보다 훨씬 강한 존재의 영향을 받았다.
사실상 손쓸 방법이 없다.
기대하던 돌켄이 좌절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머뭇거리던 자크가 한마디 했다.
“키아라를 잃고 싶지 않습니다.”
표현은 안 해도 자크를 포함하여 모두가 키아라에게 정을 붙였다.
루터가 말했다.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두었으니, 경과를 지켜보자.”
엘레나가 흐느꼈다.
“루터 님. 제발 키아라를 살려 주세요. 이대로 잃고 싶지 않아요.”
제 새끼처럼 예뻐했는데, 갑자기 잃게 생겼다. 루터는 우는 그녀에게 조언했다.
“삶과 죽음은 하나다. 괴롭겠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어쩔 수 없다.
괴로워한다고 죽은 자가 살아날 순 없으니 체념하는 게 낫다.
루터 역시 키아라가 죽게 된다면 마음이 편치 않겠지만 결국 가슴에 묻은 채 살아갈 것이다.
그가 사는 이 세상은 마냥 슬퍼만 하고 있기에는 너무 험난했다.
키아라의 경과를 지켜보는 동안 루터는 자크에게 눈을 달아줄 와이번을 고르기 위해 칼날 산맥으로 향했다.
칠흑처럼 검은 날개를 펼치는 거대한 와이번이 하늘을 배회한다.
방향을 선회하던 와이번은 옆을 지나쳐 가는 루터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플라이와 인비저블 마법을 동시에 구사하며 봉우리로 향했다.
루터는 자크에게 눈을 이식할 적당한 와이번을 물색했다.
‘가장 나은 녀석으로 해야겠군.’
어차피 선택지는 많으니, 기왕이면 제일 괜찮은 녀석을 선별해서 자크의 눈에 달아줄 생각이다.
칼날 산맥 곳곳에 있는 와이번이 날개를 접고 지상을 주시하고 있다.
구름이 둥둥 떠다니는 높은 고지대였지만, 와이번의 눈은 지상에 움직이는 것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산맥의 이름처럼 저 칼날 같은 시선 때문에 그 어떤 인간도 저들을 뚫고 사막에 입성한 자가 없었다.
루터가 와이번을 훑는 사이, 봉우리 너머에서 괴성이 들려왔다.
끼아아악!
고개를 돌려 확인해보니 날카로운 괴성과 함께 와이번 한 마리가 같은 와이번 무리와 공중에서 격전을 펼치고 있다.
홀로 싸우는 와이번은 탁한 회색 반점에 주름진 피부를 가졌고, 다른 와이번에 비해 체구가 1.5배는 되어 보였다.
한눈에도 늙은 와이번 같다.
그 늙은 와이번이 상대적으로 젊은 와이번 열 마리와 맞붙고 있었다.
불구경보다 재미있는 게 싸움 구경이다. 하물며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와이번이라는 몬스터 간의 전투여서 단번에 그의 호기심을 사로잡았다.
‘왜 싸우지?’
우두머리 다툼인지, 그도 아니면 단지 늙었다는 이유에서인지 궁금했지만 싸움은 루터의 예상과 달리 늙은 와이번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늙은 와이번은 영리했다.
와이번이 물려고 하면 발톱과 날갯짓으로 반격하고, 약한 와이번을 먼저 공격했다.
‘괜찮군.’
자크의 눈에 어떤 녀석의 것을 달아줄까 했는데, 저 늙은 와이번이 적격인 듯했다.
격화된 싸움에 양쪽 모두 피해를 입었다.
젊은 와이번 열 마리 중 다섯이 지상으로 추락했고, 늙은 와이번은 옆구리와 목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젊은 와이번이 늙은 와이번의 기세에 밀렸는지 봉우리 저편으로 퇴각했다. 늙은 와이번이 승리의 포효를 내질렀다.
끼아아악!
이기긴 했으나 상처는 나아질 기미를 안 보인다.
늙은 와이번이 힘없이 날갯짓을 하며 어디론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루터는 늙은 와이번을 쫓았다.
늙은 와이번이 도착한 곳은 산맥의 중턱에 있는 동굴이었다.
뒤따른 루터는 동굴에 들어서자마자 코를 쥐었다.
거처 겸 화장실인지, 온갖 악취가 밀려들어왔다.
악취를 뚫고 깊숙이 진입하자 거친 숨을 내쉬는 늙은 와이번이 있다.
폐부 깊숙이 내쉬는 숨소리를 듣자니 꺼지는 촛불처럼 느껴졌다.
늙은 와이번은 결국 상처를 회복시키지 못하고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루터는 늙은 와이번에게 다가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네 눈은 잘 쓰마.”
눈은 컸지만, 어차피 크기와 부피는 마법으로 가공하고 연마하면 되니 상관없었다.
조심스럽게 눈을 채취하던 중 무심결에 늙은 와이번의 뒤쪽으로 시선을 준 루터가 흠칫했다.
‘뭐지?’
동굴 끝 벽에 글씨가 보였다.
그것도 생소한 게 아니라 룬어다.
‘늙은 와이번의 동굴 벽에 룬어가 새겨져 있다고?’
놀란 루터는 즉각 벽에 다가갔다.
룬어는 세월의 풍파를 거쳐 닳고 희미해졌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첫 구절을 훑던 루터가 눈을 부릅떴다.
[드디어 그 절망 속에서 탈출했다.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내 육신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결국 나는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빈손으로 떠나지 않으리라. 누군가 이 글을 본다면 나를 기억해다오. 내 이름은 숭고한 드렉시아. 종족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 싸웠던 최후의 하이엘프였노라.]
구절을 해석한 루터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하이엘프? 하이엘프라고?”
하이엘프는 드래곤과 같이 신화 속 종족 가운데 하나였다.
자연을 사랑하고 가꾸며, 정령이라는 신비로운 소환수를 다룬다.
물론 어디까지나 신화고 꾸며진 이야기라고 알려졌을 뿐이다.
그런데 와이번의 서식지에서 하이엘프의 흔적을 발견했다.
루터는 아연실색했다.
“그들이 정말로 존재했다니…….”
전설 속 신화가 그의 앞에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그는 정신을 수습하며, 글귀를 마저 읽어갔다.
안타깝게도 룬어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에 새겨진 것인지, 지워진 글씨가 많아 어쩔 수 없이 드문드문 읽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다음 문장은 루터를 더욱 더 충격에 빠트렸다.
[마법이야말로 궁극에 도달하고 또한 그들에게 맞서 싸울 유일한 무기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8서클이 한계였다. 나는 오랫동안 9서클이 되기 위해 노력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그리고 죽음을 앞둔 지금. 마침내 깨달았다. 9서클은 혼자만의 힘으로 불가능하다. 그들처럼 권능을 다루어야만 한다.]
쿵!
머리에 돌덩이가 떨어진 기분이다.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인물에게서 9서클의 실마리를 얻었다.
모든 게 의문투성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글귀의 주인은 9서클이 될 방법을 알아냈다는 것이다.
루터는 열망이 담긴 눈으로 글귀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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