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잠입
키아라는 눈에 들어오는 세상의 모든 게 신기했다.
하늘의 구름을 멍하니 보다가, 수레에 실린 물건들을 헤집어보기도 했다.
“호호호!”
수레와 나란히 걷던 엘레나의 입가에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밧줄이 재미있는지, 이리저리 갖고 놀다 몸에 엉켜 바동거리는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다.
그녀의 시선은 종일 키아라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보고 있노라면 심심하지 않았다.
오우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표정이 볼 때마다 다양했다.
처음엔 꺼림칙해하던 돌켄도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 밧줄이 뭔지 모르네. 정말 바보 같군.”
“뭐? 바보?”
엘레나가 그 말에 발끈하며 돌켄을 노려봤다.
“너 지금 말 다 했어?”
싸늘한 시선에 찔끔한 돌켄이 이내 투덜거렸다.
“아니, 무슨 말만 하면 도끼눈이야. 뚫린 입으로 말도 못 하게 하네.”
“키아라는 바보가 아니야.”
“네 눈엔 뭐든 다 예뻐 보이는 건 알겠는데 적어도 사실은 인정해야지. 몬스터가 바보란 건 지나가던 꼬맹이도 다 알겠다.”
“하! 과연 그럴까?”
엘레나가 자신 있게 말했다.
“두고 봐. 내가 키아라를 가르쳐볼 테니까.”
“아주 신났네. 대체 뭘 하려고?”
“말을 가르칠 거야.”
돌켄이 헛웃음을 흘렸다.
“내 살다 살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소린 또 처음 들어보네. 몬스터가 잘도 배우겠다.”
“그래도 말은 하니까 어쩌면 따라 할지도 몰라. 두고 봐. 내가 제대로 가르쳐볼 테니까.”
작심한 듯 엘레나의 눈에 고집이 서렸다.
점심 식사가 되자 엘레나는 키아라의 옆에 꼭 붙었다.
“키아라. 나를 따라해봐. 엘레나.”
“꺅꺅!”
“그게 아니고. 자, 입모양을 이렇게. 엘.레.나.”
어리둥절한 눈으로 엘레나를 보던 키아라가 이내 그녀의 입 모양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에……. 에…….”
“옳거니! 그거야! 좀 더 발음을 세게. 엘레나!”
또렷하게 엘레나의 입 모양을 보던 키아라가 웃으며 외쳤다.
“에레나!”
“헉!”
“으악!”
완전하진 않지만 그래도 비슷한 발음이었다.
내심 관심을 기울이며 지켜보던 일행이 신음을 터트렸다.
흥분한 엘레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봤어? 봤어? 키아라가 따라했어! 잘했어! 키아라!”
키아라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칭찬에 해실거리더니 곧장 또렷하게 발음을 내기 시작했다.
“엘레나! 엘레나!”
“으아악!”
돌켄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자크는 먹던 빵을 떨어트렸고, 케인은 저러다 턱이 빠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입을 벌렸다.
몬스터가 인간의 언어를 소리 내어 발음한다.
이보다 충격적인 광경이 없었다.
모두가 얼이 빠진 가운데 루터만이 유심히 키아라를 살폈다.
‘어차피 신체 변화로 구강 구조는 인간과 비슷하다. 핵심은 두뇌 능력인데 뇌가 커지면서 사고 기능이 늘어나니 언어 습득이 빠르군.’
그래도 너무 빠르긴 하다.
태어난 지 이제 겨우 하루가 채 되지 않았으니 영특함을 넘어 천재라는 수식어가 전혀 아깝지 않다.
게다가 여전히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당분간 심심하진 않겠어.’
키아라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금방 흘러갈 것 같았다.
한 번 터진 제방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자 키아라의 언어 구사력이 점점 늘어났다.
“엘레나! 케인! 자크!”
목소리를 높이는 키아라의 모습에 일행이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단순히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호명한 대상을 정확히 가리키기도 한다.
같은 말을 반복하고 표현해주면 따라하는 정도가 아니라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다.
처음엔 장난삼아 시작했는데, 이렇게 머리가 좋을 줄은 몰랐다.
어안이 벙벙한 사이 돌켄만 유독 불만이었다.
“키아라. 왜 내 이름은 안 불러?”
다른 사람은 다 불러도 왜 자신은 빼 놓는지 모르겠다.
명랑하게 말하던 키아라가 입을 헤 벌렸다.
돌켄이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 따라해봐. 돌켄. 돌.켄.”
“도……. 도…….”
“그래. 그렇지.”
“돌!”
“뭐?”
기대하던 돌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본 키아라가 활짝 웃었다.
“돌! 돌!”
“인마. 돌이 아니야. 돌켄이라고 해야지.”
“돌!”
“너 지금 나 놀리는 거냐?”
돌켄은 심히 불쾌했지만, 일행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엘레나가 말했다.
“왜 그래? 키아라는 제대로 불렀어.”
“내 이름은 돌이 아니잖아.”
“근데 넌 돌이 맞잖아.”
“뭐야?”
“돌! 돌!”
돌켄만 불쾌해진 키아라의 이름 부르기였다.
밤이 되자 야영을 준비한다.
식사를 마치자 노곤함이 밀려온다.
꾸벅꾸벅 조는 키아라에게 엘레나가 말했다.
“키아라. 나랑 같이 잘까?”
대답은 못 해도 의도는 간파할 줄 안다.
키아라가 고개를 젓자 엘레나는 섭섭했다.
하루 종일 잘해줘도 키아라와 함께 자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키아라가 가느다랗게 말했다.
“루터……. 루터.”
처음 듣는 말에 일행이 어리둥절했다.
“루터? 그게 뭐야?”
그때, 구석에 앉아 있던 루터가 벌떡 일어나 다가오더니 키아라를 안고 제 자리로 돌아갔다.
“…….”
일행은 한참 동안이나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돌켄이 쥐어짜듯 중얼거렸다.
“마, 마법사님. 이름이었어?”
“그런가 보네.”
그는 여정 내내 자신들에게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런데 어제 데려온 새끼 오우거한테는 알려주었다.
일행의 얼굴에 비참함이 떠올랐다.
“새끼 오우거는 알려주면서 어째서 우리한테는…….”
이름 공개는 신뢰의 기본이다.
새끼 오우거에게 이름을 알려줬다는 것은 자신들보다 더 믿고 있다는 뜻이다.
돌켄은 시무룩했다.
별것 아닌 것 같은데 섭섭함이 밀려왔다.
그는 루터가 야속하다 생각했지만, 자크의 생각은 달랐다.
‘중요한 존재인가 보군.’
단지 실험용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름까지 알려준 것을 보니 애틋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일행은 복잡한 표정으로 루터와 그의 품에 잠든 키아라를 번갈아봤다.
숲속을 가로지르던 일행은 어느새 말빈까지 다다랐다.
그런데 먼발치서 보이는 루터의 시선이 심상찮다.
“멈춰라.”
루터는 수레를 세운 뒤 전방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케인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말빈의 입구가 어수선하다.”
그의 말에 일행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바라보는 말빈은 마치 점처럼 보였다.
돌켄의 시선에 감탄이 떠올랐다.
“말빈의 입구가 보이십니까?”
“마주보는 레드 드래곤의 가운데에 검이 그려져 있는 문장을 지닌 가문의 이름을 아나?”
가슴 갑옷에 문장을 새겨 넣은 기사들이 입구에서 어슬렁거린다.
케인이 낯을 찌푸렸다.
“벨벤 후작가의 문장입니다.”
또한 일왕자를 지지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벨벤 후작은 일왕자를 지지하는 가문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들이 말빈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말빈은 점령이 불가능한 중립 구역입니다.”
올슨의 말빈은 몬스터 영역 독식을 막기 위해 대륙의 각 국가들이 협상조약을 맺은 중립 지역이다.
따라서 어느 한 세력에 소속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일왕자의 군대가 말빈에 있다.
보통 심상찮은 일이 일어난 게 아니라는 뜻이다.
루터는 입구를 관찰했다.
기사들이 지키고 있는 가운데, 몬스터 영역에서 돌아오는 헌터들을 강압적으로 제지하고 있다.
그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좋지 않군.’
수레에 담긴 몬스터 시체를 강제로 빼앗는데, 반발하는 헌터가 기사의 검에 목이 날아갔다.
엘레나가 불안한 눈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 생기고 있나요?”
“벨벤 가문의 기사들이 헌터들의 몬스터를 빼앗고 있다.”
“네?”
일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듣고도 못 믿을 상황 전달에 일행은 아연실색했다.
“벨벤 후작이 미치기라도 한 거야? 어째서 말빈에서 횡포를 부리는 거지?”
“아마 일왕자가 시킨 게 아닐까? 벨벤 후작이 그의 부하라며?”
“대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런 짓을…….”
루터는 혼란스러운 일행의 의구심을 뒤로하고 지시를 내렸다.
“밤이 되면 말빈으로 간다.”
“괜찮겠습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지.”
“위험하지 않을까요?”
케인의 우려에 루터는 되레 단호히 말했다.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 무작정 기다릴 수 없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혼란스러운 일이 벌어질 수 있으니 서두르는 게 낫다.”
헌터들을 다그치는 기사들에게서 여유가 보이지 않는다.
심적으로 쫓기고 있다는 뜻이고, 상황이 다급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들의 촉박한 모습을 보자니 환영이 아른거린다.
핏빛 하늘 아래에 나부끼는 깃발들과 전쟁 나팔 소리.
함성이 이어지고 죽음을 알리는 비명성이 세상을 잠식한다.
루터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전쟁이 벌어지겠군.’
그것도 단시일 내에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였다.
언제 멈출지 모르는 수레바퀴이며 빠져 나올 수 없는 수렁이 곧 시작 될 조짐을 보이려 한다.
그러니 볼일을 마치고 빨리 물러나야 한다.
루터는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눈을 감았다.
곧 시류가 불안정한 말빈으로 향한다.
가능하면 무사히 볼일을 마치면 좋겠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니 항상 준비를 해야 한다.
루터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기 위해 마나 연공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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