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살려주마3
엘레나가 단호히 말했다.
“검술서를 원해요. 연공법까지 포함된.”
“흠. 검술서라.”
턱을 쓸은 상인이 넌지시 물었다.
“일만 골드짜리를 원하는 거지?”
“물론이에요. 시중에 떠도는 가짜들이 아니라 진짜배기를 원해요. 잘못하다 사지가 마비되어 평생 앉은뱅이 신세가 되고 싶지 않으니까요.”
“당찬 아가씨구먼. 못 들어줄 건 없지. 하지만 일만 골드로는 조금 아쉬운데 말이야.”
뒤를 궁금하게 하는 어투에 엘레나가 귀를 세웠다.
“그게 무슨 뜻이죠? 그 이상 하는 연공서가 있나요?”
“흐흐. 당연한 것 아니겠나? 세상에 연공서는 모래알처럼 많고 그중에서도 진주처럼 특별한 연공서 역시 즐비하지. 일만 골드로는 모래알은 넘기겠지만 진주는 아니야.”
“그렇다면 그 진주는 얼마죠?”
“10만 골드.”
입이 떡 벌어지는 가격이다.
듣다 못한 돌켄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보니 돈을 뜯어내려고 꾀어내는군! 무슨 검술서가 10만 골드씩이나 해?”
상인이 돌켄을 쳐다봤다.
“보증된 검술서는 그만한 가치를 지니지. 내가 제시한 검술서는 소드 마스터의 유품이다.”
쿵!
바위가 머리에 떨어진 듯 모두가 충격에 입을 벌렸다.
아연실색한 케인이 신음을 흘리며 물었다.
“그, 그게 정말이오?”
상인이 손사래를 쳤다.
“사지 않을 거면 알려줄 수 있는 정보는 여기까지네. 알다시피 소드 마스터의 검술서라는 게 보통 가치를 지닌 게 아니잖나?”
그의 말이 맞았다.
소드 마스터의 검술서가 10만 골드의 값이라면 오히려 박해 보일 정도다.
일행의 눈이 흔들렸다.
10만 골드면 소드 마스터의 검술서를 얻을 수 있다.
루터는 혀를 찼다.
그는 일행의 들뜬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소드 마스터의 검술서를 얻는다 하더라도 같은 경지에 도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다. 아무리 검술서가 훌륭하다 하더라도 재능과 노력이 따라주지 않으면 상승의 경지에 이르기 요원하다. 만약 소드 마스터의 검술서를 배워서 같은 경지에 도달한다면 왜 이제껏 대륙에 존재하는 마스터의 숫자가 그리 적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봐라.”
정곡을 찌르는 루터의 말에 모두가 생각에 잠겼다.
당장 루터만 하더라도 베르뉴 마탑의 마나 연공을 익혔다.
베르뉴 마탑은 대륙에서 끌어 모은 인재로 가득했다.
그러나 자신을 제외하고 6서클의 벽을 넘은 자가 없었다.
같은 마나 연공일지라도 개인의 차가 분명히 존재한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의 검술서라 할지라도 역량이 받쳐주지 못하면 애물단지나 다름없다.
상인이 루터의 주장에 맞장구쳤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혹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증명 된 검술서는 그 자체로도 가치를 지녔으니까요.”
그의 말 또한 사실이다.
검술서를 익히자면 못 할 것도 없다.
하지만 시중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검술서를 잘못 익히면 엘레나의 말처럼 평생 장애를 겪거나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
잘못된 검술서를 다루는 건 지극히 위험하다.
엘레나가 원하는 건 그러한 문제가 없는 검술서였는데, 소드 마스터의 유품이라 하니 보증은 물론이거니와 능력에 따라서 상승의 경지도 노려 볼 수 있다.
엘레나가 흔들리는 눈으로 루터를 쳐다봤다.
선택에 도움을 구하는 눈치였다.
그가 조언했다.
“검술서를 선택할 때에는 스스로에게 맞는 옷인지 확인하는 게 우선이다.”
“맞는 옷이요?”
“사람의 신체가 다르듯 검술서의 연공법도 제각각이다. 만약 무거운 중검을 다루는 연공법과 가볍고 빠른 속검의 연공법 중에서 골라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스스로 생각해봐라.”
“아! 그렇네요.”
엘레나가 아쉬움을 드러냈다.
“소드 마스터의 검술서라도 저와 맞지 않으면 소용이 없겠어요.”
엘레나는 고민하다 상인에게 요구했다.
“보다시피 나는 가볍고 빠른 속검을 익히는 검술서가 필요해요. 있나요?”
“보증된 걸 원할 테지?”
“물론이에요.”
“10만 골드.”
엘레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도 소드 마스터의 유품인가요?”
“보증된 건 애초에 모두 10만 골드일세.”
상인은 상인이었다.
엘레나가 10만 골드를 감수할 기미를 보이자 즉각 잇속을 드러냈다.
그녀가 인상을 그렸다.
“너무 배짱 장사 하는 거 아닌가요?”
“가치를 알아보는 자는 감수할 수 있지. 생각해보게. 만약 이 기회를 잡는다면 자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말일세.”
엘레나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루터를 힐끔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하지만 지금은 일만 골드밖에 없으니, 사냥으로 구해 오겠어요.”
“그럴 줄 알았네. 자네에게 어울리는 속검 검술서를 마련해놓겠네.”
엘레나와의 거래는 끝났다.
상인이 남은 용병들을 쳐다봤다.
“자네들은 어찌할 텐가?”
세 사람은 고민할 것도 없이 곧장 대답했다.
“우리도 검술서를 구하겠소.”
엘레나의 열정에 휩쓸린 건 아니다.
전쟁의 먹구름이 끼어 있는 현 세상에서 무력을 강하게 키울 수 있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날이 밝고 저주 받은 노인이 나타났다.
“놈이 옵니다.”
주시하던 케인이 입을 열었다.
나무 등치에 기대 팔짱을 끼고 앉아있던 루터가 일어났다.
로브를 두른 노인은 굳이 외관을 확인하지 않아도 심상찮아 보였다.
간절함이 비칠 정도로 다급히 움직였지만 몸이 말을 안 듣는 듯, 술에 취한 것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일행은 다가오는 노인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봤다.
힘겹게 오는 모습에 일말의 동정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부하를 시켜 자신들을 죽이려 했다.
차라리 저대로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도착한 상인이 쇳소리를 냈다.
“커억. 커억. 마, 마법사님. 가져왔습니다. 가져왔어요.”
그가 품 안에서 가죽 포대를 꺼내 내밀었다.
성큼성큼 다가간 케인이 빼앗듯이 포대를 갈취했다.
“으억!”
반동에 밀린 노인이 엉덩방아를 찧자 후드가 벗겨졌다.
“으음.”
일행이 신음을 흘렸다.
드러난 얼굴은 썩은 시체 같았다.
주름지고 갈라진 피부는 회색빛에 진물이 흘러내렸고, 살가죽은 군데군데 벗겨져 검붉은 살갗을 드러냈다.
왼쪽 눈알은 어디다 맡겨놨는지 사라지고 시커먼 구멍을 드러냈고, 머리카락 하나 남지 않은 머리는 가뭄이 든 땅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다.
포대 자루를 건네받은 루터가 내용을 확인했다.
투명하게 빛나는 최하급 마나석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노인이 대신 숫자를 셈해주었다.
“말빈을 샅샅이 뒤져 백여 개를 구해왔습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크흑! 믿어주십시오.”
갈라진 쇳소리에 울음기가 묻어 나왔다.
루터는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역순환한 룬어를 되돌렸지만 한 가지 제약은 남겨놓았다.
루터가 말했다.
“저주는 풀렸다. 이만 가도 좋다.”
“가, 감사합니다. 크흐흑!”
루터는 우는 노인에게 경고를 했다.
“다시는 우리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예, 예. 이 일은 무덤에 갈 때까지 비밀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연신 몸을 숙인 노인이 힘없이 몸을 돌려 되돌아갔다.
설마하니 살려 보낼 줄 몰랐던 케인이 다가와 우려를 표했다.
“놈을 죽였어야 했습니다.”
저 노인은 믿을 자가 못 되었다.
게다가 이미 한 번 자신들을 죽이려 했으니, 또 하지 말란 법이 없었다.
루터는 케인의 걱정과는 달리 자신만만해 했다.
“약속은 했으니 살려주었다. 하지만 놈은 스스로 죽을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두고 보면 안다.”
루터는 다시 나무 등치에 몸을 기대었다.
돌아간 노인에게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노인은 지친 몸을 달래가며 말빈 성내로 향했다.
“허억! 허억!”
최대한 멀리 벗어나야 한다.
괜히 마음을 바꿔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
마침내 시야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 한 노인이 두리번거리다 우연찮게 바닥의 웅덩이에서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처참한 몰골에 원통함이 밀려왔다.
“크흐흑!”
서럽게 울던 노인의 눈빛이 이내 사나워졌다.
“이 개 같은 놈들! 날 이렇게 만들어 놓고 입 다물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지.”
썩어문드러진 전신의 통증이 이내 분노라는 활화산에 잡아먹혔다.
노인이 이를 갈았다.
“개 잡종놈의 새끼들! 내 반드시 네놈들을 가만두지 않으리라.”
자신이 겪은 고통을 수백 배로 돌려주리라.
앙심을 품은 노인은 젊은 마법사의 얼굴을 곱씹으며 중얼거렸다.
“특히 그 마법사! 그 망할 자식만큼은 반드시……. 아아악!”
콰드득!
마법사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순간,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함께 노인의 사지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콰드득! 콰드득!
온몸의 뼈가 잘게 부서지는 고통에 노인은 비명도 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절명했다.
노인을 간파한 루터의 심계였고, 마지막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 자의 참혹한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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