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살려주마2
케인이 신호를 보냈다.
팔을 들어 올림과 동시에 손에 쥔 밧줄을 당겼다.
콰직!
바닥에 누워있던 뾰족한 침이 위로 솟아올랐다.
말빈에서 파는 덫은 오로지 몬스터를 잡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당연히 단단하고 뾰족한 데다, 독성도 무시무시했다.
침이 올라오고 동시에 겨냥한 석궁에서 화살이 튀어나갔다.
“아아악!”
“크악!”
비명이 터지고 노인은 깜짝 놀랐다.
“기습이다!”
설마하니 숨어서 노리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노인이 다급하게 외쳤다.
“매복이다! 불을 끄고 엎드려!”
당황한 와중에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었다.
횃불이 꺼지자 사방이 어두워졌다.
엎드린 노인이 이빨을 갈았다.
빠드득!
‘이 개놈의 새끼들. 싸그리 죽여주마!’
노인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신음 속에 아직 살아 있는 부하들이 제법 되었다.
“놈들을 찾아 죽여라!”
서슬 퍼런 호령과 함께 바닥에 납작 엎드린 부하들이 전진했다.
노인은 자신의 대처가 완벽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악몽은 이제 시작이었다.
툭!
갑자기 공처럼 둥근 물체가 바닥을 굴러 그의 앞에 나타났다.
노인은 물체를 확인했다.
자신이 끌고 온 부하의 머리였다.
“흡!”
헛바람을 삼킨 노인의 머리 위로 갑자기 소나기가 소리가 들려왔다.
후두두둑!
부하들의 머리가 그의 주위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때에는 담 좋은 그조차 비명을 안 지를 수가 없었다.
“으아아악!”
노인의 비명과 함께 케인이 횃불을 켰다.
“으음.”
그의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잠깐사이 불 꺼진 현장은 참혹했다.
서른 가까이 되는 사람들의 머리통이 노인 주변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걸까.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같은 아군이지만 간담이 서늘했다.
부스럭!
상황이 종료되자 모습을 감추고 있던 용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쾌활한 돌켄조차 무거운 침묵을 흘렸다.
현장에서 소리 내는 건 노인밖에 없었다.
“으아아악! 으아아악!”
부하들의 머리통에 파묻힌 노인의 비명이 끊임없이 터져 나온다.
윈드 커터로 적들을 쓸어버린 루터가 나직이 말했다.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기세다.”
모두가 그를 바라봤다.
“상인이건 뭐건 똑같다. 만만하게 보이면 잡아먹혀. 거래와 같은 협상은 서로 동등한 대상에게만 유효하지. 케인. 저들을 상대할 때, 신분을 드러내면 안 됐었다.”
노인이 C급 용병 소릴 입에 담을 때부터 이미 거래가 틀어진 것을 직감했다.
저놈들로선 만만한 자가 귀한 가치를 지닌 트롤을 가지고 있다 하니 당연히 빼앗으려는 생각밖에 없었을 것이다.
케인은 부주의했고, 노인은 욕심을 부렸다.
루터의 뼈 있는 조언을 알아들은 케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실수는 누구나 하지. 문제는 그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거다. 케인. 다시 잘할 자신 있나?”
루터는 암거래를 포기하지 않았다.
현재 처한 상황에서 암거래 상인만큼 유용한 존재가 없다.
거래는 하기 나름이다.
이용하기에 따라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문제는 케인이 같은 실수를 반복 하지 않는 것이었다.
루터가 다시 기회를 주자 케인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그러면 가라.”
이를 악문 케인이 가려다 말고 노인의 앞에 섰다.
“잠깐 빌리지.”
그는 벌벌 떠는 노인의 망토와 후드를 빼앗고 몸에 걸쳤다.
방금처럼 거래가 틀어진 이유는 상대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냈기 때문이다.
이제 같은 실수는 하지 않으리라.
결심한 그가 성큼성큼 말빈 성내로 이동했다.
케인을 떠나보낸 루터의 시선이 노인에게 닿았다.
노인이 돌연 넙죽 엎드렸다.
“존귀하신 분을 몰라 뵈었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그의 앞에 선 루터가 나직이 말했다.
“거래를 다시 시작하지.”
“예, 예?”
“거래를 하자고 했다.”
노인은 얼떨떨했다.
설마하니 이 판국에 거래를 하자고 할 줄은 몰랐다.
루터는 필요한 물건을 언급했다.
“최하급 마력석이 필요하다. 구할 수 있겠나?”
“최하급 마력석? 호, 혹시 마법사십니까?”
“너는 자꾸 두 번 묻게 하는구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 나오자 노인은 머리를 땅에 묻었다.
“죄, 죄송합니다. 구할 수 있습니다. 암요! 반드시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좋다. 지금 당장 최하급 마력석을 모조리 가져와라.”
“저, 저기. 그런데 최하급 마력석은 값이 보통 만만찮은 게 아닙니다. 그래서 그러는데…….”
말꼬리를 흐리는 노인을 보며 루터는 피식 웃었다.
이 상황에서도 머리 굴리는 게 뻔히 보였다.
“돈이 필요한가?”
“예, 예. 꼭 돈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트롤을 잡으셨다 하니 그것만으로도 충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군.”
루터가 노인의 목줄기를 틀어쥐었다.
“커허헉!”
“네놈에게 돈보다 더 중요한 걸 주마.”
그의 손이 분주해졌다.
정수리에 손을 얹은 뒤, 마법진을 그렸다.
루터의 눈이 붉어졌다.
룬어를 역순환하면 저주 마법이 된다.
8서클 마도사도 해석하는 데 수년은 걸릴 듯한 복잡한 도식의 룬어를 순식간에 입력한 루터가 마지막으로 마나를 주입했다.
“끄아아악!”
갑자기 머리 위가 뜨겁다.
비명을 지르는 노인을 향해 루터가 싸늘히 말했다.
“아무리 돈이 귀해도 목숨만큼 중한 게 없지. 최하급 마력석을 네놈의 목숨 값과 교환하겠다.”
“으어어억!”
노인이 간질 환자처럼 몸을 벌벌 떨었다.
루터가 설명했다.
“지금 네게 건 것은 온몸이 썩어 들어가는 저주 마법이다. 손과 발부터 시작해 전신에 퍼질 것이다. 그리고 이미 저주는 시작되었다.”
루터가 손을 뻗어 노인의 코끝을 나뭇가지처럼 부러트렸다.
코끝이 떨어져 나가자 노인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이 저주 마법의 효과는 하루면 끝나고, 그때엔 넌 이미 죽어 있을 것이다. 자, 이제 네 능력을 시험할 차례다. 최하급 마력석을 내가 원하는 수량만큼 가져와라. 만약 나를 실망시킨다면 저주는 널 잡아먹을 것이다.”
경고를 마친 루터가 그를 풀어주었다.
“시간이 없을 테니 서두르는 게 좋을 것이다.”
“으아아아!”
실성한 노인이 헐레벌떡 말빈 성내로 뛰었다.
루터가 몸을 돌려 명령을 내렸다.
“시체를 치우고 엄폐하라.”
케인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만, 그래도 대비는 해야 한다.
철두철미한 루터의 지시에 용병들은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다시 준비에 들어갔다.
돌아온 케인은 혼자 오지 않았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로브를 걸쳐 전신을 가린 자와 대동했다.
“상인입니다.”
케인의 소개에 로브를 걸친 상인의 입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건을 보고 싶소.”
태도를 보니 케인이 일 처리를 제대로 한 듯싶었다.
“안내해라.”
허락이 떨어지고 상인과 이동했다.
숲에 숨겨놓은 오우거와 트롤을 한 마리씩 보여주었다.
시체를 꼼꼼히 살피던 상인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이 몬스터. 누가 잡았소?”
상처 하나 없이 머리만 잘렸다.
최상품이기 이전에 이 몬스터를 누가 잡았는지를 반드시 알아야 했다.
상인이 경계심을 드러냈다.
“만약 훔쳐온 거라면 난 이 거래에서 손을 떼겠소.”
루터가 물었다.
“문제라도 있나?”
“눈이 달렸으면 몬스터의 상태를 모르지 않을 텐데? 가죽 상태를 보시오. 누가 어떻게 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머리만 댕겅 잘라놨어. 닭장에서 꺼낸 닭을 잡을 때에도 자국이 남기 마련이야. 그런데 고급 몬스터를 상처 하나 남기지 않고 머리만 잘랐다고? 이보게들, 만약 이게 훔친 물건이라면 당신들은 후회하게 될 거야. 이 사냥감의 주인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루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수를 아는구나. 이제야 제대로 된 상인을 만났군.”
적어도 당장의 이득에 눈이 멀어 앞뒤 분간 못 하는 상인들과는 달랐다.
“내가 잡았으니 안심해도 좋다, 상인. 한 가지 묻지.”
다가온 루터가 나직이 물었다.
“만약 일확천금을 얻을 기회가 온다면 잡을 것이냐? 아니면 도망칠 테냐?”
후드에 감춰진 상인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위험은?”
“그건 너 하기 나름이다.”
“그럼 반드시 잡고 매달려야지.”
단호히 대답한 상인이 루터를 향해 공손히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똑똑한 상인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루터는 분수를 알면서 배포도 있는 눈앞의 상인과 거래를 하기로 결정했다.
오우거가 아홉, 트롤이 다섯이다.
셈은 금방 끝났다.
상인이 가격을 불렀다.
“합해서 10만 골드에 셈해드리지요.”
듣는 일행의 입이 떡 벌어졌다.
10만 골드면 귀족 신분도 살 수 있다.
어마어마한 액수에 눈이 돌아갈 지경이다.
그런데 루터는 달랐다.
“너무 적군.”
그는 고급 몬스터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아무리 낮게 쳐 주어도 12만 골드를 불러야 한다.
상인이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저와 거래하는 게 이득일 겁니다. 말빈에서 고급 몬스터를 사냥하면 세금으로 삼분지 일을 떼 갑니다. 게다가 권세 높은 가문이나 세력을 뒷배로 두지 않으면 더 심합니다. 심지어는 아예 강탈하는 경우까지 생기니 눈 뜨인 채 코 베이는 것보단 낫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다.
만약 고급 몬스터의 밀거래가 걸리는 날엔 뼈도 못 추린다.
상인은 이번 거래에 자신의 목숨 값도 얹었다.
루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단, 금화 대신 교환을 원한다.”
“호오! 좋습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최하급 마력석. 6만 골드 어치를 구해주게.”
“좋습니다. 그럼 남은 4만 골드만 드리면 되겠군요.”
루터가 일행에게 말했다.
“각자 1만 골드씩 가져가라.”
약속된 분배금이 떨어지자 일행이 감격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돌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를 필두로 하나씩 인사를 표했다.
그런데 엘레나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그녀가 상인에게 물었다.
“뒷골목 상인은 취급하지 않는 물건이 없다는데 정말인가요?”
상인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네. 아리따운 아가씨. 따로 찾는 게 있나?”
“네. 있어요.”
그녀는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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