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서클 영주님-5화 (5/185)

#5화 쉽지 않다

루터는 죽은 도적의 항문에 박힌 검을 뽑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떨어진 폴암을 주워들었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허공에 한 바퀴 돌렸다.

선두에서 다가오던 도적은 그 모습에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폴암은 장대처럼 긴 무기인 데다 균형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당연히 균형을 유지하며 허공에 돌리기가 쉽지 않다.

숙련된 폴암 병사도 어려워하는 데 저 어린 녀석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돌린다.

폴암이라는 무기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다룰 줄도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적은 고삐를 잡아당겼다.

폴암은 사용 수준에 따라서 애송이가 될 수 있고, 재앙이 될 수 있다.

거리 조절을 잘 하면 그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극강의 무기이기도 했다.

그러니 거리를 벌리고 상대를 가늠해야 한다.

하지만 그의 판단은 너무 때늦은 뒤였다.

어느새 날카로운 파공성이 그의 목 언저리를 간지럽혔다.

“어?”

짧은 유언과 함께 몸에서 분리된 도적의 머리가 허공에 붕 떠올랐다.

루터는 휘두른 폴암의 궤적을 그대로 따라갔다.

몸을 한 바퀴 회전한 그는 다시 전방을 향해 창대를 휘둘렀다.

두 번째 머리가 허공에 떠오르고 가라앉았다.

폴암은 장대가 길어 제동을 걸면 힘이 부친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힘을 그대로 따라가되, 몸을 움직이며 방향만 살짝 조절하는 게 효과적이다.

전진하며 폴암을 풍차처럼 휘두르니, 지나칠 때마다 도적들이 비명을 지르며 피분수를 뿌렸다.

루터가 도적들을 해치우기 시작하자 용병들은 슬금슬금 움직여 그의 후방으로 이동했다.

어느새 전투는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선두에 루터가 있었고, 도적들은 뒤로 밀렸다.

한 용병의 머리를 쪼갠 텁석부리 대장이 그 모습을 보고 고함을 질렀다.

“네놈은 누구냐!”

루터는 그제야 폴암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었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모두가 그를 쳐다봤다.

그럴 만도 했다.

루터는 눈 깜빡할 새에 열 명이 넘는 도적을 순식간에 양단해버렸다.

압도당한 도적들은 위축되었고, 용병들은 루터의 무위에 홀려 넋을 놓고 있었다.

분위기를 감지한 루터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평정심이 흐트러졌다.’

도적이 이죽거리지만 않았더라도 이럴 일이 없었는데, 순간 욱하고 말았다.

‘수행 부족이야. 수행 부족.’

몬스터 영역에 도착하면 심신수련에 매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 도적 대장이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높였다.

“네놈의 정체가 뭐냐고 물었다!”

루터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몸을 돌렸다.

멍하니 입 벌리고 있는 바레인이 눈에 들어왔다.

“뭐 하고 있습니까?”

“어, 엉?”

“빨리 저들을 포위하세요. 한 명도 살려 보내선 안 됩니다.”

루터의 지시에 바레인이 흠칫했다.

“포위? 그게 무슨 소린가?”

“저들은 정규군입니다. 어떤 이유로든 살려 보내면 소속 세력에서 보복을 할 겁니다. 그러니 모조리 죽여야 합니다.”

바레인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제페토는 저들을 탈영병이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고 단지 일탈을 일삼는 거라면 문제가 커진다.

“알겠네.”

바레인이 용병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놈들을 살려 보내면 안 된다. 포위하자.”

숫자는 훨씬 불리했지만 그들에겐 루터가 있다.

그를 믿고 용병들이 움직이는 사이 도적 대장이 콧김을 내뿜고 있었다.

시뻘게진 얼굴에서 자신의 말을 귓등으로 흘린 루터에 대한 분노가 느껴졌다.

“죽어라!”

대장이 대장인 이유가 있었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폴암을 휘두르며 다가오니 성난 곰이 따로 없었다.

루터는 무심한 얼굴을 바라보다 조용히 마법을 펼쳤다.

‘그리스.’

바닥이 미끄러지자 말이 무너져 내렸다.

“으악!”

대장이 바닥을 굴렀다.

루터는 그를 향해 폴암을 들어 올렸다.

누운 대장이 손을 뻗으며 간절하게 외쳤다.

“자, 잠깐만!”

전투에 잠깐은 없었다.

루터는 끝까지 그를 무시하며 폴암을 내리찍었다.

콰직!

대장의 얼굴이 반으로 쪼개졌다.

그 모습을 본 도적들의 기세가 팍 죽어버렸다.

“도, 도망가자!”

전의를 상실한 그들은 퇴각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주위를 에워싼 용병들이 석궁을 겨누고 있었다.

바레인이 외쳤다.

“말을 쏴라!”

일단 달아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타타타탕!

화살이 꽂히고 말이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제페토가 외쳤다.

“말은 죽이지 말게!”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말에 욕심이 있는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본 루터는 고개를 저었다.

‘저놈은 글렀다.’

다시는 엮이고 싶지 않은 위인이었다.

루터는 바닥에 쓰러지는 도적들을 폴암으로 찍었다.

이미 싸움은 끝났다.

반 수 이상이 죽은 도적들이 겁에 질려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하, 항복하겠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잘못했어요!”

벌벌 떨며 눈물을 쏟아내며 살려 달라 하니 마음이 흔들린다.

바레인은 저도 모르게 루터를 바라봤다.

그는 상단 호위의 책임자였지만, 어느새 판단을 루터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루터와 눈이 마주친 바레인은 신음을 흘렸다.

애원하고 울부짖는 도적을 보고도 그의 눈빛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루터의 뜻은 명확했다.

바레인은 용병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모두 죽여라.”

흠칫한 용병들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무기를 쥔 그들은 항복한 도적들을 향해 다가갔다.

잠시 후, 황무지에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현장을 벗어나야 한다.

에넥스 상단은 죽은 상인과 용병의 시체를 수습하여 서둘러 이동했다.

괜히 이들을 죽인 사실이 알려지는 날에는 귀찮은 일이 생긴다.

거리를 벌리고 날이 어두워지니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야영을 준비하며 수거한 시체를 묻고 뒤늦은 슬픔을 맞이했다.

용병의 삶은 낭떠러지 위의 줄타기라더니 어제까지만 해도 웃고 떠들던 동료의 죽음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침체 된 분위기 속에 바레인은 제페토와 독대했다.

그는 제페토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다시는 제 판단에 관여하지 마십시오. 알겠습니까?”

제페토는 차갑게 반응했다.

“그게 무슨 소린가?”

협상하자는 자신의 제안을 완강히 거절하는 바람에 전투가 벌어져 일행이 죽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바레인이 조목조목 지적했다.

“조금만 양보했으면, 최소한 대화라도 했더라면 이런 희생이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흥! 만약 우리가 양보했더라도 그들이 우릴 살려줬을까? 이보게, 바레인. 어쩌면 이게 최선의 선택일 수도 있네. 놈들이 전혀 양보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 것 같은가? 어차피 결과는 같았을 수도 있었네.”

나란히 평행선을 달리는 둘의 의견은 여전히 좁혀지지 않았다.

바레인이 경고했다.

“앞으로 또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우리 모두 위험해질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대체 저자는 어떻게 된 건가?”

제페토가 턱짓으로 루터를 가리켰다.

“내가 아는 것과 전혀 다르던데 정말 C급 용병이 맞나?”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듀크는 분명히 C급 용병이라고 소개했는데, 오늘 본 전투는 A급이더군요.”

“칸델까지 계약을 맺었는데, 더 연장할 수 없을까?”

“그러지 말고 같이 가서 설득하죠.”

“그게 좋겠군.”

두 사람은 루터에게 다가갔다.

루터는 상념에 빠져 있었다.

과거로 돌아왔어도 손에 피 마를 날이 없었다.

‘달라진 게 없군.’

그는 늘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았다.

인생을 바꾸겠노라고 다짐한 지금도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번엔 어느 누구도 내 의지에 간섭하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꼭두각시처럼 살던 미래의 자신은 이제 없다.

그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전투를 강요하게 두지 않을 것이다.

나름대로 희망적으로 생각하는 그에게 두 사람이 다가왔다.

제페토와 바레인의 입가에 호의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오늘 활약이 대단했네.”

“자네 덕에 살았어.”

루터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둘을 쳐다봤다.

지나간 전투가 떠올라서인지 제페토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바레인이 말했다.

“C급 용병이라고 했는데, 실력은 A급 이상이더군. 대체 자네의 정체가 뭔가?”

루터의 정체는 미래에서 돌아온 8서클 마도사였다.

바레인은 그 사실을 영원히 모를 것이다.

루터의 표정이 뚱해졌다.

보통 상대에게 바라는 게 있을 때 친절한 미소와 과한 칭찬으로 말문을 연다.

루터는 이들이 자신에게 바라는 게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대뜸 직설적으로 물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

바레인은 움찔했으나 제페토는 즉각 반응했다.

“챈들러까지 동행해주게. 보수는 섭섭지 않게 해주지.”

“거절합니다.”

생각할 것도 없는 제안이었다.

제페토는 루터의 단호한 거절에 눈에 띄게 당황했다.

“어째선가?”

“북부로 가야 합니다.”

어째 올슨 북부라 하면 모두가 몬스터를 떠올린다.

바레인은 듀크가 그랬던 것처럼 루터를 설득했다.

“몬스터 때문인가? 혹시 돈을 바라고 있다면 관두는 게 좋네. 위험은 전쟁에 비견되면서 보수는 형편없어. 몬스터는 돈이 안 되네. 하루 종일 잡아도 겨우…….”

바레인은 몬스터 사냥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열변을 토하려 했다.

루터는 그런 그의 말을 잘랐다.

“고급 몬스터는 돈이 됩니다.”

“그, 그렇기는 하네만…….”

돈이 되는 정도가 아니다.

일확천금이었다.

오우거의 가죽이나 트롤의 피는 부르는 게 값이었다.

특히나 요즘같이 전쟁이 늘어나 장비와 포션의 수요가 급등하는 이때에는 더욱 그랬다.

바레인의 입이 뻐꾸기처럼 열렸다 닫혔다.

생각해보니 루터 같은 실력자라면 고급 몬스터를 사냥하는 게 백번 낫겠다 싶었다.

자신이라도 루터처럼 강하다면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그러니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반면, 제페토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보수를 열 배로 늘려주겠네.”

루터는 제페토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는 사람보다 재물이 먼저였다.

물욕에 눈이 멀어 앞뒤 분간을 못 하니 계속 동행하다간 위험을 면치 못하리라.

“호위는 칸델까집니다.”

약속은 약속이니 칸델까지는 호위 할 생각이다.

하지만 그 이후는 없다.

루터는 제페토에게서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그의 욕심은 주변을 파국으로 몰고 갈 위험한 성질이다.

평화롭게 살고자 하는 자신과는 전혀 다른 인생이니 애초에 서로 갈 길이 달랐다.

그러니 그와의 인연은 칸델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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