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13 1,000년을 살아온 남자 =========================
1,000년을 살아온 남자 - 2
지름 7만km, 폭 2118km, 두께 180km.
이것이 링 월드의 크기다.
말 그대로 링 모양의 구조물인데 갈란테 행성이 통째로 들어가고도 남을 엄청난 크기였다. 태양과 티타니아를 제외하고 태양계의 모든 행성과 위성을 다 넣어도 넉넉할 것이다. 물론 폭과 두께가 얇아서 제대로 가려지지는 않지만.
이 링 월드의 이름은 프로톤. 가운데에는 에테르 크리스탈이 있는데 아무리 봐도 태양과 흡사하다. 아크가 가진 그 어떤 월드 엔진보다 거대하며 초월적인 에테르를 뿜어내고 있었다.
링 월드는 하나가 아니다. 관리자는 칸나이족이 최소 32개의 링 월드를 소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니, 소유했었다는 설명이 옳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죽었으니까.
지구인과의 전쟁에서 대체 어떻게 되었기에 죄다 박살나고 자취를 감췄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기록도 없고 유추할 만한 데이터도 없다.
놀랍게도 링 월드의 구성물질은 행성의 지각이었다. 그러니까 칸나이족은 태양계 행성과 위성을 부숴서 링 월드를 만드는 데 썼다는 이야기다. 태양을 대체 어떤 식으로 개조했는지는 감도 오지 않는다. 하기야, 블랙홀을 다루는 수준에 와 있는데 태양이 문제일까.
아크는 아르마와 나란하게 앉아 관리자의 설명을 들었다. 칸나이족의 역사 같은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이룩한 문명이 지구와의 전쟁에서 어떻게 사라졌는지, 다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는지에 대해서 소상한 설명이 이어졌다.
―많지 않은 데이터에 의하면 지구인들은 아직까지 다중우주를 이해하지는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대신 그들은 칸나이족을 능가하는 무기수준을 갖고 있었습니다. 자세한 것은 저도 모르기 때문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지금 드릴 수 있는 설명은 지구인이 여기를 찾아내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는 사실입니다.
이로서 지구인들이 전투종족이란 게 증명되었다. 아크는 왠지 뿌듯해졌다가 이게 아닌데, 하고 자괴감을 느끼게 되었다. 지금의 그는 지구인이 아니라 칸나이족이다.
“시간이 꽤 걸린다라…어느 정도?”
―적어도 수백 년 이상은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최소 수백 년이라.”
그 정도면 괜찮다. 이쪽이 충분히 대비할 수 있다. 인류와 케테르는 다른 항성계에 진출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머지않아 링 월드도 발견할 것이다. 아크는 단지 주인으로서 그들이 쓰게끔 허락해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고 보니…이제 칸나이족은 없잖아? 그럼 누가 주인이지?”
―저에게는 그것을 지정할 권한이 없습니다. 당신께서 원하신다면 링 월드 전체를 통제할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링 월드 32개 전체라…”
링 월드는 항성계 하나에 1개만 존재한다. 그것들 모두를 합치면 작은 은하계가 만들어진다. 은하계의 가운데 있는 것은 초대질량을 가진 에테르 크리스탈이라고 한다. 이 모든 것들을 합쳐서 칸나이족의 본성이라고 칭한다.
“은하계 전체가 링 월드로 이뤄졌고 거기에서 에너지를 뽑아 쓴다 이거지? 그럼 그걸 박살낸 지구인들은 대체…”
지구인 출신인 아크는 새삼 그들의 전투본능에 진저리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점이랄까. 관리자의 인도에 따라 에테르 크리스탈의 재시동에 들어간다.
―모든 에테르 크리스탈의 재시동에 들어갑니다. 이제부터 의식적으로 링 월드를 통제하실 수 있습니다.
“아르마, 링 월드의 통제를 맡아.”
“네.”
대지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진다. 미약한 에테르가 보다 활기차게 변했다. 꽝꽝 얼어붙었던 땅이 녹아내렸고 풀이 돋아나고 있었다. 녹색 자연이 새로이 생겨났다.
아르마는 메인관제실의 관리자를 장악하고 통합 프로그램이 되었다. 이로서 모든 명령은 그녀를 통해 이뤄진다. 아크는 링 월드 전체를 느낄 수 있었다. 초대질량 에테르 크리스탈 주위에 32개의 링 월드가 존재한다.
‘칸나이족의 본성…이제는 아무도 없는…’
주인 없는 땅은 접수해서 적당히 써주는 편이 좋다. 칸나이족도 그걸 바랄 것이다.
링 월드의 복원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는다. 고작해야 한 달 정도라서 아크와 아르마는 주변의 해안가에서 캠핑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 슬슬 고민할 차례다.
“아무래도 말이야, 지금 지구인과 접촉하는 건 어려워. 데이터베이스를 뒤져보면 접촉하는 방법을 알 순 있겠지만 여기의 위치를 알아내면 큰일 나지.”
“그렇다면 접촉하는 것은 수백 년 후인가요?”
“최대한 미뤄봐야지. 우리 케테르나 인류가 지구인에 맞설 정도까지.”
“지구인 출신인 주인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 좀 이상해요.”
“그렇지? 나도 이상한 기분이야.”
하지만 아크는 단호하게 스스로를 갈란테인이라고 정의한다. 그야 지내온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구에서야 고작 27년 정도지만 갈란테에서 천 년이 넘는 삶을 살았다. 애착의 정도가 다르다는 말이다.
지구인들이 왜 칸나이족을 소멸시켰는지, 그들이 인류와 케테르를 발견하면 어떻게 나올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지구인과 조우하더라도 최소한 칸나이족처럼 멸망하지 않게 키우고 싶었다.
‘그 때까지는 기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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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서력 700년의 겨울, 인류제국 오스본 대학.
아크는 자신의 교수실에서 책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가 대학에 교수로 있으면서 연구한 에테르 우주학은 금세기 최고의 업적으로 인정받았다. 원한다면 부와 영예를 누릴 수 있지만 그는 모든 것을 거절하고 조용히 짐을 꾸려 대학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이쯤 가르쳐 줬으면 된 거지.’
케테르 제국에도 똑같은 지식을 전해주었다. 원래 그는 가능하면 두 세력에 간섭하지 않으려 했으나 더 나은 길로 나아가길 바랐기에 최소한의 가이드 역할을 자처했다. 케테르 제국의 정찰대는 에테르 우주학을 충실히 배웠기에 마침내 차원을 넘어 링 월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인류도 조금 있으면 그렇게 될 것이다.
“어디 보자…”
아크는 제자들과 함께 찍은 액자를 보았다. 본격적인 우주시대에 접어든지도 오래되었건만 지나간 추억을 기념하는 것은 여전히 사진이 최고다. 전자앨범이니 뭐니 해봐야 실제로 만지는 사진을 대체할 수는 없는 법. 그가 졸업한 제자와 후원자들을 하나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예, 들어오세요.”
“선생님.”
아리따운 아가씨 한 명이 들어왔다. 그녀는 롱헤어를 정돈하고는 꾸벅 인사했다. 아크의 제자 중 한 명이다. 요즘 대학에서 제자라고 해봐야 취업하면 별 볼일 없는 그런 사이에 불과하지만 그녀는 유난히 아크를 잘 따랐다.
“왜? 무슨 일 있어?”
“오늘 선생님이 떠나신다고 해서요. 저희가 작은 파티를 열려고 하거든요. 참가해주실 거죠?”
“어…파티?”
“네, 작은 파티요.”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NO라고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이세아는 대답을 듣지 않으면 절대 교수실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듯했다. 아크는 스케줄을 생각하다가 조금 미뤄도 상관없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장소가 어디지? 9시까지는 가봐야 하는데.”
“저희 6시에 잡아놨으니까, 꼭 오셔야 되요.”
“알았어.”
이세아는 생글거리며 교수실을 나갔다. 에테르 물리학 수업을 듣다가 아크의 발언에 충격을 먹은 학생들이 꽤 많았는데 그녀도 그 중 하나다. 이 우주만이 우리의 무대가 아니며 에테르 차원을 넘어 다른 세계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연구하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게 된다.
아크가 만들어 낸 학문이나 다름없는지라 기존의 다른 물리학 학파들로부터는 경원시 당하는 신세다. 규모가 규모이다 보니 검증하기가 까다로워 동료 교수들은 혹시 사짜가 아닌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선구자는 언제나 외로운 법이지.”
아크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가방에 모니터 패널과 개인서류를 챙겼다. 책장 가득한 저술서는 박스에 담아두면 교무처에서 집으로 배달해 줄 것이다.
청소까지 대충 끝내고 나자 교수실이 깨끗해졌다. 아크는 창문을 열어놓고 마지막 담배를 피웠다. 10년 동안 학계에서 좌충우돌한 기억을 떠올리면 쓴웃음만 난다.
“그래도…이젠 다 가르쳐 줬으니까.”
새로운 에테르 우주. 그 이론을 가르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아르마가 대신했다면 오히려 더 잘 가르쳤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짜증내지도, 당황하지도 않고 말로 상대방을 조질 테니까.
아크는 정신체와 생명체 중간에 위치하다보니 아무래도 감정을 버리기가 어려웠다. 교수들과 싸우기도 여러 번이고 헛소문을 퍼트린다며 교내 중재위에 제소당한 적도 있었다. 에테르 우주학이란 학문 자체가 사람들에게 허황되게 들린다는 증거다.
그의 연구결과가 증거로 나타는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었다. 다시 말하면 아크는 9년 동안 조리돌림을 당했다는 얘기다. 교수직을 맡고 학생들을 가르친 것도 최고집정관이 밀어주었기에 가능했다.
문패를 돌려놓고 밖으로 나선다. 10년 동안 한 대학에 재직했음에도 그는 외톨이였다. 그의 연구성과를 알아채고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동료 학자들도 꽤 있지만 아크가 무뚝뚝한 자세를 보이자 머쓱해했다. 몇 년 동안 욕을 하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면 아니꼽기 마련.
파티 장소는 작은 펍이었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낡은 주점으로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팔고 있는 곳이다. 파티를 열어주겠다곤 했는데 돈이 없으니까 이런 곳을 골랐으리라. 아크는 쓴웃음을 짓고는 펍 안으로 들어갔다. 제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 여기요.”
한 남학생이 손을 흔들었다. 아크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이제 선생님 아냐. 교수직 때려 쳤으니까.”
“와우. 그럼 뭐라고 불러요? 형?”
“…그냥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게 낫겠다.”
아크는 대외적으로는 42세로 되어 있다. 인류가 발전하면서 전체적인 수명도 엄청나게 늘어났는데, 50세도 젊은 축에 속할 정도다. 여러 엘프들의 유전자를 열심히 분석한 결과라고나 할까.
여러 학생들과 인사를 나눈다. 어린 제자들의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하다. 아크만큼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준 교수도 드물기 때문이다. 그는 꼰대스럽지 않고 기성세대스럽지 않았다. 수업 외에는 말하기보단 듣는 쪽이었고 그 누구보다 학생들의 입장을 대변해주었다.
무엇보다 에테르 우주학의 창시자로서 그의 명성은 하늘을 찌른다. 그의 연구에 대해 여전히 증거가 부족하다며 평가 절하하는 여러 교수들이 있지만 인류가 우주괴수와 워프 드라이브, 에테르 리액터 등의 연구를 거듭함에 따라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여러 증거가 속속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자자, 오늘부로 우리 선생님이 대학을 떠나신답니다. 우리를 버리고 가시는 선생님이 참으로 야속하지만 어쩔 수 있나요. 보내드려야지요. 그런 의미에서 건배!”
“가다가 타이어에 펑크나 나라!”
장난스런 학생들 사이에 끼어 아크는 정신없이 마시고 또 마셨다. 분위기가 본격적으로 무르익고 슬슬 술주정을 부리는 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몇 명의 학생이 뜬금없이 아크의 신상에 대해 캐물었다.
“선생님 아직 결혼 안 하신 걸로 아는데, 맞죠?”
학과 내 최고의 미녀라는 아밀라. 그녀가 히죽히죽 웃으며 손가락을 아크의 허벅지에 얹고 빙글빙글 돌렸다. 왼쪽에 앉은 이세라는 말은 안 했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을 것이다.
“사실은 안 한 게 아니고 못한 거 아냐?”
“하이고. 요즘 세상에 교수직 갖고 결혼 못하면 바보 취급받는데.”
“아니, 뭐, 선생님이라고 해서 꼭 결혼에 긍정적이란 법은 없잖아.”
“여자에게 취미가 없다던가?”
“혹시 남자를 좋아하는 거 아녜요?”
“히이익.”
하여튼 헛소문을 가지고 이리저리 사람을 놀려먹는 데에는 도가 튼 학생들이다. 아크는 쓴웃음을 지으며 부정했다.
“뭔 소리야. 나만큼 여자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다고.”
이건 진짜다. 아크는 여자를 좋아한다. 하지만 학생들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는지 우우우, 하고 비난했다. 아크가 여자를 만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한참 동안 시끌벅적한 대화가 이어졌다. 대부분은 시간이 늦었다며 인사하곤 집에 갔고, 이제 몇 명 남지 않았다. 이세라는 그때까지 아크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반대편에 앉은 트롬이라는 학생이 제법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선생님, 제가 요즘에 가문에 대해 좀 공부하고 있는데 말이죠…”
“그래? 뿌리를 찾는 건 좋은 일이야.”
“그거야 뭐 그렇다 치고요. 제가 궁금한 건 아주 예전에 존재했었던 드래곤 있죠? 지금은 존재조차 의문시되는 종족요.”
“아…드래곤? 모르겠는데.”
트롬은 드라켄의 후예다. 다른 후예들과 마찬가지로 드라켄의 외형은 거의 나타나 있지 않았다. 이마의 돌기도 없고, 에테르도 다루지 못한다. 인간보다 약간 긴 수명을 제외하면 차이점은 없다고 봐도 된다.
유일한 증거는 그의 유전자다. 인간이나 엘프와는 명확히 다른 그의 특이한 유전자가 드라켄의 후예임을 증명한다. 어쨌든 트롬은 자기 집안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았다. 학생들은 지루해 했지만 끝에 이상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선생님, 혹시 에트라곤이라고 아십니까? 저희 가문의 선조이신데요.”
“에트라곤…모르겠는데.”
알아도 모른 척할 수밖에 없다. 수백 년 전의 존재를 그 바보 드래곤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트롬은 묘한 눈빛을 보내왔다.
“이번에 저희 가문의 선산에서 동굴이 하나 발견되었거든요. 에트라곤의 일기에 위치가 정확히 나와 있어서 발견한 건데, 거기에서 대단한 기록을 발견했습니다.”
“어떤 기록?”
“거기에 선생님의 얼굴이 그려져 있어서…이름도 같고요. 아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