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6 인류가 만든 신 =========================
인류가 만든 신 - 4
하이브 마인드의 존재를 눈치 채고 있는 것은 아크 혼자만은 아니었다. 인류도 바보가 아니라서 에테르 통신망에서 흐르는 방대한 양의 데이터에 대한 해석에 나섰다. 아무리 하이브 마인드라고 해도 갈란테의 근간이 되는 에테르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그게 과학자들의 의심을 부추겼다.
―지금 에테르 통신망에서 발생하고 있는 패킷은 우리의 예상을 2배 뛰어넘는다. 이 패킷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암호학회의 협력을 요청한다.
하이브 마인드가 인류를 감시하는 방법은 데이터 패킷에 코드를 심는 것이다. 한 인간의 쇼핑 데이터, 기상청의 날씨 데이터, 심지어는 국가기관의 사이커 게릴라 토벌작전에 이르기까지 데이터가 없는 곳이 없다.
그는 교묘하게 코드를 암호화시켜 데이터 패킷에 숨기고 이를 데이터 센터에 침투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에테르 통신망 전체를 들여다보지 않는 한, 들키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었다.
하지만 인류는 통합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에테르 통신망의 장악은 당연한 노릇이다. 원래 권력을 쥐고자 하는 자는 여론을 장악해야 하는 법. 현재의 여론은 곧 에테르 통신망에서 나온다.
정부가 암호학을 전공한 과학자들을 데리고 점검에 나서자 하이브 마인드는 곧장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그는 인류가 새로이 개발한 양자통신에 몸을 실었다. 이 양자통신망은 기존의 통신망과는 달라서 관찰자가 데이터 오류에 접근조차 할 수 없다.
―인류도 바보가 아니군. 하지만 나를 따라오기엔 아직 일러.
양자통신망은 인류가 우주시대에 접어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에테르 통신망은 거의 단점이 없는 대단한 체계지만 딱 하나 단점이 있었는데, 갈란테 외에서는 통용이 안 된다는 것이다. 딱 인공위성까지가 한계라서 달기지에서는 전파통신망을 쓰고 있다. 잡음도 많이 들리고 데이터 손실도 심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인류는 아직 하이브 마인드의 존재를 모른다. 에테르 통신망에서 무언가의 존재를 발견하고 조사에 나섰지만 딱히 뭔가가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인공지능 개발이 가시화되면서 여러 강인공지능의 대두가 잇따랐다. 이제 인류는 부분적인 오토마톤 적용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팔이나 다리를 잃은 사람도 의체를 적용해 얼마든지 정상생활을 할 수 있다. 체내 장기를 부품으로 교환하고 150살까지 건강하게 지내는 할아버지의 근황이 화제에 올랐다.
유전자에 대한 연구도 활발해져서 긴 수명을 이어가는 엘프족의 DNA를 분석, 인간의 유전자와 결합시키는 연구가 시도되고 있었다. 인류는 명백히 발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하이브 마인드의 의사체가 소년소녀에게 친절하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래서 나의 사악한 계획에 너희가 동참하길 원하는 거야, 친구들.”
소년소녀란 다름 아닌 페이건과 울티다. 전자는 자신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도 모르고 그저 겁먹은 채 고개를 끄덕였고 후자는 하이브 마인드의 부하인 만큼 페이건 옆에 꼭 붙어서 그를 안심시켰다.
“…그 사악한 계획이란 게 뭔데요? 그리고 전 당신을 도울 정도로 강하지도 못한데요…”
작은 붉은머리 소년이 눈치를 본다. 그러다가 울티가 팔을 꼭 붙잡아 약간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소년의 눈으로 봤을 때 그녀는 꽤나 예쁘장한 편이다. 게다가 말도 잘 통하고.
“오…친구가 꼭 강할 필요는 없어. 그건 나 혼자서도 족하지. 이건 그냥 간단한 거야. 친구도 저녁을 먹지?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재료를 손질하고…”
“아뇨, 저 제대로 먹은 지가 오래 되서…”
때마침 페이건의 배가 꼬르륵 울린 것은 필연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악한 하이브 마인드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뼉을 쳤다. 오토마톤들이 다가와 즉시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바쳤다. 페이건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이거 먹어도 되요?”
“물론이지, 어린 친구. 어서 들게나.”
하이브 마인드는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기댔다. 페이건은 그의 허수아비가 되어주면 족하다. 사이커들을 각성시킨 것이 그였으니 페이건에게 에테르를 부여해 사이커들을 이끌게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페이건은 템플러의 수장이 되어 연방을 공격할 것이다.
“근데 아저씨의 사악한 계획은 뭐에요?”
아무래도 어린아이다 보니 페이건은 하이브 마인드의 의사체에 호기심을 가졌다. 겉으로 보기엔 입이 큰 유쾌한 남자처럼 보이지만 이런 곳에 있으니만큼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지.”
“세상을 지배한다고요?”
페이건이 크게 눈을 떴고 울티는 얌전히 빵에 잼을 발랐다. 그녀는 페이건을 돕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따라서 페이건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던 간에 그를 따라다닐 것이다.
“그렇다네, 친구여. 아까 말했던 것들을 다시 읊어볼까? 친구는 방금 밥을 먹었지 않나? 내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도 그토록 간단하게 이뤄지는 일이지. 친구 둘만 도와준다면.”
페이건은 겁을 먹었다. 그래서 이 청년이 누구기에 세상을 지배하려 하는지 물어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전 아무 도움도 안 될 텐데요…”
작은 소년은 풀이 죽었다. 울티가 그의 다리에 손을 얹고 싱긋 웃었다. 페이건의 볼이 빨개졌다. 아직 여성을 생각하기에는 어린 나이지만, 알건 다 알고 있다.
“나는 친구를 높게 평가해. 나를 돕겠다고 말해주면, 친구에게 힘을 부여할 수 있지. 땅을 뒤흔들고 손에서 불을 뿜는 강대한 전투력이 친구에게 갈 거야.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나? 건물을 띄워 올리고 연방군의 타이탄과 맞서 싸울 힘을 제공할 수도 있지. 친구의 워프 드라이브와 합쳐진다면, 대단히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네.”
“그, 그게 정말 될까요? 전 그냥 도망치기만 했는데…”
“지금은 아니더라도, 몇 년 후에는 충분히 가능해. 울티와 함께 여기에서 지내며 힘을 키우지 않겠나? 천천히 생각해보게. 내 곁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이 기지는 작은 페이건이 보기에도 꽤 풍족했다. 잠자리는 따스했고 꽤나 넓었다. 무엇보다 먹을 것이 많았고 그의 힘을 탐내 추적하는 무리도 없어서 불안감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울티는 예쁘다.
“그렇다면 잠깐 신세를…”
“옆에 있어라, 울티.”
“네.”
이로서 페이건이 하이브 마인드의 비밀기지에 머물게 되었다. 시간은 많고 그의 편이다. 그는 양자통신망을 들여다보았다. 군은 아직까지 그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
‘케테르 제국의 전면침공이라…’
케테르의 비오스 이주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하이브 마인드는 몇 번이나 케테르의 당시 상황을 시뮬레이션했다. 원시 케테르란 웃기는 존재를 인정한다 쳐도, 그렇게 급격히 기계진화할 에너지가 있을 리 없다. 분명히 누군가의 조작인데 그걸 찾아낼 수가 없었다.
‘역시 그의 수법이겠지. 하지만 케테르와 어떤 관계도 찾아낼 수 없었다.’
케테르에 대한 정보는 워낙 제한적이고 파편화되어서 하이브 마인드라고 해도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과거의 9마왕과 동일한 존재라는 것도 사실 믿기가 어려웠다. 현재의 거대한 로봇인 디아보로스와 과거 어비스의 마왕 디아보로스 사이에 어떠한 공통점이 있는가?
‘누군가 개입한 것이 확실하다. 그 누군가는 아크일 확률이 높다.’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하지만 초인공지능이라고 해도 과거에 있었던 일을 유추해내는 것은 어려웠다. 더욱이 전산상에 자료가 없는 것은 거의 상상의 영역이다. 하지만 그가 만들고 있는 에테르 추적기가 완성되면 상황은 뒤바뀐다. 하이브 마인드는 에테르를 추적할 수 있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낼 수있다.
의사체는 어두컴컴한 지하기지에서 고독을 곰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인류는 자신의 존재조차 찾지 못하고 있었고 케테르는 힘만 센 멍청이다. 그리고 아크란 놈은 뭘 하는지 골방에 처박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강하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에테르에 영향 받지 않는 뭔가가 필요해.’
워프 드라이브 능력을 가진 사이커를 확보한 데에서 가능성이 크게 올라갔다. 하이브 마인드는 의사체 외에 자신의 명령을 대신할 오토마톤을 만들었다.
―신은 하나면 족하다. 그리고 나는 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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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테라 연방으로 완전히 통합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케테르 제국은 그 시간을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디아보로스를 중심으로 해서 케테르의 대군이 비오스를 떠났다. 이제 그들은 포획한 인류의 우주선을 기반으로 하여 보다 효율적인 추진수단과 선체를 만들어냈다. 비오스와 갈란테를 1개월 안에 주파할 수 있는 우주선이 새로이 등장했다.
수백만이 격돌하는 거대한 전쟁이 벌어졌다. 인류는 케테르에 맞서 무수한 포화를 쏟아 부었고 케테르는 갑각종들을 앞세워 대기권으로 돌입했다. 둘의 충돌은 대기마저 붉게 타오르게 했다.
일곱 날과 여섯 밤 동안 케테르 제국과 테라 연방은 그야말로 처절하게 싸웠다. 다수의 하이로드들이 강림한 지역은 풀 한 포기조차 용납되지 않는 황무지가 되어버렸다. 수천 도의 열과 방사능이 대지를 불태웠고 그 어떤 생명체도 살아남지 못한 지옥으로 변했다.
하이브 마인드는 조심스레 인류와 케테르의 전쟁 사이에 끼어들었다. 물론 개입한 것은 아니고, 상황을 보고 있었다.
―확실히 무식한 놈들이로군. 대놓고 공급을 감행하다니.
인류와 케테르 사이에 자잘한 전략은 이제 필요가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충분한 적의를 가졌고 공격수단과 방어력 또한 익히 알려져 있다. 단지 나아가서 싸울 뿐이다. 그 과정에서 힘이 약한 자는 도태된다. 하이브 마인드의 명령을 받는 나노로봇은 부서진 케테르 미니언의 육체 위에 올라앉았다. 그 순간 저 멀리에서 빛이 번쩍였다.
―핵무기를 쓴 건가.
인류가 만든 최강의 공격수단, 핵무기가 드디어 디아보로스를 향해 투사되었고 그 결과가 나타났다. 하늘에 수천 개의 태양이 작렬했다. 빛이 사방으로 퍼졌고 동시에 폭풍이 불었다.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올랐고 폭심지에서 폭격을 두들겨 맞은 갑각종들이 녹아내렸다. 디아보로스의 포효소리가 멀리에까지 퍼져나갔다.
―저 디아보로스가 비명을 지를 정도인가. 하긴, 어지간한 도시 하나를 지워버릴 정도로 강하긴 하지.
물론 그 핵무기조차 하이브 마인드의 손아귀에 있다. 그는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전세계의 핵무기 발사권한을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러지 않은 까닭은 아직까지 인류가 그의 존재를 눈치 채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디아보로스가 틈을 보이고 있다. 어쩌면 때는 지금인지도 모르지.
케테르의 미니언들을 지배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그들은 생각도 없이 명령에 복종하기 때문이다. 귀족들도 하이브 마인드에게 있어 큰 도움은 되지 못한다. 역시 아크의 위치를 찾고 그에게 도움이 될 만한 존재를 찾아내려면 하이로드급의 지식이 필요하다. 그들은 에테르 통신망도 사용하지 않고 있기에 접촉이 매우 어렵다.
핵무기의 폭심지에는 디아보로스가 고통스럽게 늘러 붙어 있었다. 인류는 이 하이로드를 소멸시키기 위해 총 9발의 탄도탄을 썼고, 그 중에서 세 발이 명중했다. 갑각종과 A필드가 하나 막아낸 것도 기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거대한 로봇은 반쯤 융해되어 있었다.
―나는…나는 이대로 죽지 않는다!
핵무기로도 디아보로스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는 간신히 형체를 재구성했다. 그의 코어인 에테르 크리스탈에서는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에테르가 나노매터리얼로 변환되고, 신체를 복구하기 시작했다. 곁에서 이걸 훔쳐보고 있던 하이브 마인드는 큰 충격을 받았다.
―저 정체불명의 빛은 뭐냐? 나노머신도 아닌 듯한데. 대체 무슨 에너지가 디아보로스를 일어서게 하는 거지?
나노로봇이 슬쩍 디아보로스의 에테르 크리스탈 주위에 자리 잡았다. 녀석은 기생충이다. 출력이 부족하기에 비오스로 복귀한 뒤에도 정보를 가져다 주지는 못하겠지만 갈란테에 있는 동안은 충실히 정보를 보내줄 것이다.
한편 연방군은 충격을 받았다. 무려 9발의 탄도탄을 썼음에도 디아보로스를 죽이지 못했다. 남아 있는 하이로드가 동급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인류는 지극히 열세에 처해 있다고 봐도 된다. 그들은 디아보로스가 케테르의 수장이라는 걸 모른다.
―디아보로스가 살아남았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장은 저 놈도 함부로 행동하진 못하겠지만 지금도 신체가 재구성되고 있다. 놈이 다시 날뛸 일도 머지 않았어.
―놈이 시가지에 난입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프군요. 역시 우주군에 총력을 쏟아야 합니다.
―그 전에 놈들을 쫓아내는 게 먼저겠지.
인류는 케테르와 싸우기 위해 통합을 이뤘다. 과거의 자유주의는 억압되었고 사람들의 행동은 통제되었다. 모든 것이 군을 위해 돌아가는 국가가 만들어졌다. 테라 연방은 그렇게 군국주의 국가로의 길을 착실하게 걷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