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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을 살아온 남자-205화 (205/217)

00205 인류가 만든 신 =========================

인류가 만든 신 - 3

아이러니하게도 인류를 통합시킨 것은 케테르 제국이나 사이커 게릴라가 아니었다. 새로 개발한 핵무기가 대륙을 긴장하게 했다. 지금까지 써왔던 가장 강력한 무기와 비교해 봐도 압도적인 위력. 대형급 케테르를 일거에 소멸시키는 힘에 사람들은 전율했다.

동시에 그들은 두려웠다. 만약 이 힘을 케테르가 갖게 된다면? 또한 인류가 서로를 믿지 못해 겨눈다면?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핵무기의 등장으로 인해 골란과 바르마의 통합 논의가 활발해졌다. 양측 정치가들은 절대 통합의 단계가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이젠 그걸 믿는 사람도 별로 없다.

최종적으로 갈란테에는 두 개의 제국이 탄생했다. 바르마와 트라움. 트라움에는 케테르와의 전쟁으로 엉망진창이 된 엘트라움이 가입했다. 이 때를 기점으로 해서 인류는 하나 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완전한 통합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어쩌면 통합에는 자그마한 조건만이 필요했었는지도 모른다. 두 제국의 지도자와 정치가들은 어떻게 보면 사소한 미담 하나를 가지고 확대해석해 정상회담을 거쳤다. 그 미담이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 가짜일 것이다. 정치가들은 원래 그러니까.

인류는 통합의 길을 걷게 되었다. 바르마가 워낙 강대국이었기에 흡수통합은 자연스럽게 논의에서 멀어졌고 양측의 이름을 버리고 새로 태어나자는 분위기가 일었다. 그렇다면 나라의 이름은 무엇으로 할 것인가.

―과거 우리에겐 신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없다. 우리는 종교의 틀을 벗어났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 테라 연방의 이름을 따는 것을 제안한다. 아크 황제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이름만은 남았다. 그를 추종하자는 것이 아니라 최초로 통일된 제국을 추억하자는 것이다.

어떤 정치가가 이렇게 발언했을 때, 반응은 의외로 괜찮았다. 아크 황제가 만든 테라라는 단어는 신하들에게 상당히 낯선 단어였다. 그게 무슨 뜻인지를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대지라는 뜻이야. 괜찮지?

하지만 이 일화는 그렇게 인상 깊게 내려오지는 않았다.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 많이 터져서 묻혔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한 정치가가 테라의 이름을 꺼냈을 때, 제법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대지를 뜻한다는 것도 사람들의 마음에 들었다. 국가는 어디까지나 대지 위에 설립되는 것이니까.

어느 언론사의 여론조사에서 차기 통합제국의 이름으로 테라 연방이 1등을 했다는 뉴스가 떠올랐다. 이쯤 되자 양측 정치가들도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은 것은 지도자들의 임기. 그러나 바르마 대통령이 대통합을 조건으로 사임의사를 표명하면서 상황이 급진전되었다.

―나는 희망합니다. 내가 물러남으로 인해 인류가 비로소 통합된 미래를 꿈 꿀 수 있기를. 그리고 케테르 제국과 대등하게 겨루어 우리 아이들에게 밝은 내일을 보장하고 마침내 우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우리는 그것을 희망합니다.

통합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국가와 국가가 통합되어 간다. 마침내 테라 연방이라는 이름이 어색하지 않은 때가 왔다. 하나로 완성된 우주군 사령부에서는 새로운 계획이 입안되었다. 케테르 군대를 갈란테로 들이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전력으로 우주군을 만들어서 케테르를 요격하면 크나큰 장점이 하나 있소이다. 놈들의 면전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거지. 그리고 갈란테에 놈을 들이지 않으니 국민들이 안심하는 효과도 있소. 괜찮은 계획이군.

테라 연방의 최고집정관 유스틴. 그는 군사집무관인 게르다 원수와 함께 심도 있는 논쟁을 거쳤다. 군부 일각에서 유의미하게 입안되고 있는 일명 스타더스트 작전이 수많은 참모들 사이에서 깎여나갔고 때로는 내용이 덧붙여지기도 했다.

군의 역량을 지상군에 두지 않고 우주군에 둔다. 케테르 제국의 공습을 갈란테에서 막아내지 않고 대기권 밖에서 요격한다는 게 이 작전의 요체였다. 그걸 위해서는 대규모의 우주함대가 필요한데, 테라 연방의 우주군에서는 한 해 5조 리블의 재원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것도 기존의 유지비는 제외하고서 말이다.

아무리 테라 연방이 풍족하다고는 하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액수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정치권의 반응은 의외로 긍정적이었다. 케테르 제국을 대기권 밖에서 요격함으로써 국민들의 피해를 줄이고, 점수를 딸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 같았다.

기술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다고 연거푸 보고가 올라왔다. 인류는 달에 자원채굴선을 보내고 있다. 에테르 리액터의 확보가 그나마 어렵지, 선체 등을 제작하는 데에는 지장 없다는 보고가 잇따르자 게르다 원수는 최고집정관의 승인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군부에서 아무리 좋은 작전을 짜도 정치권의 지지기반이 없으면 어렵다.

이렇듯 테라 연방의 초창기에서 군부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보니 사회의 분위기는 예전보다는 딱딱해졌다. 사이커 게릴라들을 잡기 위해 치안의 강화가 중요해졌고 국가는 여기에 돈을 쓰다 보니 예전의 부드러운 분위기는 자취를 감추었다.

전체주의가 마침내 태어났다. 과거 아크가 가르쳤던 개인의 자유는 인류가 맞이한 두 재앙적인 적들 앞에서 다소 제한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케테르 제국이나 사이커 게릴라들은 인류를 멸망에 몰아넣을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들 앞에서 인류도 단결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200년간 이어온 코덱스는 시대의 흐름에 따르지 못했다는 주장과 함께 도태되었다. 코덱스를 기초로 해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여러 항목이 들어간 연방헌법이 제정되었다. 이 헌법의 첫 장은 하나의 문구가 쓰여 있다.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전체주의는 힘을 결집한다. 따라서 최고집정관인 유스틴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인류가 맞이한 난관을 빠르게 헤쳐나가리란 것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국민들이 전체주의에 대해 의외로 거부감을 가지지 않은 까닭은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워낙 사회분위기가 흉흉하다 보니 질서유지를 위해 국가가 나서야 한다는 인식이 커졌다. 사이커가 등장하기 전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과거 존재했었던 바르마 제국을 아크가 가만히 놔뒀다면 인류는 그들의 역사에서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배웠을 것이다. 인권의 소중함을 온 몸으로 깨닫고 관련제도를 정비했을 것이지만 아크가 전적으로 모든 것을 다 해준 덕택에 기억이 희미해졌다. 세뇌에 가깝게 시행된 교육의 힘도 200년이나 지나다보니 옅어졌다. 코덱스는 마침내 사라지고 사람들은 전체주의에 물들었다.

이 과정에서 인류를 부추긴 것은 다름 아닌 하이브 마인드다. 그는 인류의 기생충이다. 에테르 네트워크에 그의 존재가 있으며 각종 여론조사와 민심의 동향을 조작해 기자들의 컴퓨터에 주입시켰다. 데이터 자체가 그의 의지에  의해 오염되었지만 아무도 의심하지 못했다.

―하나로 통합된 인류는 통제하기가 쉬워지지. 그렇지 않나?

하이브 마인드의 의사체가 뒤를 돌아보았다. 번쩍이는 빛과 기괴한 기구들이 음습한 조화를 이룬다. 천천히 회전하는 튜브 안에 자그마한 소년이 눈을 감고 있었다. 오토마톤은 천천히 그에게 걸었다.

―오, 내 작은 소년이여…미안해. 조금만 참아줘. 풀어줄 테니까.

능력을 복제하는 것은 크게 어렵진 않다. 하이브 마인드는 수많은 사이커들을 통해서 에테르를 갈취하고 있었고, 그 본질을 약간 깨닫는데 성공했다. 인류가 수백 년 동안 연구하고서도 이루지 못한 과업을 그는 단 몇 개월에 해낸 것이다.

―갈란테와 태양 사이…그 어딘가에 ‘그것’이 있다.

그것이란 다름 아닌 에테르의 본질을 의미한다. 하이브 마인드는 그 광대한 공간에 아크의 본거지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 곧 만들어질 인류의 우주함대를 동원해야 하는가?

―그건 아니지. 인류는 조금 더 케테르와 싸워줘야 해.

그 본거지가 고작 핵무기에 휩쓸릴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어렵다. 하이브 마인드는 아크를 잘 모른다. 여기서 잘 모른다는 것은 그를 이길 확신이 서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총전력이라고 해봐야 인류의 우주함대인데, 그걸로 에테르 자체를 지배하는 신을 어찌할 수 있겠는가. 그가 원하기만 하면 에테르 리액터가 모두 정지될 텐데?

―보다 근원적인 뭔가가 필요해…

워프 드라이브가 하이브 마인드를 새로운 곳으로 이끌어줄 것이다. 작은 소년인 페이건으로는 워프 드라이브를 제대로 사용하기 힘들다. 초월적인 에테르를 운용할 수 있는 하이브 마인드는 태양계 내, 어쩌면 다른 항성계에까지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크에 대항할 만한 뭔가를 찾는다면…

―여기까진 그의 계획 아래에 있겠지.

하이브 마인드는 아크의 마음을 읽고 있다. 아니, 분석했다. 그는 권태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류에게 붙어서 이것저것 간섭하고 가르쳐 주더니 최근에는 아예 손을 뗐는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손을 댈 필요가 없어서일까? 당연히 아니다.

―인류는 전체주의로 나아가고 있지. 나의 공작도 물론 한 몫을 했겠지만, 두 강적을 마주하고 있다는 절망감의 지분이 더 커…인류는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데 그런데도 나서지 않는다는 건…

아크가 진짜 인류에게서 손을 뗐다는 가정이 만들어진다. 하이브 마인드는 이 주제에 대해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고민했다. 그리고 아크 곁에서 항상 발견되었던 아르마의 존재까지 사라진 것은 진짜 손을 뗀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는가. 그의 진정한 목적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나서지는 않는다. 그 사이에도 케테르 제국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사이커들은 테라 연방의 해체와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하라며 테러에 열을 올렸다. 물론 인류는 양측을 모두 거부하며 군사력을 동원했다. 바야흐로 갈란테 행성이 전쟁에 휘말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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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는 이 모든 것을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인류의 전체주의도, 케테르의 발전도, 하이브 마인드의 계획도 그에겐 재미난 구경거리에 불과했다. 유일하게 신경 쓰는 것은 섀도우 엘프다. 그들은 아크에 의해 새로이 태어난 종족이나 마찬가지여서 신경을 안 써줄 수가 없었다.

“테라 연방이 에스테반 왕국에 압력을 가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케테르 제국의 공습에서 요행을 바랄 수 있겠냐고 물으면서요.”

“요컨대, 자기들 아래로 들어오라 이거지?”

“네. 과거 국제연합시절 인정해줬던 여러 권리들이 아까운 모양입니다. 엘란 숲도 그렇고…자원이 많죠.”

“테라 연방의 욕심을 탓하기엔 에스테반 왕국이 가진 게 크긴 한데.”

아크와 아르마는 섀도우 엘프의 처지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이대로 놔두면 그들이 인류에 흡수통일 될 날도 머지않았다. 에스테반 왕국이라고 해봐야 연방군의 1개 대대도 못 막는다. 즉 전체주의가 드리워지기 시작한 테라 연방이 강하게 나선다면 에스테반 왕국 따위는 바람 앞의 촛불일 뿐이다.

이대로 놔둘까. 아니면 그들에게도 가능성을 줄 것인가가 현재 아크의 고민거리였다.

“위치를 잘못 잡았나. 하필 칼리노어 대륙 끄트머리에 자리잡아놔서 다른 국가하고 통합될 시기도 놓쳐버렸잖아.”

“하지만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섀도우 엘프들은 당시 여러 종족에게 반감만 샀으니까요. 평화를 위해서라면 그래야 했죠.”

“그랬지, 그랬는데…이제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중간에 아크가 인류에게서 손을 떼는 바람에 섀도우 엘프의 처지가 난처해졌다. 하지만 그들은 인류에게 편입된 우드엘프, 스노우 엘프를 부러워하지 않았다. 단일종족으로, 나름의 세력을 형성한 자신들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비록 훅 불면 꺼지는 미약한 왕국이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우드 엘프나 스노우 엘프는 자기들의 땅을 잃고 인간에게 편입된 마당에.

사실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인류 중에서 절대적인 다수인 인간들은 자신들 이외의 종족에 대해 약간의 우월의식을 갖고 있었다. 정치인도, 고급관료들도, 군인들도 대부분 인간이다. 아인종을 모두 합쳐봐야 1억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전세계의 인구는 20억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과거에는 쿼터제가 존재했다. 정치인의 일부는 반드시 아인종을 포함하도록 제도적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나 테라 연방으로 발전한 지금, 통합을 이루기 위해 자잘한 제도가 모두 사라졌다. 각 종족의 자치구에 지급되는 지원금도 나날이 줄어갔으며, 인류는 완전한 통합을 위해 나아가고 있었다.

문제는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과 아인종이 결합한다 해서 혼혈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보니 갈등이 깊어지고 있었다. 아크가 간신히 없앤 차별의식이 되살아났다. 그 여론의 목적지는 섀도우 엘프들의 왕국 에스테반이었다. 아무리 차별주의자들이라 해도 국내에서 소란을 일으키기는 껄끄러웠나보다.

―에스테반이 가진 땅이 너무 크다! 인구수 5만에 뭐 그리 큰 땅이 필요한가!

―강대한 국가에게 큰 땅을! 엘란 숲을 테라 연방에게!

―이참에 우리와 통합하는 게 어떤가? 통합은 바야흐로 시대의 요구다! 여러 엘프들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데 섀도우 엘프만이 이를 거스르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다.

차별주의자들이 통합 운운하니 정말 웃긴 노릇이지만 정부가 무서워서 이렇게밖에 얘기할 수 없었다. 연방 정부는 사이커 게릴라를 근원부터 틀어막는다는 논리로 시위부터 제제하기 시작했다. 차별주의자들은 에스테반 근처에 가서 시위하기 위해 정부의 입맛에 맞는 소리를 지껄여야 했다.

섀도우 엘프들은 그들에게 신경질적으로 대하고, 때로는 쫓아내었지만 차마 폭력을 쓸 수는 없었다. 거대한 연방 정부가 뒤에 있었기 때문이다.

쿠온 여왕은 외부로부터의 압력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아크에게 구조요청을 보냈다. 그는 그녀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주는 것을 바라느냐고. 그녀는 간단히 말했다.

“연방은 전체주의화되고 있지요. 저희가 이제 와서 그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 봐야 2등 국민…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 하지만 폐하께서 길을 열어주신다면 거기에 걸어보고 싶어요. 저희는 폐하의 뜻에 따르겠어요.”

“그래? 그럼 여기는 어때?”

아크가 짚은 곳은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곳이었다. 쿠온 여왕의 눈과 입이 크게 벌어졌다.

============================ 작품 후기 ============================

소제목이 바뀌었습니다.

이제 몇 편 남지 않았는뎅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다음 편은 저녁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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