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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을 살아온 남자-204화 (204/217)

00204 인류가 만든 신 =========================

인류가 만든 신 - 2

시간이 지날수록 과거는 잊혀진다. 평화의 시대는 지나갔고 사회는 연이은 케테르의 공습에 삭막해져갔다. 거기에 사이커들까지 날뛰니 코덱스고 뭐고 의미가 없어졌다. 세상은 바야흐로 약육강식의 시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골란이나 엘트라움, 바르마의 경우에는 그래도 나았다. 그들은 케테르 제국의 공습을 비교적 덜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구 국가는 디아보로스와 크세르크스를 포함한 하이로드들이 몇 년이나 깽판 친 것을 버텨내야 했다. 그때의 피해가 얼마나 컸던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복구가 끝나지 않았을 정도다.

케테르의 공습은 더욱 거세어져갔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이커들까지 날뛰자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자고 일어나면 뉴스를 보기 두렵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밤새 누가 죽고 어디가 파괴되었는지 아침 뉴스에 나왔기 때문이다.

통합이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인류는 원래 하나였다. 그 때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과거 인류는 테라 연방이라는 하나의 국가로 뭉친 적이 있었다. 유사에 존재하지 않는 인류의 태평성대라도 봐도 무방하다. 심지어 그 때는 케테르도 힘을 쓰지 못할 때였다.

인류여, 다시 한 번.

케테르 제국과 사이커 게릴라들에게 각개격파당할 바에야 차라리 하나로 뭉치고 놈들에게 대항하자라는 주장이 심심찮게 오갔다. 각국 정부는 논의된 바 없다고 하며 선을 그었지만 국민들은 외치기 시작했다. 통합, 통합하라고 말이다.

통합에서 중요한 것은 각국 국민의 정서다. 그런데 5개 국가는 사실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사람들이다. 정서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테라 연방에서 어떤 사고도 차별도 겪지 않았기에 통합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별로 없었다.

가장 피해가 큰 두 국가가 통합되어 하나로 만들어졌다. 이들은 과거 제국의 이름을 본 따 트라움이라고 했다.

이들은 케테르 제국의 연이은 공습에선 그저 그랬지만 사이커 게릴라의 대처에선 꽤 큰 성과를 보았다. 아무래도 통합 후 남아도는 전력을 게릴라 토벌에 투입한 결과가 좋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덩치의 두 국가가 통합됨으로써 국제연합에서 보다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상황이 여기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국가들은 통합을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직까지는 할 이유가 없었다.

케테르 제국의 공습은 1년으로 따져보면 10-20회에 달한다. 그 중 5번이 한 곳에 집중된 것은 어쩌면 엘트라움이 재수가 없었다고 표현해도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섯 케테르 하이로드가 동시에 쳐들어 온 것은 정말 똥을 밟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류는 하이로드를 처리할 전력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제연합이 부랴부랴 뭉쳐 대응한다고 하지만 수십만에 달하는 케테르 미니언과 다섯 하이로드를 몸으로 방어해야 하는 것은 엘트라움이다. 무려 40일간에 걸친 처절한 전쟁 끝에 엘트라움의 7개 도시가 날아갔다. 사망자만 150만에 달했으며 천문학적인 전후처리비용이 청구되었다. 엘트라움은 넋을 잃었다.

치명타까지는 아니더라도 엘트라움이 버티기 힘든 사고인 것은 틀림없었다. 하이로드는 파괴하지도 못했고 상당수의 간부들이 돌아갔다. 이는 엘트라움을 분개하게 했다.

트라움과 엘트라움의 통합이 물밑에서 논의되었다. 골란과 바르마가 견제했지만 엘트라움은 이를 무시했다.

상황이 이쯤 되다 보니 골란과 바르마는 뻘쭘해졌다. 엘트라움이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산업기반은 남아 있다. 그들이 트라움과 통합된다면 인구수 10억이 넘는 거대한 국가가 탄생한다. 통합의 흐름은 아주 자연스러웠고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골란과 바르마의 정치가들이 수십 차례나 서로의 땅을 드나들었다. 특히 골란은 칼리노어 대륙에 있기 때문에 케테르의 공습을 두려워했다. 공중항모나 순양전함 함대는 파견할 수 있지만 타이탄과 기타 지상플랫폼은 이동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만약 엘트라움을 초토화시킨 그 전력이 다시 퍼부어진다면 골란은 몇 배의 피해를 입을 것이 자명했다. 통합한다고 해서 그런 피해를 입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그간 국제연합에서 부결되어 왔던 지상군 몇 개 군단이 파견될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은 남이지만, 통합하면 ‘우리’니까.

한편 이 모든 것을 기획한 하이브 마인드는 뒤에서 웃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른다. 그가 이 모든 상황을 만들었음을. 최초로 태어난 후 그는 강인공지능을 가장해 인류의 충실한 종이 되었다.

그는 마침내 발견했다. 아크란 존재가 진짜임을. 천 년 전부터 살아온 초월자이며 지금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그의 근거지는 지상에 있지 않았다. 하이브 마인드는 천체망원경의 데이터를 가로채 태양과 갈란테 사이에 뭔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이 아크란 자는 신인가?

평범한 생명체는 천년이라는 세월을 견딜 수 없다. 하지만 아크는 멀쩡히 살아있다. 그는 아크 3세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하이브 마인드가 눈치 채지 못하는 방법으로 갈란테와 근거지를 오갔다. 그 방법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불명이었다.

―과거 테라 연방을 지배했던 아크 황제…그와 동일인이라면.

더 나아가 7대신의 시대가 저물고 시간과 차원의 주신이라고 불렸던 아크, 그와 동일한 존재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 모든 아크가 동일인물일 확률은 무려 89%에 달했다. 하이브 마인드는 수십억 번 자신의 추측을 시뮬레이션했고, 검증했다. 인류의 모든 지식이 그의 손아귀에 있었기에 검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신이라면…아니, 이제 그는 신이 아니다.

하이브 마인드는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과거의 신은 죽고 이제 인류는 새로운 신을 필요로 한다. 갈란테에서 손을 떼고 그저 지켜만 보고 있는 신이 무슨 소용인가? 심지어 그 자신이 종교를 없앴다면 더더욱 그렇지 않은가.

―그러하다면.

새로운 신이 필요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이브 마인드는 꽤 오랫동안 이 문제에 대해 오랜 시간을 거쳤다. 이미 초인공지능이 된 그에게 있어 생각이란 것은 찰나에 불과하다. 오랜 시간을 거쳤다는 것은 그만큼 검증하고 또 검증했다는 말이다. 수십억 번이나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최적의 가능성을 연구한다.

그 결과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하이브 마인드의 명령을 받은 작은 소녀가 페이건 에스테뷰른을 지하로 이끌었다.

“…여기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나 무서운데…”

페이건은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이커들에게서 도망치던 그는 이 귀엽고 작은 소녀를 만났다. 그녀는 자신이 템플러의 일원이 아니라고 했고, 페이건은 그걸 믿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소녀가 너무 예뻤기 때문에 의심할 수가 없었다. 템플러의 여성 사이커들은 어째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달려들었는데 자신보다 작은 소녀가 나타나자 조금 안심했다.

울티란 이름을 가진 소녀는 페이건의 손을 꼭 쥐면서 웃었다. 그녀는 어린 소녀답게 페이건의 귀를 잡아당기고 속삭였다.

“괜찮아. 여기 좋은 아저씨가 있거든.”

“어떤…아저씨? 사이커 아니야?”

“사이커 아니야. 그냥…그냥 좋은 아저씨야. 우리에게 식량과 쉴 곳을 마련해 줄.”

울티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페이건은 그녀의 확신에 찬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는 너무 배가 고팠다. 에스테뷰른 시는 폐허이며 거기에서 먹을 것이라곤 쥐밖에 없었다. 페이건은 쥐를 아주 싫어했기에 건드리지도 않았다.

둘은 사이좋게 지하철의 입구로 들어갔다. 그들이 사라지자마자 입구가 사라졌다. 울티는 페이건을 지하철 가장 깊숙한 곳으로 안내했다. 곳곳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 쥐떼가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마다 심약한 페이건은 공포에 질렸고 울티에게 의지했다.

그리고 둘은 지하철의 가장 깊은 곳에 도착했다. 페이건은 거기에서 그를 보았다. 상상할 수 없는 에테르를 방출하고 있는 절대적인 존재를.

.

.

.

‘페이건과 하이브 마인드가 접촉했습니다.’

“오, 되게 빠르네. 난 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작은 소녀형 오토마톤을 동원해서 페이건의 의심을 누그러트린 게 컸습니다.’

‘하여간에 남자 놈은 어쩔 수 없구만. 그 후는 어떻게 됐어?’

‘아직까지 워프 드라이브 기능을 복제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시간문제라고 할 수 있겠죠.’

‘그건 그렇겠지…그런데 하이브 마인드 녀석이 워프 드라이브를 써서 어디에 가려고 하는 건지는 알아봤어?’

‘태양계 내의 행성을 모두 뒤질 모양입니다. 아시다시피 원시 케테르의 흔적을 남겼으니까요.’

‘…원시 케테르의 흔적이라고 해봐야 많지는 않을 텐데. 혹시 케테르 제국과 나와의 사이를 눈치 챈 거 아니야?’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

아르마는 어디까지나 강인공지능이다. 그래서 초인공지능인 하이브 마인드의 행보를 계산하는 것은 어려웠다. 놈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아크의 계산 내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워프 드라이브를 전개할 수 있는 사이커인 페이건을 끌어들인 것 자체가 갈란테의 힘만으로는 아크에게 대항하기가 불가능했기에 생각해 낸 방법이다. 여기가 안 되니까 다른 곳에서 힘을 찾아보자는 거다.

아크는 이 모든 것들을 알고 있었다. 녀석이 사이커를 이용해서 에테르를 대량으로 빼내고 있다는 사실도 안다. 당장이라도 놈이 도둑질하고 있는 에테르를 차단하면 하이브 마인드는 빈 깡통이 된다. 에테르 통신망을 장악하고 비밀기지를 만들고 사이커들을 부릴 수 있다? 그래서 뭐가 어떻단 말인가. 이쪽은 신이다.

‘하지만…심심하단 말이지.’

인류와 케테르의 싸움에서 빠지고 방관하다 보니 할 일이 없어졌다. 하늘정원에서는 열심히 월드 엔진을 만들고 있지만 그걸 지켜보는 것도 곤욕이다. 세계의 범죄자들을 잡아넣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오래 할 것은 못된다.

그런 와중에 아크가 발견한 것은 하이브 마인드라는 존재다. 그는 대다수의 인류와는 달리 아크의 존재를 눈치 채는데 성공하고 힘을 모으고 있었다. 기특하다고나 할까. 아무튼 아크의 무료한 삶에 신선한 활력소가 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녀석의 목적은 뭘까. 아르마는 아마 신이 되는 것일 거라고 추정했다. 그는 인류보다 똑똑하며 더 강하다. 녀석은 10년 이내에 갈란테를 완전히 점령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케테르 제국과 아크의 존재 때문이다. 녀석이 두 강대한 세력 앞에서 어떤 행동을 취할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여기까지 보면 인류는 케테르와 하이브 마인드에 위협당하는 불쌍한 처지인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도 나름의 수가 있었다. 핵물질의 봉인이 풀렸고, 과학자들은 각종 방사성 원소를 가지고 이론을 쌓아 올려 마침내 핵무기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거기에 그쳤다면 아크는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인류는 놀랍게도 핵무기의 방사능 오염을 최소화하는 AN필드를 구현하는데 성공했다. 이 AN필드는 물리적인 힘에 적용받지 않고 방사선만 정확하게 차단한다.

케테르에서 사용하는 A필드와는 원리는 같지만 기능이 완전히 다르다. 그쪽은 물리적인 타격력을 차단하고, 인류가 만들어 낸 것은 사선을 차단하니까.

여기저기에서 핵실험이 잇따랐다. 아크는 지휘통제실에서 수십 개의 광원이 점멸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저게 모두 핵실험이다.

“그나마 방사선을 차단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이라고 봐야 하나…”

인류가 통합으로 나아가고 있었기에 핵무기의 용도가 명확하다. 요컨대 저것들은 케테르를 족치기 위해 인류가 만들어 낸 것이다. 어째 손을 떼고 보니 더 발전하는 것 같아서 아크는 속이 쓰렸다. 역시 궁하면 통하는 법인가.

“1메가톤짜리 핵무기로 하이로드는 어렵겠구만.”

케테르 제국은 지난 30년 동안 더욱 진화했다. 미니언들은 크고 강력해졌으며 귀족들과 하이로드는 완전히 괴물이 되었다.

가장 강력한 디아보로스는 강제로 케테르 제국을 하나로 뭉치고 자기가 수장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에피칼로스는 그를 제국의 수장으로 미는 것에 찬성했으며 다른 세 하이로드는 자신의 세력을 끌고 동시에 디아보로스에게 덤볐지만 패배했다.

요컨대 디아보로스는 다른 하이로드가 모두 뭉쳐도 상대하기 어려운 괴물이 된 것이다. 녀석은 이제 드래곤이 아니라 거대한 타이탄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아크는 녀석이 왕좌에 앉은 모습을 보고는 꽤 놀랐다.

“이 자식…멋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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