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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을 살아온 남자-200화 (20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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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공지능 - 3

완전한 중립자란 존재할 수 없다. 지성을 가진 개체라면 호불호의 영역은 있기 마련이고, 그걸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아도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어 있다.

다만 아크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다. 그는 인간의 감정을 버렸기에 중립을 취함으로써 벌어지는 수많은 결과에 무덤덤할 수 있다. 하기로 마음먹는다면 눈앞에서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떼몰살을 당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이다.

인류와 케테르, 케테르와 인류.

한쪽은 그와 아주 닮았으며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같이 살아온 동반자에 가깝고 다른 쪽은 과거에는 열심히 두들겨 팼지만 지금은 충실한 신하다. 둘 사이에서 아크는 완전한 중립을 지키기로 했다. 그리고 아르마를 통해 그것을 하이로드들에게 통보했다.

그의 선언이 놀라웠는지 어쨌는지, 디아보로스와 에피칼로스는 열심히 인류와 치고 박다가 뒤로 물러났다. 인류는 케테르가 갑자기 후퇴하자 황당해서는 후퇴해 전열을 대비했고, 두 하이로드는 대기권에서 뭔가 쑥덕거리고 있었다.

아르마는 물론 아크의 대리인이다. 그녀의 의사는 곧 아크의 의사라고 봐도 된다. 하지만 하이로드의 입장에서 아르마가 아니라 아크가 직접 중립을 선언해줬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신나게 인류를 공격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크가 떡하니 가로막으면서 의사전달이 잘못됐군, 이라고 말한다면 그것만큼 황당한 게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아크의 설명은 없었다. 하이로드들이 그와 따로 연락선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라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갈란테 행성의 밖, 우주공간에서 에피칼로스가 디아보로스에게 말했다.

―주신께서 정말로 중립을 지키시려는 것 같다.

―그것을 어떻게 보장하지? 아르마가 잘못 전달했을 가능성은?

케테르라 할지라도 공간과 차원을 넘어 의사를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초차원통신이나 초광속통신이 개발되려면 아직 멀었다. 그래서 다른 형제들은 이 대화에 끼지 못했다.

―아르마는 허튼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 말을 입증해 줄 증거가 저기에 있다. 우리가 포착하지 못한 위성이 불타올라 추락하고 있군.

―위성이라고? 그런 게 남아 있었나?

디아보로스가 흠칫했다. 인류의 인공위성은 이미 모두 격추한 뒤다. 그렇다면 저기 대기권을 낙하하고 있는 불덩어리들은 뭐란 말인가.

―인류도, 우리의 것도 아닌 제 3자의 인공위성이란 소리지. 아마도 주신께서 따로 만들어두었다가 폐기한 것일 확률이 높다.

―우리에게도 포착되지 않는 위성이라니…

―주신께 그게 어렵겠나? 잊지 마라, 디아보로스. 그 분은 우리의 신이다.

아크는 고뇌도 하고 실수도 하며 잘못 판단할 수도 있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이, 그는 케테르의 신이었다. 과거부터 케테르는 어비스에 처박혀 실험체 취급을 받아왔다. 비록 그가 손을 놓은 몇 백년 동안 케테르가 쇠퇴했다고는 하나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 인류의 발전에 케테르가 따라가지 못해서 그런 것 뿐.

이제 케테르는 기계진화를 이뤘다. 미니언들이야 애초에 지성이 없으니 제외하고, 하이로드와 귀족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기계진화란 인류와 동등한 힘을 의미했다. 천년이 지나 마침내 인류와 동일한 출발점에 선 것이다.

거기에 비오스 행성까지 선물로 주어졌으니 오죽할까. 케테르는 비오스라는 비옥한 토양을 기반으로 하여 무럭무럭 자랐고, 마침내 인류와 대등하게 성장했다. 디아보로스는 수긍했다.

―폐기된 인공위성들은 아마도 주신께서 인류를 관찰하기 위한 것일 확률이 높겠지. 지금은 다른 방법을 쓰시겠지만…아무튼 저 인공위성들을 폐기한다는 것은 인류에게서 완전히 손을 뗀다는 말과 다름없을 터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마음껏 갈란테를 공격해도 된다는 소리군!

―…네가 먼저 시험해봐라, 디아보로스.

―뭐? 내가? 그건 싫다. 네 부하들을 보내라.

―그럼 같이 가는 걸로 하지.

―비오스에 있을 녀석들도 와야 하는데…우선은 후퇴하는 게 어떤가?

―그게 좋겠군. 괜히 우리가 앞장서서 돌격할 필요는 없지. 다른 녀석들에게 알려주고 상황을 보도록 하지.

그리하여 케테르 군대의 전면공세는 흐지부지되었다. 이는 케테르 제국 내의 권력투쟁에 기인한 것이다. 인류는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지만 전력을 동원해서 침공하기엔 다른 하이로드들이 영 걸린다. 뒤통수를 맞는 것만큼 짜증나는 것은 없으니까.

디아보로스와 에피칼로스는 인류의 군대가 전열을 정비하고 있는 동안 재빨리 부하들을 수습해 도망갔다. 연합사령부와 정치가들은 그야말로 벙쪘다. 돌격해서 파괴되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이던 케테르 군대가 도망을 간다니?

“진짜 도망갔는데요?”

간신히 쏘아올린 소형 인공위성에 탑재된 광대역 레이더가 케테르 군대의 움직임을 알려주었다. 다들 할 말을 잃었다.

“…”

레이놀드 원수 휘하 지휘통제실의 수많은 군인들이 황당해했다. 그렇게 전쟁은 끝났다.

.

.

.

중립선언을 하고난 뒤 아크는 인류를 지켜볼 수 있는 모든 플랫폼을 제거했다. 인공위성부터 시작해서 도처에 마련해 놓은 수천, 수만 개의 카메라도 치우고 나니 표정부터가 되게 후련해 보인다. 짐덩이를 내려놓았다고나 할까.

의자에 앉아 기지개를 켜고 아무것도 나타나 있지 않은 벽면을 본다. 원래라면 갈란테 행성 전역 곳곳의 화면이 비춰졌을 텐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의 껍질을 완전히 벗지 못한 신으로서, 아크는 인류를 위해 이런저런 것들을 해왔다. 천년 전부터 그는 인류를 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폐단위부터 도량형, 도로, 군사편제, 무기 등의 발전에서부터 마침내 인류가 풍족하게 살 정도의 밑천을 마련해 주었다.

인류는 아크의 손에서 자란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그 스스로는 인류가 유년기에서 벗어나 성년기로 접어들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사실은 인류를 품에 꼭 안고 있었던 것이다.

“…이젠 뭐 알아서 하겠지.”

케테르를 보면서 아크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인류를 감싸고 도는 것이 반드시 그들에게 도움되지는 않는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지구와 비교해보면 별로 큰 차이도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전쟁범죄나 대량학살 등의 죄악이 없어진 것은 나름의 장점이긴 하지만.

“…아들딸을 출가시킨 아버지 마음이 이런가…”

과거 그는 자식을 가진 적도 있지만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르마가 임신 기능을 추가해 아이를 낳을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모르겠다. 게임이나 하자.”

에테르 통신망과 개인용 컴퓨터가 발전한 시대에 들어서니 아크가 즐길 것이 많아졌다. 500년 전만 해도 별로 할 게 없어서 해가 지면 자리를 깔고 잠을 청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인류가 만든 여러 문화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요즘 아크가 열을 올리는 게임은 그라운드 제로라는 게임으로 배틀로얄 형식의 게임이다. 100명 정도의 게이머가 한 맵에 떨어져 총기와 액세서리, 차량 등을 파밍하고 최후의 한 명이 남을 때까지 겨룬다.

맵이 상당히 큰데 비해 자기장이라는, 플레이어의 운신을 제약하는 요소가 있어서 시작하고 20-30분이 지나면 맵이 상당히 좁아진다. 플레이어들은 최대한 총기와 탄약을 파밍하고 안전구역 안에 들어가려고 발버둥 쳐야 한다. 안전구역 밖, 그러니까 자기장에 노출되면 지속적으로 데미지를 입게 된다.

아크가 인류의 멀티플레이 게임을 즐기는 것은 유희에 가깝다. 그러나 초월적인 육체를 가지고 게임을 해봐야 재미가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능력을 평범한 인간 수준에 맞추고 시작한다. 시력과 반사신경, 공간적응능력 등을 모두 일반인에서 약간 나은 수준으로 맞췄기에 다른 사람과도 게임을 즐길 수 있다.

“아오, 뭔 또 핵이야.”

그라운드 제로는 최근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게임이다. 게임성이 아주 좋다고 하기엔 좀 그랬지만 100명에 달하는 플레이어들이 생존하기 위해 경쟁을 한다는 점이 요즘 사람들의 구미에 맞았나보다.

총기나 여러 액세서리 등을 파밍하는 재미도 있고 꽤나 운적인 요소도 있어서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몇 번 1등을 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그 맛을 잊지 못해 다시 접속하는 게임이다.

문제는 이 게임에 핵이 많다는 것이다. 방금 아크는 총기류를 아주 맛있게 파밍한 다음 오토바이를 타고 맵을 가로지르던 참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멀리에서 날아온 총알 세 방에 운명하고 말았다. 헛총질도 하지 않는 걸 봐서는 명백한 에임핵이었다.

“너 고소…는 아니고 밴.”

게임을 하는데 있어서 능력을 쓰진 않지만 핵을 쓰는 놈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크는 핵쟁이의 IP와 주소를 추적했다. 어디에 사는지 알아낸 다음 나노매터리얼을 보냈다.

20대 초반의 남자였다. 그는 스트리밍을 통해 자신의 게임을 방송하고 있었다. 핵을 쓰는 주제에 시청자들에게 자신의 에임실력을 자랑하며 후원을 요구했다. 그 순간, 모니터가 갑자기 꺼졌다.

“아 씨발 뭐야.”

거칠게 전원스위치를 눌러본다. 그러나 화면이 돌아오지 않았다. 모니터에 이어 컴퓨터까지 완전히 다운되었다. 그는 짜증을 내며 키보드를 쾅쾅 내려친 후 컴퓨터 케이스를 열었다. 그 순간 스파크가 번쩍 튀었다.

“으억! 씨발!”

그는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방금 전까지 돌아가던 컴퓨터에서 연기가 피시식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망연자실했다. 이게 얼마짜린데!

“꼬시다, 핵쟁이 녀석.”

아크는 다시 게임에 집중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BetaGo라는 아이디를 가진 플레이어가 무차별적으로 게임을 휩쓸고 있었다. 아크도 한 마을을 근거지로 삼아 녀석에게 대항해봤지만 별 반항도 못하고 탈탈 털렸다. 녀석의 에임과 움직임은 엄청난 수준이었다.

탕! 탕!

몇 번의 방이 만들어지고 아크는 어김없이 베타고를 만났다. 녀석은 아무것도 입지 않은 속옷차림을 고수했기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흔한 핵쟁이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아크는 그라운드 제로 프로그램 자체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기에 핵인지 아닌지 쉽게 알아낼 수 있다.

“고인물 스텝보소.”

베타고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눈부셨다. 어쩌다가 한 발을 맞추는데 성공하긴 했으나 연타가 들어가진 않았다. 녀석은 점프와 엎드리기, 포복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특히 와리가리 스텝으로 아크의 에임을 농락했다. 이게 핵이 아니면 뭔가 싶어서 면밀히 데이터를 조사해봤지만 아니었다. 베타고의 코드에선 어떤 에러도 검출할 수 없었다. 핵이 아니란 뜻이다.

아크가 베타고에게 탈탈 털리고 있을 때 아르마가 과일을 가지고 방에 들어왔다. 그녀는 티팬티에 가슴이 반쯤은 드러나 보이는 브래지어, 밴드스타킹을 착용하고 아크의 옆 의자에 앉았다.

“주인님, 이거 드세요.”

“응…고마워…아…열 받네.”

헐벗은 미녀가 옆에 앉아 과일을 입에 넣어준다. 겜돌이라면 누구나 바라마지않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크는 베타고에 대한 것을 아르마에게 일러바쳤다. 그녀는 얼룩메론을 깎아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말했다.

“핵이 아니라고요?”

“응, 아니야. 에러코드가 안 나왔어.”

“그럼 사람이겠네요.”

“사람이 할 수 있는 스텝이 아니라고 그러네. 저자식 맨날 우승하는데.”

“어디 봐요.”

아르마는 옆에 앉아서 아크가 게임하는 것을 한동안 구경했다. AI프로그램인 그녀로선 주인이 이렇게 게임에 몰두하는 게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원한다면 프로그램 자체를 조작해서 매번 우승할 수도 있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가 말이다.

능력을 보통 인간과 비슷하게 낮추면서까지 게임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희한한 대답이 돌아왔다.

“게임하는 데 이유가 어딨어. 그냥 하는 거지.”

“그런가요.”

한동안 게임에 집중하던 아크는 탄식을 내뱉었다. 베타고 그녀석을 다시 만난 것이다. 녀석은 보급상자, 그러니까 맵상에 랜덤으로 떨어지는 것을 매번 잽싸게 주워 먹고 있었다. 이쪽의 캐릭터가 자동차를 타고 신나게 달려갔지만 녀석이 이미 오토바이를 타고 떠난 뒤였다. 저 꽁지머리 헤어스타일과 속옷을 보면 녀석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저거 킬댓이 말도 안 된다고. 명중률도 장난이 아냐. 저걸 인간이라고 볼 수 있는 거야?”

“나노매터리얼을 보내 확인해보지 그러세요?”

“글쎄…핵쟁이도 아닌데.”

몇 번 망설이던 아크는 다시 베타고에게 초장거리 저격을 당한 뒤 짜증을 내며 씩씩댔다.

“에라이 모르겠다. 누군지 얼굴이나 보자.”

그리고 화면에 뭔가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것은 인간이 아니었다.

“…뭐야. PC방도 아니고 어디야?”

“연구실…같아 보이네요. 마우스를 잡고 있는 건 기계 팔…실험용 오토마톤인가 보군요.”

아르마가 간단히 정리했다. 그러니까 아크를 농락한 베타고의 정체는 사람처럼 마우스와 키보드를 통해 명령을 입력하고 있는 오토마톤이었던 것이다.

인류가 언제 여기까지 발전했을까. 베타고의 손가락이 마우스 버튼을 클릭했다. 바르마 인공지능 연구소가 만든 베타고 프로그램은 그라운드 제로 게임에서 인간을 압도하는 성과를 냈다. 아르마가 손에 턱을 괴며 말했다.

“인공지능이 벌써 저 단계까지 다다랐네요. 20-30년만 있으면 초인공지능 단계로 접어들지도 모르겠어요.”

============================ 작품 후기 ============================

캘리버가 백기를 내걸었습니다!(펄---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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