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년을 살아온 남자-186화 (186/217)

00186 기계진화 =========================

기계진화 - 2

케테르란 아주 예전…그러니까 갈란테 행성에 문명이 만들어질 때부터 존재했었던 종족을 뜻한다. 같은 종족이라고 하지만 개체에 따라 생김새가 너무도 달랐다. 인류는 어비스라는 차원에 처박힌 그들을 두려워하고 멀리했다.

마물, 마족, 그리고 마왕.

마치 평민, 귀족, 왕과 같이 세분화된 계급구조를 가진 이들을 통틀어서 케테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케테르란 우드 엘프와 같은 종족명인 것이다.

인류의 끊임없는 견제와 공격에서 케테르는 살아남았다. 대체 어찌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어비스에서 빠져나와 지상에 자리를 잡았고, 꽤 번성하여 영토를 차지하곤 눌러앉았다. 인류는 그들을 미워하면서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렇잖은가? 그들이 아니면 마나석 공급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진다.

케테르가 왜 체내에 마나석을 갖고 있는가. 이 수수께끼를 파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몇 학자들이 진지하게 접근했고 케테르학이 생길 정도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현 시점에서 케테르란 그야말로 수수께끼의 종족이었다. 오우거가 희귀 몬스터 취급받고, 그리핀과 와이번 등이 멸종된 동물 대우를 받고 있을 때, 케테르들은 여전히 살아남았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화석이랄까.

그들의 모습은 꽤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천년도 더 된 문헌에는 그들을 몬스터와 비슷하게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생명체와 기계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예전에 마법사와 마법공학자들이 만들었다던 골렘과 같이 변해버렸다는 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류는 케테르를 두려워하면서도 필요로 한다. 그들이 체내에 가지고 있는 마나석 때문이다. 치열한 전쟁 끝에 케테르 군주들을 절반 이하로 줄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케테르족 자체가 쪼그라든 것을 보고는 후회했다. 케테르를 사냥해서 마나석을 얻어야 하는데 개체수가 줄어버리니 황당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인류는 케테르를 사육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케테르는 인류의 공격에 저항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전황을 뒤집지는 못하고, 인류는 케테르에게 필요한 마나석을 얻어내고 있으니까.

그나마도 최근에는 케테르측의 영토가 줄어간다는 기사가 많이 나왔다. 케테르의 세력이 쪼그라들면 인류도 피해를 본다. 그만큼 개체수가 줄어 마나석을 얻지 못하게 된다.

이런 적대적 공생관계는 꽤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어쩌면 천년도 더 전부터, 케테르가 어비스에 있었을 때부터 지속되어온 것이다. 하지만 인류의 화력이 케테르의 방어력을 능가하기 시작한 최근, 밸런스가 깨지고 있었다. 대구경의 마장포까지는 그렇다 치는데 사거리 수백km를 자랑하는 로켓이 등장했다.

케테르는 거기에 대응하기라도 하듯 A필드라는 희한한 방어막을 만들고 새로이 K9라는 포격계 미니언을 만들어내어 인류의 공격에 맞섰다. 치열한 포격전에 이어 중장거리 사격전, 근접전이 쉴 새 없이 벌어졌다.

연거푸 벌어진 전투의 결과는 케테르의 패배였다. 그들은 A필드와 K9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화력을 견디지 못했다. 그들도 나름 진화했으나 인류는 로켓을 연구하면서 화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마력탄으로 대변되는 화력뿐만 아니라 화약을 합성해 더 거대한 로켓을 만들고 그걸 케테르의 영토에 쏟아 부었다. 그들은 또다시 영토를 잃었다.

“벅차군…”

케테르 군주 디아보로스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비전투에서의 그는 인간과 별 구분이 되지 않지만 전투에 들어가면 괴수의 형상으로 바뀐다. 그의 주위에는 상처 입은 아트라간 2마리와 수십 개체의 미니언이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전투는 끝났다. 인류 연합군은 케테르의 영토에 쳐들어와서 수천 개의 마나석을 수확했으며, 약간의 영토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저 멀리 인류의 요새가 보인다. 그들은 케테르의 영토를 갉아먹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조금씩, 조금씩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영토에 대한 본능이리라. 인간은 땅을 좋아하니까.

“후우…후우…”

파괴의 마왕. 디아보로스가 과거에 불린 이름이다. 그는 주신 아크에 의해 케테르 군주로 바뀌었지만 타고난 속성은 바뀌지 않았다. 케테르 군주 중에서도 가장 파괴적이고, 난폭하다. 언제나 전투를 원하는 존재가 바로 디아보로스다.

다만 최근 인류가 일으킨 전투는 그로서도 꽤 벅찬 감이 있었다. 그들의 화력이 무지막지해진 것이다. 주신 아크는 케테르에게 A필드라는 방어막과 K9라는 포격용 미니언을 선물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인류의 공세를 막아내기가 힘들었다. 케테르도 나름 강해졌지만, 인류는 그것보다 더 강해졌기 때문이다.

A&A 일렉트릭이 얼마나 많은 지식과 경험을 인류에게 선물했는지 디아보로스를 비롯한 군주들은 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한마디 불평조차 않고 있었다. 그들의 숙명이 그것이기에.

“하지만…이대로는…”

이대로는 힘들다. 최전선에 서는 디아보로스가 가장 잘 안다. 인류는 지금 케테르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이 위태위태한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 그렇게 길지는 않은 것 같다.

털썩.

과거 1세대 드라켄과 닮은 거구를 가진 디아보로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장포는 그렇다 치는데 인류의 화약무기는 견디기가 어려웠다. 저 멀리 다른 전선에 있는 크세르크스와 에피칼로스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특히 에피칼로스와 휘하 군세는 정면공격에는 다소 취약하기 때문에 치명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곧 회복되기는 하겠지만.

그리고 슬러스는…

디아보로스의 입가가 일그러진다. 그녀는 이런 전면전에서 별 쓸모가 없다. 나름 전투력이야 있지만 주신 아크와의 만남 이후로 어째 의욕을 잃은 것 같다.

색욕을 속성으로 가진 그녀는 이런 피비린내 나는 전투보다는 섹스를 더 좋아한다. 디아보로스가 갖고 있는 파괴욕구만큼이나 섹스욕구를 가진다고 생각해보면 그녀가 얼마나 고통을 받는지 알 수 있다. 잠시라도 머릿속에서 섹스가 떠나지를 않을 것이다.

그녀의 욕구는 채워지지 않는다. 휘하 귀족들과 몸을 섞어봐야 우스울 뿐,  주인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전투에도 건성건성 참가할 수밖에 없다. 사실 슬러스의 군세 자체가 그렇게 대단한 편은 아니기도 하고.

“어쩔 수 없나. 우리가 힘을 내보는 수밖에!”

디아보로스의 눈이 다시 붉어진다. 끝없는 전투의지를 가진 파괴의 마왕이 다시 힘을 내었다. 주변의 미니언들의 기세가 충만해진다. 그런데 하늘에서 빛이 반짝였다.

“저것은…”

케테르 제국의 한가운데, 과거 중앙호수 안의 자이언트족이 거주지로 썼던 땅에 거대한 비석이 내려왔다. 미니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연스럽게 비석 주위로 몰려들었다. 수십, 수 백만에 달하는 미니언들이 중앙호수를 가득 메웠다.

작은 놈들은 땅에, 큰 놈들은 호수에 몸을 담그고서 비석을 올려다보았다. 더 이상 생명체도 아닌 그들이 바라보는 것은 아주 매끈한 표면을 가진 비석이다. 귀족들까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비석 주위로 모였다.

“이건 뭐지? 갑자기 왜 이런 게?”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에피칼로스가 비석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비석에서 적의가 아닌 다른 의식을 잃어냈다. 케테르가 생명체에서 무기질로 진화할 때도 이런 느낌을 받았다. 칸나이족이 그들에게 부여한 진화라는 기능을 극대화시킨 에너지. 마나의 기원인 에테르의 따스한 기운이 비석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황금색 광채였다.

“아…”

네 군주의 의식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들은 수많은 별들로 가득한 우주공간에 있었다. 거기에 아크와 아르마가 앉아 있다.

“다들 내 공간에는 자주 와봐서 익숙하지? 일단 앉으라고.”

“예? 아, 예…”

무지막지한 케테르 군주라도 아크의 앞에선 말 잘 듣는 강아지 처지다. 넷이 앉아 아르마가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적으로 주인님께서 케테르 제국을 이대로 놔두면 안 된다고 생각하셨다는 점을 알리고 싶군요.”

말이 좀 꼬였지만 어쨌든 도와준다는 뜻인 것 같다. 디아보로스와 크세르크스는 반색했지만 슬러스는 다소 미묘한 표정이었다. 에피칼로스가 물었다.

“저희의 입장을 주신께서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방금 나타난 저 회색의 비석이 그 대답입니까?”

“그렇다. 머신셀을 살포할 수 있는 머신코어라고 하지. 인류의 공격력이 지나치게 강해졌기에 너희에게 새로운 진화를 부여할 필요성이 생겼어. 하지만…이것저것 조잡한 기능을 더해봐야 인류를 이기지는 못하겠지. 너희들 스스로도 지쳐 있을 테고. 안 그런가?”

세 군주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 그대로 지친다는 말이 맞다. 여러 전력이 확충되었고 금제도 해제되는 등 전투력은 상승했지만 인류가 워낙 급성장하다 보니 진이 빠진다. 전투를 해도 좀 이겨야 힘이 나지 않겠는가 말이다. 매일 패배하는 게 일상이니 귀족들도, 군주들도 지쳐가고 있었다.

“머신코어는 그것을 위한 선물이랄까…여러분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에요.”

“그리고 너희의 영토도 너무 좁다는 생각이 들었지. 해서…갈란테가 아니라 다른 행성을 선물하고자 한다.”

“예?”

“다른…행성을?”

이 발언에는 에피칼로스와 시무룩해 있던 슬러스마저 깜짝 놀랐다. 행성을 준다고? 아무리 주신이라고 하지만 그게 가능한 일이던가?

“앞으로 인류는 보다 발전해 여러 행성에 진출하겠지. 나의 도움이 있으면 충분히 가능해. 너희들은 그런 인류에 대항하기 위해 진화하고 또 진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좁은 땅으로는 무의미…극한의 환경에 맞춰서 진화하고 또 살아남는다면 인류에게 좋은 적수가 되겠지. 어디를 갖고 싶은냐? 골라라.”

네 군주의 눈앞에 머리만한 행성이 떠오른다. 후보군은 3개. 핀토스와 비오스, 기가스였다. 핀토스는 갈란테의 절반 정도 크기를 가진 금속행성이고 비오스는 갈란테와 아주 비슷하지만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암석행성이다. 기가스는 가스행성 티타니아의 위성인데 크기가 갈란테의 두 배 정도다. 아르마가 각 행성에 대해 설명했다.

“태양계 내에서 여러분들이 살 수 있는 땅을 골라보니까 이렇게 됐어요. 지금 당장은 어렵지만, 월드 엔진을 복제하면 거주지로서도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어요. 너무 멀어도 곤란하니까, 후보군은 3개 정도에요.”

“하, 하지만 저희는 행성간 이동수간이 없는데…”

에피칼로스가 곤란함을 표시했다. 당연하다. 케테르라고 해봐야 지상에서 생활하는 무기질의 존재일 뿐, 우주로 진출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다른 행성이라니.

“그걸 위해서 머신코어를 내려 보냈지.”

아크가 내민 손 위에서 한 미니언이 형체를 바꾸었다. 생명체도, 기계도 아닌 녀석의 몸 끝에서 금속침식이 시작되었다. 관절은 실린더로, 근육은 다차원 모터로,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한 각종 기관은 수십만 개의 나노머신이 결합된 소형 머신코어로 바뀌어갔다.

미니언은 불과 1분도 되지 않아 완전한 기계가 되었다. 이런 급작스런 진화에 네 군주는 당황했다.

“주, 주신이시여, 이게…?”

“기계진화다. 너희들의 전투력을 대폭 끌어올리기 위한 것이지. 계산상으로는 같은 개체수라도 몇 배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다. 증식도 손쉬워서 개체수를 크게 늘릴 수 있고, 나노머신 살포를 이용해서 요새를 만들 수도 있지. 이 머신코어는 일종의 대형 나노매터리얼 변환기다.”

아크의 말을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어쨌거나 디아보로스와 크세르크스의 표정은 밝아졌다. 강해진다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다. 그들은 인류와의 전쟁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존재다. 더 강해져서 그들과 싸울 수 있는데 뭐가 문제인가.

다만 에피칼로스는 복잡미묘한 얼굴이었다.

“주신이시여, 물론 강해진다는 것은 저희가 환영하는 바입니다만, 저희에게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해도 저희는 어차피 인류에게 멸망당할 운명입니다만.”

아크는 그의 말에서 약간의 서운함을 읽을 수 있었다. 하긴, 인류에 비해 케테르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인류가 온갖 과학기술을 전수받을 때, 케테르는 고작해야 A필드와 K9 미니언 뿐이니까. 아크는 그의 심정을 이해했다. 무기는 제대로 주고 싸우라고 해야 할 것 아닌가.

“나를 용서해라, 에피칼로스.”

“아, 아니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주신이시여.”

“너희에게 소홀했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래서 새로운 기회를 주려고 하는 것이다. 인류가 갈란테 행성을 차지한 것처럼, 너희들도 새로운 행성을 차지할 기회 말이다. 어떤가? 너희들은 독자적으로 진화할 수 있고, 힘을 모아 인류를 공격할 수도 있겠지. 그 과정에서 나는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월드 엔진의 복제품은 물론 내 관할 아래에 있지만, 에테르는 오롯이 너희를 위해 쓰여질 것이다.”

그러니까 케테르는 지금까지처럼 인류의 공격을 막는 데만 전전긍긍하는 게 아니라 보다 나은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새 행성을 갖게 되면 케테르는 환경에 맞춰서 기계진화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떤 미니언이 태어나게 될지는 그들의 능력에 달렸다.

“월드 엔진을, 우리가 쓰게 된다면…”

“최소한 지금처럼 인류의 공격에 연전연패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겠죠. 우주를 항해하는 모함 등을 만들고 군대를 모으게 되겠죠. 어쩌면 인류보다 발전속도가 더 빠를지도 몰라요.”

아르마가 옆에서 부축이자 에피칼로스도 마음을 돌리게 되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에겐 선택지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케테르의 모든 것은 주신에게 맡겨져 있으니까.

세 군주가 환영의 뜻을 나타내었다. 하지만 슬러스는 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다. 주신 앞에서 다리를 꼰 걸 보면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듯싶다. 아크가 그녀에게 물었다.

“슬러스는 어떻게 생각하지?”

“저는…이러나저러나 별로 상관없어요.”

“몸이 기계로 변하게 되는데, 거기에 대해선?”

“어차피 폐하께선 저를 바라봐주지 않으실 테니까, 거적대기로 변해도 상관없어요.”

아무래도 단단히 삐진 것 같다.

============================ 작품 후기 ============================

케테르를 기계진화시키려는 이유는 그게 설정짜기 편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저그처럼 생명체가 우주에서 전투를 벌인다고 생각하면 좀...

그리고 기계종족은 제 취향이기도 하고요...뭔가 좀 멋있잖아요?

물론 작중에선 생명체가 진화해봐야 인류의 화력 앞에서는 한계가 있으니

기계진화시키려는 거고...

슬러스는 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될 겁니당.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