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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을 살아온 남자-175화 (175/217)

00175 케테르 제국 =========================

케테르 제국 - 1

기이이잉―

그리핀급 비공정 깃털 호는 천천히 호수 주위로 이동했다. 무려 30년이나 된 동체는 곳곳에서 낡은 표시가 역력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제법 멀쩡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정부에 의해 마장포 1기와 조준기, 기타 전투에 관련된 모든 설비가 철거되어서 정면에서 보면 약간 모양이 이상하지만 밑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숲에서 벗어나게 해줄 구세주가 도착했다.

“어어이! 어어이!”

밑에서 깃털 호를 올려다보면 배의 밑바닥이 보인다. 비공정을 처음 디자인한 사람이 밑부분을 배의 그것으로 디자인했기에 다들 따라한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어차피 하늘을 나는 놈인데 굳이 배를 닮을 필요가 있나 논의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본격적인 움직임은 없었다. 이런 병기개발은 생각 외로 보수적이니까.

깃털 호에서 크레인이 강철 와이어를 내렸다. 그물에 단단히 고정하자 놀랍게도 오우거의 육중한 몸에 끌어올려진다. 놈은 발광했지만 크레인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깃털 호도 약간 흔들리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오우거를 잘 끌어올리고 있었다.

“아크씨. 이제 어쩔 거냐고 물어보는데요?”

조장들이 아크에게 물었다. 후발대도 여러 성과를 얻은 만큼 이대로 모두 올라타고 떠나는 것이 최선이다. 이번 탐험의 성과가 모두 충족되었으니까. 아크가 말했다.

“여기 지긋지긋하죠?”

끄덕끄덕.

겨우 2주일간의 탐험이었지만 체중이 몇 kg나 빠질 정도로 고된 나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조차 고통스럽고 한낮에는 햇볕을 받는 것조차 위험하다. 그만큼 더운 곳에서 고생을 했으니 이제 푹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아크도 그런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여길 뜹시다. 비공정이 우리를 마을로 데려다 줄 겁니다.”

“가자! 집으로!”

“우호오오!”

비공정이 따로 튜브를 내리자 거기에 사람들이 올라탄다. 몇 번의 반복 끝에 깃털 호는 사람들을 모두 싣고 천천히 상승했다. 오우거는 무장포대를 들어낸 곳에 마련된 우리에 갇혔고 사람들은 그제야 여장을 풀었다. 벌써부터 배정된 침대에 누워 코를 고는 사람까지 있었다.

다만 탐험대장에겐 몇 가지 일이 더 남아있다. 후원자인 아칸토 무역회사에 성과를 종합해서 보고해야 하니까. 사실 오우거 생포 외에는 곁다리에 불과하다. 후원자들은 이름 모를 희귀한 식물보다는 거대한 몬스터를 좋아한다.

몇 시간에 걸친 보고와 회의가 끝난 후에야 아크는 비로소 배정된 방문을 열 수 있었다. 무역회사의 델토로 전무가 이것저것 부탁하고 앨리스가 들러붙어서 뭔가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중요한 건 아니다.

‘나도 잠이나 좀 자둘까.’

피곤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을 통제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서 꽤 신경을 썼던 것이 사실이었다. 아직 인간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지라 휴식이 필요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침대 위가 불룩하다. 누군가 안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스텔라.”

아크는 한숨을 쉬며 스텔라의 모로 누워 있는 스텔라의 엉덩이를 툭툭 때리곤 침대 끝에 앉았다.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일어난다. 은색 머리카락이 모래처럼 쌓인다.

“나인 줄 어떻게 알았어?”

“내 방에 허락도 없이 들어올 사람이 누가 있겠냐. 나 자야하니까…알지?”

“모르겠는데. 여기 그냥 누워서 자.”

침대를 팡팡 때리며 누우라고 권하는 걸 보면 누가 주인인지 모를 지경이다. 아크는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일어나. 나 잠 좀 자자.”

“누가 자지 말래? 그냥 누우면 되잖아. 내 옆에.”

“내가 잠든 사이에 무슨 짓을 하려고.”

“아무 짓도 안 해.”

둘의 실랑이는 아크가 완전히 항복함으로써 끝났다. 그는 투덜대며 상의만 벗고 대충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이고, 소리가 절로 튀어나온다. 스텔라가 좁은 침대에서 꼬물거리더니 몸을 찰싹 붙여왔다. 섀도우 엘프의 피부는 꽤 서늘하다.

“아크.”

“응?”

“마을에 돌아가면…계속 있을 거야?”

“글쎄다.”

“글쎄는 뭐야, 글쎄가. 그냥 예전처럼 호숫가 근처에서 사는 거지.”

“이 한량에게도 할 일이란 게 있어서 말이다.”

“그게 뭔데?”

“개인적인 일이라서.”

“그래서 나를 버리고 가겠다는 거지, 지금?”

스텔라가 아크의 오른팔을 꽉 붙들고 그녀의 다리를 허벅지 위에 척 올려놓았다. 아크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내가 너한테 뭐 했냐. 버리기는 뭘 버려.”

“소문 다 났거든? 마을에.”

“무슨 소문?”

“…”

거기에서 스텔라는 입을 다물었다. 볼을 부풀리고 아크를 바짝 끌어안는다. 소녀라고는 하지만 종족이 섀도우 엘프다보니 인간의 여성보다 더 몸매가 굉장하다. 그녀의 외모만 본다면 누군들 성인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애는 애지.’

아크의 기준에서 스텔라는 건드리면 안 되는 애다. 마을에서 주변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고 자라야 하는 애 말이다.

“나 한 3년만 지나면 진짜 멋지게 자랄 텐데.”

“그건 인정한다.”

스텔라는 예쁘다. 섀도우 엘프 여성들은 다들 한 미모 한다는 소리를 듣지만 특히 그녀는 더 예쁘고 몸매도 좋았다. 그녀의 말마따나 3-4년만 자라도 최고미녀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스텔라는 더 용기를 내어 아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마치 연인처럼.

“그때까지 기다려주면 안 돼? 3년만…”

“얼씨구. 인간을 남편으로 삼게?”

“안될 거 없잖아. 마을 어른들도 아크 좋게 보고 있으니까…우리 엄마 아빠도…”

“…난 떠나야 돼, 스텔라.”

“그럼 나도 같이 가!”

갑자기 몸을 뒤집더니 아크 위로 올라왔다. 그녀의 축 늘어진 머리카락이 팔을 간질였다.

“나도 밖에 가고 싶었어. 같이 가, 아크.”

“미안. 난 멀리 떠날 생각이라서.”

그녀의 눈동자가 젖어든다. 아크의 말투와 분위기에서 절대 양보하지 않을 것임을 알아챈 것이다. 그는 스텔라에게 뭐든지 양보했지만 이런 최후의 순간에는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그녀도 그걸 안다.

“…후우.”

한숨을 쉬며 다시 옆으로 내려와선 아크에게 등을 돌리며 눕는다. 토라진 모습에 아크가 등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왜 그래, 갑자기?”

“난 아크가 떠나도 남편을 맞이하지 않을 거야.”

“그래서?”

“노처녀로 늙어야지. 아크가 노심초사하도록.”

“얼씨구.”

“멋지게 성장한 나를 본 아크가 뒤늦게 후회하는 거야. 그때 너를 내 아내로 삼았어야 했는데…나는 고개를 홱 돌리고 거절하는 거지. 너무 늦었어, 라고.”

확실히 스텔라는 아직 어려서 그런지 소녀다운 감성이 있다. 아크는 그녀의 원대한 계획을 칭찬했다.

“계획 멋진데.”

“지금 나 놀리는 거지?”

갑자기 몸을 확 돌리더니 아크의 어깨를 물어버린다. 그래봐야 고통도 느껴지지 않지만 일부러 아픈 척하니 그제야 아팠어? 하고는 물린 부위에 입김을 불어주었다. 아크는 사랑스런 그녀를 꼭 껴안았다.

“잘 지내. 나 없어도 밥 잘 먹고.”

“진짜 갈 거야? 언제?”

“마을에 도착하면 슬슬 준비해야지. 정기선 타고 가도 되고…아니면 이 비공정을 이용해도 되고.”

그냥 차원을 열어 이동해도 상관없지만 한동안은 여행을 하고 싶었다. 스텔라는 그제야 단념했는지 아크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못됐어, 진짜.”

“내가 뭐 했다고 못됐다고 하냐. 너무하네.”

“그냥 못됐어, 그냥.”

“그럼 뭐 그렇다고 치자.”

어린애와 말싸움을 해봐야 피곤할 뿐이다. 아크가 침묵하자 스텔라는 입술을 삐죽이더니 그의 몸을 만지작거렸다. 은근슬쩍 손이 밑으로 내려갔지만 손등을 찰싹 맞고는 포기해버렸다. 둘은 서로를 껴안고 잠만 잤다.

.

.

.

비공정 깃털 호는 날아날아 섀도우 엘프의 마을에 도착했다. 거기에서 정기선을 통해 갈 사람과 비공정을 통해 복귀할 사람으로 나뉘었다. 아크는 오두막을 정리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 후 비공정에 올라탔다. 그동안 사귀었던 사람들이 아쉬워했다.

“잘 가지마! 내가 나오는 악몽 꿔!”

하늘로 떠오르는 비공정을 향해 스텔라가 악다구니를 썼다. 아크는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제 깃털호는 대륙 동해안의 국가 델루드로 항로를 잡고 전속력을 내었다. 워낙 먼 거리인 만큼 시간을 줄이려면 속도를 내어야 한다.

“날씨 좋구만.”

아크는 차를 타서 깃털호의 갑판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위로는 깨끗한 하늘이 보이고 밑에는 거대한 강이 흐르고 있다. 수평선 너머로 끝도 없이 이어진 광대한 숲이 보인다. 대륙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그 넓이가 어마어마하다. 깃털호의 선장 그랜든과 앨리스가 아크의 맞은 편에 앉았다.

“좋은 날씨지요?”

그랜든은 수북한 턱수염을 기른 사나이였다. 젊었을 때는 군인으로서 한참 날렸다고 하는데 이제 노년으로 접어들어서는 이런 쥐뿔도 없는 비공정을 맡았다고 푸념하곤 했다.

물론 퇴역한 군인에게 일할 거리가 주어진 것 자체가 일종의 복지라는 것을 그도 안다. 연금을 타먹을 수도 있지만 케테르 제국과의 전투가 워낙 치열했기에 집에서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고 한다.

“예. 좋은 날씨입니다. 함장님.”

함장은 군함의 지휘관을 뜻하고 선장은 이런 비전투 상선의 최고책임자를 말한다. 아크는 그가 선장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함장으로 부른 것이다. 이런 겉치레도 가끔 필요할 때가 있다. 그랜든은 함장으로 불린 것이 기쁜지 허허, 하고 웃었다. 앨리스는 두 사내의 노닥거림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어디로 가십니까? 오우거를 생포한 남자라고 하면 델루드에서 꽤나 인기가 있을 텐데요.”

“우선은 아칸토로 가서 제 몫을 받아야겠죠.”

아크가 탐험대를 이끌고 오우거를 생포한 것은 결코 공짜가 아니다. 탐험대장의 역할, 그리고 오우거를 생포한 성과가 있으니 돈을 두둑이 받아낼 작정이다. 물론 돈이란 건 그에게 별 의미가 없지만 혹시 모른다. 귀중한 거라도 내줄지.

“벌써 본국에선 난리에요. 오우거의 사진이 이미 전송됐거든요. 살아 있는 오우거를 보는 게 처음이라, 공항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있을 거예요.”

“그건 좀 곤란한데.”

앨리스의 말에 아크는 볼을 긁었다. 유명세를 탄다는 것은 보통 사람에겐 좋은 일이겠지만 그에겐 탐탁지 않다. 어떻게 빠져나갈까 생각하는데 그랜든 선장이 양해를 구하며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오우거면 케테르 놈들 중에서 중형에 해당하겠군. 소싯적에는 놈들을 아주 많이 족쳤지.”

“어느 급에 타셨습니까?”

“나 말입니까? 물론 드레이크급이었지. 놈은 정말로 굉장했었소. 이런 비실비실한 비공정과는 상대가 안 되는 거대하고 묵직한 놈이었다고. 마장포를 2문이나 달 수 있었으니 화력은 끝내줬지.”

보통 비공정의 체급은 넷으로 나뉜다. 그리핀급, 와이번급, 에페르돈급, 마지막으로 드레이크급이다. 에페르돈급부터 마장포를 2문 탑재 가능하며 덩치부터 확연히 달라진다. 나라마다 비공정을 조금씩 개량하긴 했지만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아크가 본 바르마의 비공정은 에페르돈급을 화려하게 개장한 것으로서, 대 케테르 전선의 주역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이런 그리핀급은 최전선에 참여하지도 못한다.

그랜든은 비공정에 대해 쉴 새 없이 떠들어대었다. 누가 이 선장을 말 수 없는 사나이라고 했던가.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선 여자보다 더 수다스러워지는 게 바로 남자란 동물이다. 앨리스는 비공정에는 별 관심이 없는지 좀 듣다가 가버렸고 아크는 선장에게서 꽤 중요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케테르 제국과의 전투가 시작된다고…’

불과 일주일 정도만 남겨두었다고 한다. 이번 전투는 전쟁으로까지 표현되는 대단한 규모의 것으로서 무려 7개 국가가 참여한다고 했다.

동원되는 비공정만 17대에 임페리얼급 타이탄도 수십 기가 참여한다. 자잘한 전투와 뒤처리를 위해 소집되는 부대만 해도 군단 규모이고 모든 병력을 다 따지면 10만 명에 이른다.

그에 맞서는 케테르 제국도 대단한 것을 준비한다는 소문이 많았다. 아크는 그들의 전쟁에 흥미를 느꼈다. 아르마가 없기에 네 케테르 군주와 연락하는 게 불가능하니 직접 가서 그들을 만나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인류 사이에서 전쟁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으니 케테르 제국과 치고 박고 싸우게 된다. 아크가 예전에 케테르 군주들에게 약속한 바 있듯이 그들과 인류의 전력은 거의 동등하다. 인류가 비공정과 타이탄 등으로 무장했다면 케테르 군주들은 휘하에 아트라간 같은 무시무시한 괴물들을 데리고 있다.

‘평화롭게…안락하게 지내는 것보다는 이게 나으려나.’

케테르들을 살려둔 이유는 그들이 인류에게 자극제가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아크는 아직도 확신을 못하고 있었다.

‘평화로운 도태냐, 희생이 있는 발전이냐…’

============================ 작품 후기 ============================

칸나이족은 이제 등장하진 않습니다. 너무 먼치킨이라서...다만 그들이 만든 어떤 종족은 나올지도 모르죵.

항성계 전쟁요? 그때까지 가면 칸나이족이 알아차리지 않을까요?

핵융합에 대해 알아차리긴 할 겁니다. 다만 시기가 늦춰지겠죠. 핵분열 실험이 어려우니 핵무기로 만드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고, 따라서 핵융합에 대한 관심도...다른 에너지가 필요할 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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