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4 뿔고래의 여정 =========================
뿔고래의 여정 - 1
신서력 482년, 발리노어 대륙 남서쪽 해상 2100km 지점의 열도.
영구중립지대이자 생물종보호구역인 이 작은 열도에 극소수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법안이 마련되기 전부터 살던 사람들이라 국제연합도 이들을 내쫓지 못하고 생존권과 어업을 허가해 주었다.
5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는 이 열도 부근에는 다양한 바다생물이 살고 있어서 해양학자 등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부우우웅―
에메랄드빛 바다를 커다란 배 한척이 가로지른다. 선수갑판에 나온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사람들이 기대감이 가득 찬 얼굴로 섬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 둘, 여자 둘인 이들은 대륙의 남쪽에 붙어 있는 국가 일리아드의 해양생태연구소의 연구원들이다.
“어? 저기에 사람이 살았던가?”
갈색 짧은 머리칼에 구리빛 건장한 피부를 가진 남자, 라이언이 작은 섬의 해안가를 가리켰다. 다들 거기를 바라본다.
“잠깐 기착지로 삼은 거 아냐?”
탁한 금빛 머리카락을 단발로 기른 여성이 말했다. 워낙 더운 지방이라 다들 옷차림이 시원했는데 특히 미셸 그녀는 비키니에 짧은 반바지라는 파격적인 차림이었다.
“기착지로 보기에는 배가 작아. 주민으로 봐도 되겠는데. 낚싯대를 봐도 그렇고.”
턱수염에 검은 머리털을 가진 체격이 건장한 남자가 상황을 정리했다. 그의 이름은 보먼 델가드. 해양생태연구소의 팀장인 중년의 남자다. 그의 곁에는 소피아가 눈을 깜빡거리며 의자에 앉아 있다. 그녀는 대학생으로 방학을 기회삼아 보먼 삼촌을 따라왔다.
다른 연구원들과 달리 연구소 소속은 아니지만 대학을 졸업하면 이쪽 기관에 취업할 것이므로 예비연구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청순한 외모의 그녀는 바다생물에게 관심이 아주 많았다. 특히 그녀는 고래를 아주 좋아한다.
네 명은 이 시기에 여기를 스쳐 지나가는 뿔고래 떼의 생태를 살펴보기 위해서 왔다. 뿔고래는 수컷 성체의 길이가 12m 정도인데 이마에 5m정도의 긴 뿔이 자라나 있다.
녀석들은 이맘때면 순다 열도에서 쉬며 번식을 한 후 북상해 북극쪽으로 긴 여행을 떠난다. 뿔고래들이 왜 북상하는지는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보먼과 연구팀의 목적은 뿔고래에게 접근해 신호 발생기를 장착, 그들의 이동경로와 습성 등을 연구하는 것이다. 운이 좋아 먹이활동을 포착해 뭘 먹는가를 파악한다면 운이 좋다고 할 수 있겠다. 만약 새끼고래를 포착해 카메라로 찍는다면 그야말로 대박이다. 워낙 심해에서 이뤄지는지라 쉽지는 않겠지만.
세상은 바뀌었다.
50년 전만 해도 대륙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당시 주신의 대리인으로 불리며 절대권력을 쥐었던 황제 아크가 마왕들의 유혹에 넘어가면서 당시 존재하던 테라 연방에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
그를 보다 못한 여러 사람들이 합심해 그에 대항했고, 시민들이 총궐기를 해 응원했다. 마지막으로 호레스가 불리는 초인이 나타나 황제의 목을 베었다. 그 후로 거대한 테라 연방은 30개의 국가로 분열되었다.
이 과정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불과 3-4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테라 연방이 사라지고 30개의 국가가 생겨나 있었다. 그렇게 독립한 여러 국가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오갔으나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큰 전쟁은 없었다. 마장포를 비롯한 신형 무기가 등장해 강력한 방어력을 공고히 했기 때문이다.
타이탄은 물론 기동성 좋은 공격 플랫폼이지만 고정포대인 마장포를 결코 화력에서 능가할 수 없었다. 따라서 방어측이 해야 할 일이란 주요 거점에 마장포를 설치하는 것뿐이었다.
공격력보다 방어력이 월등한 시대에서, 타이탄은 차츰 도태되었다. 사실 이런 희한한 상황이 아니었더라도 국지전 이외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혼란의 시대를 거치면서 많이 배웠기 때문이다.
인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인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권력을 지닌 자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등을 배웠다. 누군가 말했다. 신황제가 반면교사가 되어주었기에 인류가 이렇게까지 평화로울 수 있었다고 말이다.
거기에 더해 지금의 인류는 워낙 경제권이 얽혀 있어서 함부로 주변 국가를 공격하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옆나라를 치자니 우리나라의 여러 기업에서 진출해 있기 때문에 뒷감당이 어려워서 섣불리 행동하지 못하는 식이다. 그리고 신황제가 어찌나 주의 구분을 잘 해놨는지 30여개 국의 국력이 거의 비등했다.
어쨌거나 보먼 팀장과 세 명은 눈앞의 사람에게 집중했다. 그는 두 개의 보트를 넓은 판으로 연결해 낚싯배로 쓰고 있었는데 연신 뭔가를 낚아 올리는 솜씨가 시원하다. 특히 낚시를 좋아하는 보먼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으나 이내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눈치 챈 모양.
“이상한데. 원주민 같은데 피부가 저렇게 하얄수가 있나?”
“원주민이 아닌거 아닙니까?”
라이언이 묻자 미셸이 뒤에서 중얼거렸다.
“원주민이 아닌데 여기에 있을 턱이 없잖아. 생각 좀 하라고.”
그녀의 말대로다. 여기는 대륙에서 2100km나 떨어진 섬이다. 여기에 살 수 있는 사람은 국제연합이 인정한 수백 명 정도의 원주민뿐이다. 그런고로 저 남자도 분명 원주민일 것이다. 하지만 흔히 본섬이라 불리는 순다 섬에 사는 원주민들은 검붉은 피부를 갖고 있다. 아마도 태양빛에 그을린 것이리라.
“머리카락이 검네요?”
거센 바닷바람이 일어서는 소피아를 휘청거리게 했다. 그녀는 챙이 넓은 모자를 꽉 누르곤 발돋움을 해 그를 보았다. 하얀 피부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 그가 이쪽을 보았다. 보트가 천천히 그의 낚싯배로 다가간다.
“안녕하심까!”
라이언이 기세 좋게 손을 흔들었다. 미셸이 황급히 그를 말렸지만 붙임성이 좋은 그는 환하게 웃으며 두 손을 흔들고 있었다. 다행인지 그 청년도 손을 흔들었다. 이쪽만큼 기분이 좋은 것 같지는 않지만.
‘어떤 사람일까?’
소피아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가끔, 아주 가끔 심성이 못되어먹은 사람도 있긴 하지만 착한 소피아는 그들마저 웃으며 대할 수 있는 상냥한 여성이다. 물론 그게 남자에게 쉽게 마음을 연다는 소리는 아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할 뿐.
“생선 좀 잡으셨습니까?”
보먼이 현측으로 가며 큰 목소리로 물었다. 청년은 대답 대신 생선을 꿴 꾸러미를 들어올렸다. 팔뚝만한 생선이 주르륵 딸려온다. 거기에 주먹만 한 집게를 가진 커다란 바다가재도 몇 마리 꿰어져 있었다. 다들 청년의 조과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소피아는 청년이 절대 20대를 넘지 않았다는 데에 내기를 걸고 싶었다. 목소리는 꽤나 낮고 듣기가 좋다. 그의 눈은 매우 맑았고 벌거벗고 있는 상체는 꽤나 근육질이었다. 미셸이 그녀의 다리를 콕콕 찌르며 말했다.
“저 남자, 괜찮지 않아? 이런 섬에 살고 있는 사람 같지가 않은데?”
“…”
“소피, 소피.”
“응, 네?”
“어머머, 얘 좀 봐. 처음 본 남자한테 반한거야? 이런 낙원의 섬에서 사는 거친 어부에게 마음을 빼앗기다? 뭐 그런 거?”
“그런 거 아니에요.”
소피아는 들러붙는 미셸을 떼어내고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청년에게 가져갔다. 어느새 라이언과 보먼이 그의 이름을 묻고 있었다.
“이쪽은 라이언, 보먼, 미셸, 그리고 소피아.”
“그러시군요. 저는 아크라고 합니다.”
“헌데 여기에 사십니까? 여기는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 작은 섬인 것 같은데. 물도 없을 테고요.”
“물은 빗물을 받아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 숲 뒤에는 제 집도 있고요.”
아크가 뒤의 해변가를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하얀 백사장과 야자나무가 그림같이 펼쳐진 뒤, 오두막이 한 채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보먼은 잠시 생각했다. 뿔고래를 관찰하려면 순다 섬보다는 여기가 확실히 좋다. 다만 이 청년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을까 걱정이다.
“아크씨. 잠시 괜찮겠습니까? 요청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일단 들어나 보지요. 내려오십시오.”
아크는 능숙하게 낚싯배를 보트 가까이로 대었다. 보먼과 라이언이 영차, 하며 건너갔고 미셸과 소피아는 남았다. 이야기가 잘 된 모양인지 보먼이 보트를 향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미셸이 두 손을 치켜들며 환호했다. 이런 작은 보트에서 고래를 기다리는 것보다야 섬에서 있는 편이 훨씬 나으리라.
서로를 의심하지 않는다. 호의로 다가서고 가급적이면 친절히 대한다. 50년 전과 지금은 이런 기초적인 의식면에서 다르다. 사람이 사람을 믿는 세상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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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냉장고가 있어! 화장실도 끝내줘!”
네 명은 작은 오두막에 도착해 주인의 허락을 받고는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좀 작았지만 뒤로 길쭉한 모양새다. 방은 두 개가 주어졌으며 따로 부엌과 화장실도 딸려 있었다.
놀랍게도 청년은 이 좁은 무인도에서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 크게 불편하지 않게 생활할 정도의 집을 만들어냈다. 미셸은 소피아를 데리고 돌아다니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실 미셸은 아크가 촌에 사니까 약간 무시하는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오두막에 들어와서 그가 꾸며놓은 것을 보니까 그런 마음이 싹 사라져 버렸다. 무척이나 정갈하고 깨끗하다.
저녁이 되어 넷은 식사자리에 초대받았다. 아까 생선과 가재등을 구경했지만 육지와 멀리 떨어진 이런 섬에 식재료가 있으면 얼마나 있겠나 싶어 큰 기대는 않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아크는 대단한 요리를 선보였다.
“허…다랑어회를 여기서 보다니.”
보먼은 접시 가득한 붉은 살점을 보고 말문을 잇지 못했다. 대륙에서 회를 먹기 시작한지는 그렇게 오래되진 않았다. 약 50-60년 전부터라고 하는데 일설에는 당시 신황제가 전파했다고 한다. 지금 회는 상당히 고급요리로 인식되고 있었고 다랑어는 그 중 최고봉에 위치한다.
“우와…라이언, 이거 봐. 이거 간장 아냐?”
미셸이 젓가락으로 검은 액체를 살짝 찍어 맛을 보았다. 확실히 달짝지근한 맛이 난다. 라이언은 오두막 입구만 쳐다보고 있었고 소피는 연신 군침을 삼켰다. 아크는 오두막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모닥불 앞에 자리를 잡았다.
“드시지요. 차린 것은 별로 없습니다만.”
“아니, 무슨 말씀을. 참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진수성찬이지요. 잘 먹겠습니다.”
“잘먹겠슴다!”
“잘먹을게요.”
다들 두껍게 썰린 다랑어회 우물거리며 입에 넣었다. 입 안에 들어가자마자 녹아내리는 다랑어의 지방이 아주 멋지다. 즐거운 식사가 이어졌고 다들 회를 배불리 먹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게 되었다. 보먼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크…멋지군. 회로 배를 채운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궁금했는데. 헌데 이녀석들은 어떻게 잡은 겁니까?”
“이 근방에는 눈다랑어 떼가 가끔 오곤 합니다. 잡는 건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워낙 수가 많거든요.”
“아하.”
낚시를 좋아하는 보먼과 아크는 생선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본주제인 뿔고래로 넘어갔다.
“뿔고래요? 확실히 녀석들이 올 시기가 되긴 했죠.”
“뿔고래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라이언이 물었고 아크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매년 보는걸요. 녀석들은 인간에게 아주 호의적이라서 뿔만 주의하면 근처에서 헤엄쳐도 괜찮습니다.”
“와우. 뿔고래떼 주위에서 헤엄친다고요?”
“고래는 지능이 무척 높아서 헤엄치는 인간이 자신들을 해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가끔 상어가 나타날 때도 있는데 뿔고래떼가 지켜주기도 하고요.”
“와…그건 정말 멋진 광경이겠네요.”
소피아가 두 손을 모으며 감격했다. 아크는 뿔고래의 모습과 습성에 대해 대략 설명했다. 다들 뿔고래를 사진으로 보기는 했지만 실제 보는 것은 이번이 첫 기회라서 꽤나 기대하고 있는 눈치다.
갈란테 행성의 바다에는 고래가 상당히 많다. 뿐만 아니라 온갖 생선과 해산물로 가득하다. 이 모든 것은 아크가 황제의 자리에 있으면서 철저히 보호하고 교육시켰기 때문이다.
고래를 잡으면 부산물이 꽤나 많이 나온다. 바르마 제국 시절부터 이런 것들을 알고 있었지만 때마침 등장한 아크가 고래를 비롯한 바다자원을 보호했다. 덕분에 개체수가 상당히 많이 유지되고 있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어족자원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크는 넷과 대화한 끝에 뿔고래떼와의 조우에 동행하기로 했다. 해양생태연구소의 연구원들이라고는 하지만 고래류 경험은 돌고래가 전부인 모양이다. 아크가 동행하기로 하자 네 명의 얼굴이 눈에 띠게 좋아졌다. 현지인만큼 이곳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없으리라.
============================ 작품 후기 ============================
코멘 풀었습니당!
어찌되었건 간에 위험한 구간을 지나가서 기분은 나쁘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평탄한 여정이 기다리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