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2 호레스의 반역 =========================
호레스의 반역 - 4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황궁을 찾아간 성직자가 놀랍게도 태형을 받고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거기에 더해 황제는 유르미스를 파문하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생명과 신앙을 동시에 빼앗는 이런 폭거에 질릴 대로 질린 일부 민중이 들고 일어났다. 아크 황제는 그들을 거칠게 탄압했다.
아예 대륙에서 주신교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버리려는 듯 모든 교단을 파괴하고 신전을 부쉈다. 그에 항의하는 풀뿌리 민초들은 타이탄 부대에 겁을 먹어 나서지는 못했으나 황제를 증오하는 마음을 무럭무럭 키워갔다.
왜 이러는 걸까?
황제는 왜 미친 짓을 하는 걸까?
이렇게 해서 황제에게 어떤 이득이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져 나름대로 결과를 도출한 지식인들이 있다. 그들은 케테르의 영토를 상세히 조사하고 어느 시점부터 마왕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눈치 챘다.
보통 연방에 고용된 미궁 사냥꾼들은 영토 깊숙이까지 들어가지는 않지만 가끔 마왕의 소재를 확인하는 선에서 이제는 구형이 되어버린 센추리온급 타이탄 등을 동원해 안으로 들어갈 때가 있다. 이 사냥꾼들을 맞이한 것은 마왕과 고위마족들이 아니라 아트라간으로 불리는 골렘과도 같은 케테르였다.
녀석의 힘은 막강해 타이탄으로도 상대할 수 없어 사냥꾼들은 물러났고, 그렇게 케테르 영토를 들쑤시며 확인한 결과 마왕이 없는 것 같다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마왕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별궁에 있을 확률이 높겠죠, 아무래도…
황제가 마왕에 잠식되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대체 누가 퍼트린 소문인지는 몰라도 앞뒤 개연성이 너무도 적절하게 들어맞는지라 누구 하나 부정하는 사람이 없었다.
마왕이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고 주신의 화신은 미친 짓을 하고 있다. 심증으로는 100%지만 과연 화신이 마왕 따위에게 잠식을 당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 의문은 에페드람 주지사의 설명에 의해 풀렸다.
―화신이라고 해서 주신과 완전히 연결된 것은 아닐 겁니다. 처음에 그는 확실히 대륙을 통일하고 발전시키는 등 선의로 가득 찬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지상의 케테르를 접하고 그들을 다루는 과정에서 악의에 물들어버린 겁니다. 하나의 마왕으로는 물론 화신을 잠식하는 것이 불가능하겠죠. 하지만 네 마왕이라면 어떻습니까? 그들이 고대에서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악마임을 명심하십시오. 우리의 공격을 버티면서도 역전의 기회를 노렸을지도 모릅니다!
증거는 없지만 애초에 마왕이니 잠식이니 하는 단어 자체가 추상적이어서 사람들은 에페드람 주지사의 말을 믿게 되었다. 놀랍게도 그가 이렇게 말했는데 황궁은 움직이지 않았다.
황제가 미쳤다는 사람들의 의식이 좀 더 공고해졌다. 황궁 주위에서는 연일 시위가 일어났고, 근위대는 이를 탄압했다. 황제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근위대지만 그들 역시 사람이다.
별로 죄를 지은 것 같지도 않은 한 시민을 곤봉으로 제압하고 끌고 갈 때,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한 여성을 거칠게 묶어 수송차에 넣었을 때 당혹감은 절정을 이룬다.
정상이 아닌 황제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었다.
사방이 적이다.
황궁의 시종 시녀들까지 수군거리며 예전처럼 아크를 친근하게 대하지 않았다.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시종인들을 아주 자상하게 대하는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예전의 황제에 비하면 그야말로 천사와 같은 사람이었는데 요즘에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누구와도 말을 나누려 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대부분의 시간을 별궁과 집무실에서 지내기에 그를 목격한 시종인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나마 황제의 직접적인 명령을 받는 연방정부의 행정기관에서도 황제의 이런 처사에 대해 너무하다고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장관들은 아직까지 쉬쉬하고 있었지만 감춘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실무자들이 황제에 대해 불만을 품기 시작했으며, 그가 비공식적으로 내린 여러 황명을 무시하기에 이르렀다. 황제와 연방의 갈등은 최고조로 치닫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탄압에 맞서 싸우라고 교육한 것은 황제 그 자신이었다. 그는 권력이 민초들에게 있으며, 황제 자신은 단지 그것을 대표했을 뿐이라고 말해왔다. 20년간 교육기관 전체에서 그런 내용을 떠들어댄 덕분에 사람들은 시위는 나쁜 것이 아니라 최후의 저항수단이라는 점을 머릿속에서 확실히 인식하게 되었다.
나이가 제법 든 사람들은 그래도 황제인데…하면서 소극적으로 옹호했으나 사안이 워낙 심각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를 못했다. 시위를 진압하면 진압할수록 규모가 커졌다. 마침내 황궁 주위에서 50만 명이 모인 대시위가 일어났다.
이제 근위대가 나서봐야 소용도 없다. 시위대는 황궁 주변을 돌면서 세를 과시하고 황제가 직접 나서기를 바랐다. 민의는 불같이 타오르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극단적인 발언은 하지 않았다.
다만 황제가 자신의 상태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고, 마왕들에게 잠식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모든 것을 제대로 처리하길 바랐을 뿐이었다.
요컨대 황제가 가르친 대로 매우 상식적인 저항운동을 한 셈이었는데, 이들과 만난 것은 아크 황제가 아니라 타이탄 블랙나이트 부대였다. 이 괴물들은 근위대 소속도 아니고 황제의 지시대로만 움직인다. 1대의 아크나이트와 10대의 블랙나이트는 20년 동안 황제의 무력을 상징해왔다.
타이탄들이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나서자 사람들은 경악하며 흩어졌다. 아무리 황제가 미쳤다고는 하나 사람들 상대로 타이탄을 내보낼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세상은 비로소 알게 되었다. 모두가 황제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가 직접 임명한 바 있는 각부의 장관들도 그의 명령에 따르지 않게 되었다. 그에 분노한 황제는 연방정부의 청사를 폐쇄하기에 이르렀다. 상황은 더욱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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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궁으로 들어간 아네스가 붙잡혔다. 아네스가 별궁에서 뭘 발견했고 무엇을 알아냈는지는 시녀들을 통해 알음알음 정해졌다. 상황을 알아보면 아네스가 별궁에서 악마들을 포함한 슬러스를 만났고, 겁이 나서 도망치던 와중에 시녀들에게 알려진 것 같았다.
마침 출타중이었던 황제는 즉각 아네스를 심문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심문이라는 것은 명백했다. 아네스를 구출하기 위해 에페드람 주지사를 포함해 수천 명의 군웅이 밀집했다.
―아네스를 석방하라!
―별궁에 슬러스가 있었던 것부터 해명하라!
―황제는 각성하라!
이런 시위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아네스를 교수형에 처한다고 발표했다. 감히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별궁에 침입한 죄가 크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별궁에 악마들을 비롯한 슬러스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에페드람 주지사는 시녀들에게서 캐낸 첩보가 적힌 종이를 꽉 쥐었다. 슬러스가 아네스를 강간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이 밝혀졌다.
‘황제가 마왕들에게 잠식당했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이제 명문이 섰다. 황제를 끌어내리고 연방을 정상으로 되돌리려는 명분 말이다. 마왕에게 잠식당한 미치광이 황제가 무슨 짓을 벌일지 어찌 알겠는가? 당하고 나면 늦다. 미리 선수를 쳐야 한다. 마침 그의 주변에는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이 많이 있다. 여러 주의 주지사들, 연방의원들, 연방군 중견 지휘관들은 더 이상 아크 황제를 믿지 않는다.
‘더 늦기 전에 일을 처리해야 한다.’
시위대가 모였다고 해서 타이탄을 동원해 강압적으로 해산하는 것이 과연 정상인가? 그때까지 황제를 소극적으로 두둔하던 장관들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제 대륙에서 황제를 지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별궁에 있을 소수의 후궁이 전부일 것이다.
‘황제를 죽인다.’
에페드람은 20년 전을 기억했다. 그 때의 아크는 모든 일에 여유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당시 바르마 제국이 신속하게 병력을 전개하는 바람에 뜻을 펼치지 못하고 헤어졌고 나중에야 그가 바르마 제국을 정복했음을 깨닫고 뒤늦게나마 그와 뜻을 함께 하게 되었다.
그 후로 약 17년 정도는 정말 열심히, 그리고 행복하게 일했다고 할 수 있다. 에페드람은 자신에게 특출난 능력이 없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크가 내민 교육과정을 열심히 공부했다. 연방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마침내 바르마 주 정부의 관료로 일했을 때만 해도 주지사의 자리에 올라갈 줄은 몰랐다.
‘나의 혁명동료이자 은인…하지만 당신은 너무 타락했어.’
타락한 황제에게 연방을 맡길 수는 없다. 심지어 주신의 교단도 철저히 파괴하지 않았는가? 어쩌면 주신에게 파문당하는 과정에서 능력을 잃고 마왕에게 잠식당했는지도 모른다. 속사정이야 일개 인간이 어찌 알겠느냐마는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다 죽는다.
그는 눈을 빛내며 전화를 돌렸다. 호레스가 뒤늦게 전화를 받았다.
“우리와 뜻을 같이 하지 않겠습니까?”
“…날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그를 이 상태로 놔두면 위험합니다. 성녀 아네스를 보십시오. 황제는 그녀를 교수형에 처하려 합니다. 이게 정의입니까?”
“…”
호레스는 잠시 동안 침묵을 지켰다. 에페드람은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황제의 최측근인 근위대장의 마음이야 오죽할까. 그는 이율배반적인 상황에 놓였다. 상관이자 주군을 배신하는 기분은 어떠할 것인가.
“…아네스의 경우에는 교수형이 아니라 태형 정도로 형을 경감하도록 건의해 보겠습니다.”
“그게 되겠습니까? 미치광이 황제는 우리를 모두 죽이려 합니다. 슬러스가 그녀에게 몹쓸 짓을 하면서 털어놓지 않았습니까? 지금 황제의 머릿속에는 혼돈과, 파괴와, 살육 밖에 들어있지 않습니다.”
혼돈의 마왕 에피칼로스, 파괴의 마왕 디아보로스, 살육의 마왕 크세르크스가 아크를 잠식하고 있다는 건 슬러스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녀는 아네스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그런 사실을 발설했다.
운이 좋았다고 할까, 아네스가 열정적으로 임무에 임한 결과일까. 어쨌든 세 마왕이 아크를 지배하고 있다면 앞으로 사태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대량학살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호레스 준장, 결단을.”
“…내게 잠시 시간을 주십시오.”
전화를 끊은 에페드람 주지사는 즉시 주변 동향을 살폈다. 거리상으로 떨어져 있는 주에서는 소극적 지지를 하고 있는 형편이었고 사건의 중심이 되는 10여개 주에서는 적극적인 지지는 물론 주방위군을 동원할 수도 있다는 의향을 내비쳤다.
테라 연방의 군대는 연방군으로서, 그 규모가 50만에 달한다. 인구에 비해서 규모가 크지 않은 이유는 외적이 없기 때문이다. 두 개의 대륙이 하나로 통일되었는데 군대가 많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마저도 요즘에는 국방비 축소 운운하면서 예산을 깎으려는 연방의원들이 많아 연방군 자체가 쪼그라드는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방군은 여전히 주방위군 전체와 비교했을 때도 우위를 가진다.
하지만 에페드람은 연방군을 장애물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들은 황제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총사령관을 비롯한 장군들은 사태를 수수방관하는 황제를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군인이고, 교육받은 대로 황제와 연방에 충성을 다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 성격이 불같은 몇 명의 장군들이 황제를 알현했다가 욕만 처먹고 쫓겨났다는 소문이 즐비했다.
이 모든 것이 혹시 연방을 분열시키려는 마왕들의 의도가 아닐까 주장한 장교단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의견은 흐지부지되었다. 황제 개인을 향한 분노가 너무 엄청나서였다. 그를 당장이라도 죽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황제는 진짜 미쳐버렸는지 이런 불순한 움직임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마침내 아네스가 교수형 집행일이 다가왔다.
집행을 거행하는 것은 특이하게도 호레스 근위대장이 맡았다. 보통 근위대장 쯤 되는 거물은 배제되기 마련이지만 황제의 명령이 있었다고 한다. 교수대 주위로 근위대원들이 포진했고 블랙나이트와 아크나이트까지 동원되었다. 에페드람은 위엄이 넘치는 초대형 타이탄을 보면서 탄식했다.
“한때는 저 거인이 연방을 보호할 힘이라고 여겼건만…”
그랬다. 아크나이트는 특히 연방의 자랑거리나 다름없었다. 비록 자랑할 사람은 없지만 가장 강력하고 거대한 타이탄이 연방을 수호한다는 것에 부정적인 감정을 내비치는 사람은 없었다.
그 아크나이트가 지금은 고작 교수형의 호위역으로 와 있다니 사람들은 적지 않게 실망했다. 실망은 체념으로, 체념은 멸시로 변했다. 군웅은 더 이상 아크를 황제로 보지 않았다.
아네스의 머리에 검은 주머니가 씌워졌다. 그녀는 올가미를 목에 건 채 근위대원들에게 끌려갔다. 사람들이 비난했고 근위대원들의 얼굴이 실룩거렸다.
마침내 황제가 등장했다. 아주 오랜만에 황제를 본 사람들이 크게 놀라서는 웅성거렸다. 아크 황제는 체격이 건장하고 날렵한 편에 속했다. 그런데 지금 우스꽝스러운 보관을 쓰고 온갖 사치품을 주렁주렁 단 사람은 상당히 뚱뚱해 보였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황제 맞아?”
“저렇게 뚱뚱했던가?”
“별궁에 틀어박혀서 주색잡기나 하고 돼지같이 처먹으니 살이 찌지. 쯧쯧…”
“얼굴을 보아 하니 근위대도 몰랐던 모양인데?”
주신의 화신이 가진 신성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호레스는 감았던 눈을 떴다. 저 멀리에서 근위대와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올라오고 있는 사람은 확실히 아크 황제가 맞다. 살이 많이 쪄서 이목구비가 달라졌지만 호레스의 눈은 속일 수 없다.
‘약하구나. 황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