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2 대통합 =========================
대통합 - 8
크로노 트리거 스킬은 한 지역이나 대상의 시간을 감을 수 있다. 감는 것 뿐 아니라 중지시킬 수도 있다. 총구에서 튀어나온 몇 발의 총알이 허공에서 멈췄다. 섀도우 엘프들의 움직임도, 아주 작게 흔들리던 나뭇가지도 굳어버렸다. 아크는 늪지대에서 살아 움직이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예의도 없고…건방진 년들이로군.”
아크는 돌아다니며 총알을 회수했다. 총구를 빼꼼하게 내민 섀도우 엘프들을 한데 모아 마나로프로 묶어 기둥에 늘어트렸다. 크로노 트리거 스킬을 중지하자 대롱대롱 매달린 신세가 된 섀도우 엘프들이 당황했다.
“뭐, 뭐야, 이거? 총 어디 갔어?”
“누가 이렇게…이익!”
섀도우 엘프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총알을 가지고 공기놀이를 하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그의 옆에는 네 정의 장총이 둥둥 떠 있었다.
“히이익.”
한 섀도우 엘프가 몸서리를 쳤다. 대체 어떻게 총알을 맞고도 무사할 수 있었을까? 아니, 총알에 맞긴 한 걸까? 이건 마치 시간을 멈춘 것 같지 않은가.
“분명 내가 예의를 갖추라고 했을 텐데, 시건방진 엘프들.”
“…”
나무에 매달린 섀도우 엘프들은 아크의 고압적인 말투에 마른침을 삼키기만 할 뿐 더 이상 반항하지 못했다. 그들은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하게 나간다. 적을 정면에서 맞서기보다는 뒤통수를 노리며, 그것도 시원치 않으면 욕을 질펀하게 쏟아 부은 후 도망간다.
아인종이라고 해서 별로 친근하게 굴지도 않기 때문에, 동족이 아니면 그다지 환영을 받지 못한다. 사실 그들끼리도 뒤통수를 치기 일쑤다.
다만 이렇게 완패한 상황에서는 상상 이상으로 무력해진다. 물론 완전히 항복하는 건 아니고 기회를 엿보아 일단 도망가서 다시 뒤통수를 치기 위함이다. 아크는 섀도우 엘프들의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다. 400년 전에도 이랬으니까.
“너희들은 나를 죽이려 했다. 나는 관대한 신이 아니라서 그걸 용서할 수는 없다. 다만 크로이츠 여왕에게 얌전히 안내해주면 죽을 시간을 뒤로 미뤄줄 수는 있다. 선택해라. 여기에서 죽을 것인지 아니면 나를 안내할 것인지.”
“우, 우리를 살려주면…”
“그만! 말하지 마! 여왕이 우리를 그냥 둘 것 같아?”
“가만히 있으면 이대로 죽는다고!”
“그, 그냥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자기들끼리 싸우고 난리다. 이들은 척박한 늪지대에서 변변치 않게 살아와서인지 여유란 게 없는 종족이다. 심지어는 식량도 부족하고 농업기술도 모르기 때문에 구황작물 등의 혜택도 입지 못했다. 원시적인 사냥방법을 아직도 쓰고 있는 것은 섀도우 엘프가 유일하다.
전체적으로 보면 딱한 종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크는 동정심이 들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 이런 상황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크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가만, 네 명까지는 필요가 없잖아? 안내해 줄 한 명만 있으면 족하지. 자, 나를 여왕에게 안내해 줄 자는…”
“저, 저요!”
“저요!”
“접니다!”
“제가, 제가!”
아니나 다를까, 아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네 명이 동시에 외쳤다. 말해놓고 쪽팔리는지 입을 다물기는 했지만 역시 죽기는 싫었는지 자기가 여왕에게 안내하겠다고 난리를 부린다. 아크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어찌 이리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단 말인가.
“좋아. 일단은 살려주도록 하지. 일단은.”
묘하게 아크의 말이 신경 쓰이는 넷이다. 그녀들은 여왕의 명령에 의해 늪지대를 살피는 순찰대의 일원이다. 침입자 중 여자는 죽이고 허우대 멀쩡한 남자는 일단 생포하는 것이 그들의 룰이다.
아크의 경우는 신이라고 주장하는 미치광이로 생각했고, 그래서 다리에 총을 쏴서 못 움직이게 한 후 노예로 삼을 예정이었다. 섀도우 엘프는 항상 이렇게 외부인을 대한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역으로 남자에게 잡혀버렸다. 정말로 신인가? 여왕 크로이츠는 자칭 신의 화신이라고 주장하는 검은머리 인간에게 현혹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 헛소리를 들어줄 이유가 없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장총과 총알을 눈뜨고 빼앗긴 것에서 어떤 거대한 힘을 느꼈다.
풀려난 섀도우 엘프들은 아크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엉덩이를 뺐다.
“내 인내심의 바닥을 보고 싶다면 도망가도 상관없다. 죽을 시간이 앞당겨질 뿐이니까.”
아크의 경고에 넷은 체념하고 나뭇가지로 몸을 날렸다. 이 자칭 신이라는 존재를 여왕에게 안내하려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뒤통수를 칠 수 없을까 잔머리를 굴린다. 아크는 한참동안 파린 피부와 육감적인 허벅지를 가진 섀도우 엘프들의 뒤를 쫓았다.
역시 섀도우 엘프라서 그런지 민첩이 장난이 아니다. 마치 바람처럼 나뭇가지를 밟고 탄력 있게 뛰어올라 20m를 이동하는 걸 보면 날다람쥐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확실히, 종의 보존 가치가 있어.’
한낱 미물도 소중히 채집해 차원에 보관해 두었는데 건방진 섀도우 엘프라고 해서 멸종시키기에는 아깝다. 무엇보다 그들의 공격성은 아크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한다.
일단은 남자가 많이 태어나는 섀도우 엘프를 따로 만들어 성비를 맞춰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현재의 섀도우 엘프가 성격이 개차반이 된 이유 중에는 엉망진창이 된 성비가 한 몫을 한다. 아르마는 남/녀의 성비가 대략 1:10 정도라고 했다. 남자 1명이 여자 10명을 상대해야 된다는 의미다.
‘그마저도 오랜 노예생활에 지쳐 상당수가 죽고 말지.’
한 여자는 많은 남자를 받아들일 수 있지만 반대는 어렵다. 그래서 노예가 된 남자는 대체로 비쩍 말랐고 도망칠 힘조차 없다고 한다. 섀도우 엘프들은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면서도 당장의 쾌락에 매몰되어 여전히 남자들을 학대하고 있었다.
앞장서서 안내하던 섀도우 엘프 중 하나가 흘깃 뒤를 돌아본다. 뭔가 흉계를 꾸미는 것 같았지만 아크는 신경 쓰지 않았다. 만약 다음에 귀찮게 군다면 그대로 늪에 묻어버릴 것이니 상관없다. 그의 진심이 전해졌는지 섀도우 엘프들은 딱히 뒤통수를 치지는 않았다. 아크는 그들의 마을에 안내되었다.
“흐음…”
우울한 늪지대의 나무 위에 수백 채의 가옥이 세워져 있었다. 아주 작고 볼품이 없다. 아크는 허공에 마나필드를 만들어 걸었다. 불청객을 발견한 섀도우 엘프들이 튀어나와 웅성거렸다.
“잠깐, 당신은 누구지?”
아크는 고개를 돌렸다. 크로이츠 여왕이 거기에 있었다.
‘크로이츠란 이름을 이어받는 건가.’
나이 55세. 한계수명 150세인 섀도우 엘프 중에선 비교적 젊은 편이다. 회색의 긴 머리카락이 한쪽 눈을 가리고 있었다. 섀도우 엘프 특유의 검은 가죽옷을 몸에 둘렀고 긴 다리에는 롱부츠를 신고 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이 찰랑거렸고 얼굴은 차갑기 그지없다. 그녀는 곧장 허리 뒤에 숨겨져 있던 기병총을 아크에게 겨누었다.
“침입자로군. 우리가 침입자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말했던가?”
“처리한다라…어떻게 처리하지?”
아크가 태연하게 묻자 그녀가 손가락으로 기병총의 해머를 살짝 밀었다.
“여자는 죽이고 남자는 얼굴이 반반하면 노예로 쓰지. 하지만 당신은…조금 애매한 걸. 어떻게 순찰대를 구워삶았는지는 모르지만 곱게 살아나갈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
크로이츠 여왕의 빈정거림에 주위를 둘러싼 섀도우 엘프 여성들이 키득거렸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무방비한 옷차림이었다. 가슴께가 훤히 드러나 있기도 했고 아예 맨다리를 드러낸 여성도 있었다.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점이라면 부끄러움이 없다는 점이다. 아크는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시간낭비도 그만둬야겠군. 나는 시간과 차원의 주신 아크다.”
헤일로가 음울한 늪지대에서 빛을 발하자 다들 깜짝 놀라서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렇게 어두운 공간에서 이렇듯 환하게 빛나는 헤일로라니! 크로이츠 여왕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뒤로 물러섰다.
“하, 당신이 소문의 그 신인가? 생각보다 얼굴은 시원찮은데?”
“내 얼굴은 네가 평가할 바가 못 된다, 크로이츠. 그보다 남자들은 어디 갔지?”
“흐응…남자들이 보고 싶었어? 의외로 과격하시군 그래.”
잠깐 놀라서 물러섰던 섀도우 엘프들이 아크의 말을 이상하게 알아듣곤 깔깔 웃었다. 그녀들의 웃음소리가 늪지대에 울렸다. 이들은 항상 이렇게 살아왔다. 빈정거리고, 뒤통수를 때리고, 탐욕을 감추지 않는다. 아무리 우울한 늪지대에서 살아와서 성격이 비틀렸다지만 이쯤 되면 종족특성이 아닌가 싶다.
“아무리 신이라도…수십 발의 총알을 맞고 멀쩡하진 않을 것 같아. 내기해보지 않을래?”
크로이츠 여왕이 눈짓하자 금속음이 들리며 수십 개의 총구가 아크에게 겨누어졌다.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미리 경고한다.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난 너희들을 도우러 왔지 죽이기 위해서 온 게 아냐.”
“도와? 누가, 누구를 돕는다고?”
타탕! 크로이츠 여왕이 허공에 총을 쏘았다. 그녀는 이를 앙다문 채 아크에게 발작적으로 외쳤다.
“도와달라고 말한 적 없어! 그러니 조용히 꺼지지 그래? 그렇지 않으면 노예로 써버릴 테니까. 인간 남자는 100년 전에 붙잡은 게 마지막이었는데, 어디 한번 붙잡아 볼까? 얼마나 버틸지 궁금한데.”
“말이 안 통하는군.”
대체 어디서부터 배배꼬인 심성을 갖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아크의 성격대로라면 늪지대에 다 파묻어버렸겠지만 아르마가 또 다른 섀도우 엘프의 창조에 나섰으므로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한다. 물론 그에게 혓바닥을 놀린 대가는 치러야 할 것이다.
“나에게 주둥이를 나불댄 대가는 치러야 할 거다.”
아크의 말이 끝나자마자 근방의 모든 섀도우 엘프 여성들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늪지대와 나무가 사라지고 그들이 발을 디딘 곳은 드넓은 숲이었다. 그들은 바닥을 밟아보며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대체 어떻게 여기로 오게 된 걸까?
캬아아악!
가까운 하늘에서 무언가가 괴성을 질렀다. 수백 명의 섀도우 엘프들은 하늘을 뒤엎는 비행형 몬스터 무리를 보았다. 지금은 희귀몬스터가 된 그리핀 수십 마리가 단체로 하늘을 날고 있었다.
“맙소사…그리핀이 저렇게 많아?”
“저거 거의 멸종된 거 아니었어?”
“제기랄! 여긴 대체 어디야!”
웅성대고 시끄럽게 비명을 지르는 등 반응은 다양하다. 나무 위에 있던 아크는 섀도우 엘프들 앞에 내려섰다. 수백의 시선이 한 곳에 모였다.
“여기는 나의 차원이다. 온갖 몬스터를 모아 둔 공간이지. 발리노어 대륙과 같지만 아인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차이점이 있다. 즉, 여기는 수천만 마리의 몬스터와 너희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뭐, 뭐라고?”
말뜻을 알아들은 크로이츠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저 멀리에서 다가오는 그림자를 보았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카테고리 6의 몬스터 드레이크가 등장했다.
“드, 드레이크다!”
“꺄아아악! 도망쳐! 도망쳐!”
“그리핀이 내려다본다! 모두 총을…제기랄!”
총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모양이다. 섀도우 엘프들은 공황상태에 빠져 이리저리 흩어졌다. 아크는 천천히 땅을 걸으며 그들을 구경했다. 몬스터들은 아크를 본체도 않고 곧장 섀도우 엘프쪽으로 날아갔다.
“잘 살아남아봐라. 시건방진 섀도우 엘프들아.”
아크는 곧장 차원에서 빠져나와 가옥을 살폈다. 역시, 몇 명의 남자들이 묶여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발목에 족쇄를 차고 있었다.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아크를 올려다보는 것이 측은하기만 하다. 아크는 그들의 족쇄를 모두 풀어주고 한 곳에 모았다. 모두 합해 30명도 되지 않는다.
“여기에 있었군. 셀린느가 당신을 찾던데.”
날개 한쪽이 꺾이고 비쩍 마른 남성 실버드가 아크의 말을 듣고는 흠칫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전…돌아갈 수 없습니다. 날개가 부러졌어요.”
“돌아갈 수 없는 이유는 날개뿐인가?”
그는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사타구니를 가리는 그의 손짓에서 치욕이 묻어나온다. 보나마나 섀도우 엘프 여성들에게 온갖 치욕스러운 짓을 당했으리라. 남자의 존엄이 짓밟힌 그에게서 더 이상 삶의 의지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대로 놔뒀다간 자살하거나 생을 마감할 뿐이다.
“치유될지어다.”
아크는 그의 날개를 고쳐주었다. 남성들 사이에 경악한 듯한 목소리가 오갔다. 어떤 사람은 아크가 주신임을 깨닫고 무릎을 꿇기도 했다.
“저희를…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주신이시여!”
“이 지옥에서 저희를 구원해주시옵소서!”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더 이상 여기에 있고 싶지 않습니다!”
‘심각하구만.’
하나같이 상태가 엉망이었다. 게다가 언제 잡혀갈지 몰라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얼마나 학대를 당했으면 사람이 이렇게 변할까? 아크는 무한의 차원에 갇힌 섀도우 엘프들에게 이를 갈았다.
‘적당히 놔주려 했는데 안 되겠군.’
============================ 작품 후기 ============================
역시 TS반대를 외치는 분이 많군요.
3,4번도 가끔 보이지만 주류 의견은 아닌 것 같고...1번은 특히나 더 적네요.
말씀드렸듯이 TS는 제 취향이 아닌데다가 선삭의 지름길이기 때문에
그렇게 쓰지는 않겠습니당. 처음부터 TS를 표방했다면 모를까 지금에 와서는...
외전의 경우는 제가 본편 쓰기에도 바빠서...나중에 완결되면 그때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슬슬 소개문이 어긋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이제 주인공이 하렘을 만드려고 하니 소개문이 좀 걸리네요 흐음...
이제 [히로인 많음] [하렘100명]으로 고쳐야 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