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3 신의 이름으로 =========================
신의 이름으로 - 5
‘에페드람 왕자와 히드라 용병대가 칼리노어 대륙 서부 미개척지에서 붙잡혔습니다. 곧 사형을 집행한다고 합니다.’
‘재판은 없고?’
‘반역죄는 재판 없이 사형에 처해지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바르마 제국법이 그렇습니다.’
‘뭔가 엉망진창이군.’
‘구출하겠습니까?’
‘도망치게 해 줘.’
‘알겠습니다.’
아르마와의 대화가 끝나고 아크는 의식의 심해 속으로 잠겨들었다. 깨어난 것도 아니고 잠든 것도 아니다. 육체를 느끼지 않고 생각만 할 수 있는 단계다. 아르마는 이것을 정신체로 진화할 수 있는 단계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만 하다 보면 정신체가 되어버린다는 의미다.
‘바르마 제국…’
이 세력에 대해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지구가 생각난다. 제국주의 시절의, 온갖 병폐를 다 뒤섞은 지저분한 국가 말이다. 다른 왕국들도 규모는 다를지언정 비슷할 것이나 유독 바르마 제국이 눈에 띠는 것은 그 압도적인 인구수와 영토 탓이리라.
바르마는 지나치게 크고 지저분하다.
아르마에게 정보를 받아서 본다. 그들의 신문이나 케테르 군주들에게서는 얻을 수 없었던 온갖 추잡하고 지저분한 행위가 눈에 띤다.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살인, 강간, 방화, 이런 것들이 아니다.
바르마 제국은 차원이 달리하는 악독함을 품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아크의 치를 떨게 한 것은 20년 전에 일어난 대기근이었다.
‘이것들이 기근이 일어난 것을 보고도 못 본체 했단 말이지.’
갈란테 행성에선 어지간하면 기근이 일어날 수 없다. 전염병도 그다지 강하지 않은데다가 기후가 일정하고 곳곳에 주신의 축복이 닿아 온갖 구황작물 등이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바르마 제국만 하더라도 식량생산은 인구 부양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발단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봉건영지에 대한 통제정책으로 시작되었다. 귀족정 중에서도 유력한 귀족인 에드윈 백작은 시대의 흐름을 타고 조금 더 나은 대우를 요구하는 영지민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제국 옵트마를 구성하는 하이로드로 취임하길 원했으나 그 자리는 아무나 올라갈 수 없는 곳이었다. 정치는 물론이고 온갖 기름칠과 황제에 대한 아부에 능한 자만이 각고의 세월을 거쳐야 겨우 올라갈 수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것도 다른 몇 자리는 제국군 사령관, 교황 등 뺄 수 없는 직위의 작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에드윈 백작의 속은 바짝 타들어가고 있었다.
별다른 재주가 없는 에드윈 백작은 자신이 하이로드에 취임하기 위해선 뇌물을 바탕으로 한 기름칠밖에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때부터 비극이 시작되었다. 후진적인 법률을 가진 바르마에는 아직까지 봉건영주 제도가 살아 있었던 것이다.
에드윈 백작령에 가혹할 정도의 수탈이 일어났다. 20만에 가까운 영지민들이 겨우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식량만 배급받았고 나머지는 빼앗겼다. 그러던 중 감자역병이 일어나 한 해 농사가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예나 지금이나 역병이란 건 신벌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에드윈 백작은 자신의 영지에서 일어난 감자역병에 두려워했으나 수탈은 멈추지 않았다. 곧 죽어도 하이로드는 되고 보자는 심보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결국 전 재산을 털어 하이로드가 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니 시체의 산이 쌓여 있었다. 가혹한 수탈과 감자역병으로 인해 영지에서 대기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제국은 당혹스러워했다. 갓 하이로드로 취임한 에드윈 백작령에 이런 사태가 발생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황제의 손가락이 영지를 가리켰다. 삭제하라. 죽음의 명령이 떨어졌다.
에드윈 백작령은 그 날로 사라졌다. 백작과 하이로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황제의 위신을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 남은 10만 명의 영지민들이 학살당했다. 굶주림에 지친 영지민들은 제국군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그 때의 잔혹함은 바르마 제국 역사상 없던 일이었다고 한다.
이런 참혹한 사건은 바르마 제국 한 곳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규모는 다르지만 대륙 곳곳에서 발생했다. 권력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희생되는 것은 언제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사는 민초였다. 차원 깊숙이 가라앉아 가던 아크의 의식이 반발했다.
‘아르마, 이런 정보를 더 가져다 줘. 400년간 있었던 일들을.’
‘마스터의 정신건강에 피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권장하지 않습니다.’
‘가져와.’
‘네, 마스터.’
한차례 반항하던 아르마는 그간 자신이 기록한 온갖 반인륜적인 범죄 등을 아크에게 대령했다. 그는 거기에서 절망감을 맛보았다. 그렇게 노력했건만, 수백 년 동안 기술을 전수하고 문명을 전파했건만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된단 말인가.
‘내 탓인가.’
어떻게 했어야 할까.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이런 사태에 개입했어야 했나?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신념 따위 집어치우고 적극적으로 개입해 이런 참혹한 범죄를 막았어야 했나? 아크는 끝없는 자괴감 속으로 빠져들었다.
‘내가 이런 힘을 가지게 된 이유는.’
운이 좋아서일 것이다. 칸나이족에게 육체를 제공하기 위해 여기로 끌려와 반신이 되었으나 운이 좋아서 역으로 그들을 소멸시키고 신과 같은 위치에 올랐다.
그가 가진 힘은 정말로 막대하다. 두 대륙에 있는 수억 명의 인구가 그의 명령 한 마디에 지워진다. 그리고 월드 엔진은 새로운 문명을 꽃피울 수 있다. 아크는 그런 막대한 힘을 가졌다.
그런 자가 사태를 방관한 결과가 이것이다. 지구와 별 다를 바 없는 참혹한 사태가 도저히 묵과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일어났다.
‘지구와는 좀 다를 줄 알았건만.’
바르마 제국에 조금 신경을 덜 쓴 것이 탈인가. 바바리안들은 이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 트라움 제국과 전쟁이야 했지만 포로를 학살하지도 않았고 민간인들을 잘 보살폈다고 한다.
바바리안 제국이 그 느슨한 행정체계에도 불구하고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아크의 지시를 믿고 따른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고 아르마는 언급했다. 지배했으면 굶기지 마라, 이 문장 하나만으로도 역대 대족장들은 식량 사정에 많은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주신 아크는 이제 400년의 잠에서 깨어났다. 잠은 아니지만 인류와 접촉하지 않았으므로 잠이나 다름없다. 아크는 스스로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했다. 이대로 좋은가? 이대로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앞으로 일어날 수많은 범죄를 지켜봐야하는가?
그리고 행할 수 있는 힘과 자격을 갖췄음에도 신으로서의 위치를 잊어버리고 식욕과 색욕만 탐해야 하는가.
‘…’
아크의 의식이 차원 깊숙이에서 무한의 차원으로 돌아왔다. 그는 서고에 앉아 있었다.
‘이대로 있으면 더 큰 사고가 터질지도 모른다.’
그 전에 막아야 한다. 하지만 바르마 제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는 그의 명령을 잘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본모습을 드러낸다 한들 가짜로 치부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 과정에서 일어날 혼란을 생각하면 신으로서 인류에 접근하는 것은 좋지 않다. 신벌을 내려도 그 때뿐. 새로운 병폐가 떠오를 것이다. 지금의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신이 아니다.
‘황제.’
절대권력을 가진 황제. 어설픈 혈통으로 황제의 자격을 얻은 게 아니라 끝을 가늠할 수 없는 힘으로 황제의 자격을 얻어야 한다. 그는 인류의 황제가 되어야 한다. 아크는 오랫동안 고민하고 또 번뇌했다.
그리고, 아크는 마침내 일어나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신황제.”
지금 대륙에 필요한 것은 신이 아니라 질서를 회복할 신황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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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란테 행성에서 영혼이란 개념은 구체화될 수 있다. 칸나이족의 일곱 영혼이 월드 엔진을 일부 이용한 사례에서 영혼이 다뤄질 수 있는 개념임은 이미 판명된 바 있다. 영혼은 정령계에 존재한다. 그리고 아크는 아르마를 이용해 그들을 다루는 것이 가능하다.
아크는 드라켄들의 죽음에 급하게 나서지 않았다. 죽은 자를 살리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새로운 몸을 만들어 영혼을 집어넣는 것은 가능하다. 그리하여 새로운 드라켄들의 육체가 만들어졌다. 사형당한 그들의 몸과 거의 비슷하지만 원래의 몸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질적이지는 않을 겁니다. 영혼의 시간을 되돌리면 자기가 죽은 건지도 모를 것입니다.’
‘그래, 아무튼 드라켄의 영혼을 모아줘.’
영혼의 통로.
칸나이족의 기술은 기계보다는 육체의 진화와 영혼을 다루는 데에 특화되었다고 한다. 그 영향력은 막대해서 갈란테 행성에 있는 아르마가 지구의 영혼을 수집할 정도니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아무런 좌표도 없는 차원에 간섭하는 만큼 상당한 에테르가 들어간다고 한다. 지금은 같은 차원이니까 큰 에테르가 소모되지는 않겠지만.
‘영혼을 수집했습니다.’
정령계의 연구실에 세 개의 푸른 영혼이 나타났다. 소란 좀 일으키고 아크를 욕했다고 해서 사형당한 드라켄들의 영혼이다. 아크는 전에 만든 새로운 드라켄의 육체를 차원을 열어 가져왔다. 영혼이식 작업이 시작되었다.
튜브에 든 세 육체가 푸른 빛 덩어리를 삼킨다. 문이 닫히고 튜브 안에서 번쩍번쩍하며 뭔가가 요란하게 일어났다. 영혼을 이식하는 작업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고 한다.
칸나이족도 알지 못하는 실패확률이 있다고 하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런 부작용은 일어나지 않아 순조롭게 영혼이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드라켄들의 기억은 사형당하기 이전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아크는 칸나이족의 영혼이 있었던 실험실에 차분히 앉아 작업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작업이 끝났다. 튜브가 열렸고 세 드라켄이 몸을 기울였다. 아르마가 그들에게 전기충격을 가하자 약간의 따끔함을 느끼고 눈을 뜬다. 두 명은 남자, 한 명은 여자다.
“일어났나?”
“당신은…”
“꺅! 내, 내가 왜 옷을 벗고…”
아크는 차원에서 아무렇게나 옷을 집어 그들에게 던졌다. 드라켄들은 의혹의 눈길을 아크에게 던졌다. 이 우중충한 공간은 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저 검은머리 인간은 뭔가? 왜 여기에 있지? 분명 제국군과 싸웠던 것 같았는데.
아크는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누구의 후손이지?”
“뭐? 뭘 말하는 거냐?”
“누구의 후손이냐고 물었다. 카밀라의 후손이 있나? 이그니스? 알루시안?”
“…”
드라켄 셋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아크에게 시선을 돌렸다.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에트라곤의 후예…에밀리라고 합니다.”
“그 블루 드래곤의…알았다. 너는?”
빨간머리의 남자는 아크의 시선을 받고는 화들짝 놀랐다. 그는 아크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아챘다.
“라, 란토스의 후예입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마지막으로, 너는?”
마지막 검은머리의 남자는 아크의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는 말했다.
“카밀라가 제 어머니 되십니다.”
다른 두 드라켄도 서로의 눈치를 보며 무릎을 꿇었다. 뭔가 비범한 존재인 것 같긴 한데 누구인지는 확인이 되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너희는 죽었다.”
“예? 뭐라고요?”
“설마, 죽었다니…살아 있는데?”
“대체 무슨 소립니까?”
다들 황당한 얘기를 들은 듯한 얼굴이었다. 아르마가 허공에 영상을 재생한다. 그들이 죽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영상 말이다. 마지막 교수대에 이르자 다들 얼굴이 새파래졌다.
“마, 말도 안 되는…우리가 죽었다고?”
“그러면 지금 이 육체는…”
“너희는 죽었다. 내가 한 일은 너희들의 육체를 새로 만들어서 영혼을 이식한 것이지. 몸에는 잘 맞는지 모르겠군.”
“그, 그러고 보니…”
에트라곤의 후예 에밀리가 자신의 몸을 쓰다듬었다. 가슴께를 만지고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여성 드라켄의 육체는 카밀라를 기준으로 해서 만들었기에 몸매가 훌륭한 것이 특징이다.
“다시 말하지. 너희는 죽었다. 지금 너희가 가진 육체는 본래의 것이 아니다. 내가 최초에 만든 드라켄의 육체다. 마음에 드나?”
“그렇다면, 당신은…”
“전설속의 그, 그분이십니까?”
“시간과 차원의 주신, 아크다.”
아크가 입을 열자마자 세 드라켄이 넙죽 엎드렸다. 인간과 달리 그들은 아크에 대한 전승을 잘 알고 있었다. 인간에겐 몇 세대 전의 일도 그들은 윗대의 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일곱 가짜 신이 마침내 패퇴하고 모든 힘이 주신에게 모인 것을 그들은 기억한다. 마왕들과 싸우며, 가짜 신의 사도와 치열한 전투를 벌인 기억이 그들에게 전승되었다.
아크는 세 드라켄에게 말했다.
“나는 너희 드래곤 일족에게 새로운 미래를 선물했다. 이제, 너희들이 내게 보답할 때다. 나에게 와라. 나에게 너희의 힘을 바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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