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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을 살아온 남자-132화 (132/217)

00132 혁명의 시대 =========================

혁명의 시대 - 1

쏴아아―

호숫가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새벽녘 물안개가 사라지고 비를 맞은 개구리와 귀뚜라미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기에 여념이 없다. 비는 금방 그쳤고 넓은 호수 가장자리에 자리 잡은 오두막의 문이 삐걱 열렸다.

“뭐가 그리 급하냐?”

아크가 나오기 전에 털이 북슬북슬하게 나 있는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오두막 밖으로 뛰쳐나와선 주인을 보고 컹컹 짖는다. 그는 개의 보챔에 대충 대답하며 어깨에 낚싯대를 메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하루의 식량을 오전에 마련한다. 필요하다면 무한의 차원에서 그간 비축해 놓은 식량을 얼마든지 꺼내 쓸 수 있지만 아크의 하루 시작은 꼭 식량 마련으로 시작한다. 물론 이런 식으로 자연과 벗 삼아 살아갈 때만 적용된다. 복잡한 도시에서는 대충 아침을 때운다.

보트에 올라타자 딩고란 이름을 가진 개가 냉큼 올라탔다. 녀석은 피모리안이라는 종인데 사냥개 출신으로 꽤 날렵한 체구를 가졌다. 덩치는 크고 동물들에겐 사납지만 인간들에겐 한없이 충성스럽다. 아크는 노를 저어 호수 중앙으로 갔다.

한참동안 낚시를 즐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보트의 바구니에 차곡차곡 생선들이 쌓여간다. 딩고는 알아듣지도 못하게 웅얼거리며 앞발로 바구니를 긁어댔다. 한 마리 달라는 거다.

“나도 아직 밥을 안 먹었는데 개 주제에 그러면 쓰겠냐.”

월! 월!

아크가 말하자마자 딩고는 바구니에 코를 박고는 킁킁거렸다. 별로 교육을 시키지 않아서인지 참을성이 별로 없는 녀석이다. 하는 수 없이 작은 생선 하나를 꺼내 녀석에게 던지자 잽싸게 받아 대가리만 남기고 깨끗하게 먹어치웠다. 그러고도 모자라 바구니를 건드리는 걸 보면 어지간히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신서력 407년.

드디어, 아크의 시야에 메세지창이 하나 떴다. 지금까지 이 메세지 하나만을 기다려왔지만 그렇게 기쁘지는 않다. 그의 가장 친한 친구가 죽었다는 소리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초월 시스템 작동 : 모든 인연의 소멸」

「초월 4단계 달성까지 76%(1억 명의 추종자와 영향력 포인트 1억이 필요합니다)」

모든 인연의 소멸과 1억 명의 추종자 조건이 달성되었다. 남은 것은 영향력 포인트인데, 이것은 100-150년 정도만 있으면 충분히 모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아크는 하품을 하며 옆으로 온 딩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녀석이 손을 할짝 핥는 것이 느껴진다.

그가 있는 곳은 발리노어 대륙의 서쪽에 위치한 칼리노어 대륙이다.

수많은 모험가와 군인들이 다녀간 이곳은 대륙이라 부르기엔 좀 작고 섬이라고 부르기엔 큰 땅이었다. 바르마 제국을 필두로 해서 여러 세력들이 토착 몬스터의 공격을 이겨내고 마침내 개척에 성공, 자체적인 문명을 일구었다.

그러나 본거지와 멀리 떨어진 개척지가 제대로 돌아가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개척지에선 크고 작은 사건이 일어났고, 마침내 반란까지 등장했다. 바르마 제국군은 이를 잔혹하게 진압했지만 바다 건너 대륙 깊숙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모두 통제할 수는 없었다.

칼리노어 대륙의 서쪽은 아직까지 미개척지이고, 동쪽 해안은 발전에 힘입어 여러 세력이 들어서 있다. 아크가 있는 이곳은 그 중간쯤에 위치한 곳으로서 사람의 흔적이 거의 없는 대자연을 간직하고 있다.

“읏샤. 많이도 잡았네.”

적당히 생선을 잡고 노를 저어 뭍으로 뛰어내렸다. 옆에 던져 놓은 투망을 끌어올리니 굉장히 많은 양의 조개와 새우, 가재 등이 자기들끼리 엎어져선 난리를 부리고 있었다. 아크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다들 덩치가 대단한데 가장 작은 조개조차 어린아이의 손바닥 정도로 크다.

“오늘 아침에는 새우가 좋겠어. 그렇지?”

컹컹!

딩고는 뭐든지 좋다는 듯 꼬리를 흔들었다. 아크는 오두막 앞에 마련된 화덕에 불을 피웠다. 잡아온 것들을 먹기 좋게끔 손질하고 손을 씻고 나니 어느새 울창한 숲에 햇빛이 바짝 쬐이고 있었다. 아까부터 침을 흘리며 헥헥데던 딩고가 귀를 쫑긋 세웠다.

“누가 왔나 보다.”

딩고가 동의한다는 표시로 크게 짖었다. 그러면서도 아크의 지시가 없으면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가 턱짓을 하자 커다란 사냥개가 쏜살같이 숲속으로 사라졌다. 아크는 호숫가 주변에 온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뿔새? 얘가 왜 이런 곳에 있지?”

이윽고 딩고가 몰고 온 녀석은 커다란 뿔새였다. 아크가 400년 전 발리노어 대륙에 퍼트린 바 있는 뿔새는 말보다 키우기가 쉽고 적당히 거친 곳에서도 잘 자라며 인간에 호의적인 성격을 가진 덕분에 급속도로 퍼졌다. 그리하여 지금은 두 대륙에서 이동용으로 말 대신 뿔새를 주로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시대가 시대인 만큼 발달한 마법공학과 기계공학을 이용한 자동차가 등장하긴 했지만 아직까지 널리 쓰인다고 말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아크는 비록 이렇게 한량처럼 시간을 보내고 있긴 하지만 대륙의 문명 발전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그리고 그의 예측과 달리 아인종들이 디보라의 목걸이나 콜로서스 같은 것들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너 왜 왔냐? 이런 구석진 곳에.”

뿔새는 성큼성큼 걸어와 아크가 내민 손바닥을 살짝 핥았다. 아크는 녀석을 보며 주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장이 있고 주머니가 달려 있는데 말해 무엇할까.

“차원주머니…핏자국이 있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 뿔새를 탔던 사람은 꽤 지위가 있는 모양이다. 차원주머니는 오늘날에도 꽤나 고가의 물품에 해당한다. 예전과 같이 마나석이 풍부하지 않은 시대다 보니 더더욱 구하기 어려워졌다.

기병총을 쓰는 주인이 타고 있었는지 안장에 마나약이 묻어 있다. 이것은 화약을 대신해서 쓰이는 것으로 마나석 파편을 가공해서 만든다.

아크는 뿔새의 목을 쓰다듬어 준 다음 차원을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예전에 그가 썼던 섬세한 작업이 불가능한 미니언은 이제 없다. 거의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오토마톤이 튀어나와 딩고의 뒤를 쫓았다. 핏자국을 찾는 것이다.

“피곤하지? 여기서 쉬어.”

아크는 뿔새의 안장을 내려주고 푹 쉬도록 했다. 녀석은 꽤 피곤했는지 화덕 가까이 다가가 불을 쬐며 몸을 낮추었다. 아크가 손질한 생선을 던져주자 날름 받아먹는다.

“무슨 일일까…”

타닥, 타닥.

불길이 타오른다. 조용하던 이 검은 숲에 차원주머니를 가진 존재가 등장했다. 아마 근처에 있는 바르마 제국의 개척왕국인 골란 출신일 확률이 높았다.

이윽고 오토마톤이 의식을 잃은 한 여인을 품에 안고 돌아왔다. 딩고가 피냄새를 맡고 흥분해 컹컹 짖었다. 그녀는 예상대로 골란 왕국의 기병대 장교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찰싹 달라붙는 것이라 그런지 몸매가 꽤 도드라진다.

옛날과 비교한다면 요즈음 복식이란 것은 착용자의 몸매를 과감하게 드러내는 것이 많았다. 여성만 그런 옷을 입는다면 눈이 호강하는 선에서 그치겠지만 문제는 남자 놈들도 그런 옷을 입는다는 것이다. 아크는 레깅스를 입고 불룩 튀어나온 아랫도리를 자랑하는 남자놈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튼 줄리아는 황금색 머리카락을 뒤로 희한하게 땋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상당히 앳되어 보인다. 아크는 뒷머리를 긁었다.

“줄리아 가덴? 상처가 좀 심하구만.”

나이는 25세이며 특별한 힘을 가지지 않은 요즘 사람이다. 여기에서 요즘 사람이란 말은 과거의 용사 혈통을 잇지 않은 존재를 뜻한다. 용사 혈통은 대를 이어갈수록 그 존재감이 약해졌으나 여전히 드라켄 등의 종족을 제외하고는 상당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다.

“무슨 일이 있나 본데…일단은 상처나 치료해줄까.”

옆구리를 꽤 다친 모양이다. 아크의 힘이라면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것 외에는 다 가능하지만 어디까지나 상식에서 살짝 벗어나는 선에서 치료를 해야 한다. 괜히 의심을 샀다간 귀찮아지니까 말이다. 아크는 오토마톤에게서 줄리아를 넘겨받아 오두막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

.

.

“으음…”

줄리아는 목이 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눈을 떴다. 시야는 흐릿하고 옆구리가 아련하게 아파왔다. 뿔새를 타고 왕국기병대의 추격을 따돌리다가 숲 언저리까지 와서 총성을 들었던 게 생각났다.

‘총…총에 맞았었나…‘

그렇다면 여기는 기병대 본부일까? 배반자인 그녀를 기병대장이 직접 심문하려는 건지도 모른다. 줄리아는 팔다리에 조금씩 힘을 주었다. 묶여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안 묶여 있어?’

그렇다. 줄리아의 팔다리는 묶여있지 않았다. 그녀는 깜짝 놀라 머리를 휘휘 저으며 눈을 완전히 떴다. 나무로 만들어진 천장이 보였다.

“으음, 쿨럭!”

고개를 옆으로 돌려 한바탕 기침을 쏟아내고 나니 가슴이 편안해졌다. 줄리아는 한 남자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진다.

“정신이 들었습니까?”

“누, 누구?”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자 격통이 찾아왔다. 그녀는 이를 악물며 통증을 견뎌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아픔이 기쁘기도 했다. 죽었다면 못 느꼈을 테니까.

“저는 검은 숲에 사는 사냥꾼 아크라고 합니다. 숲에 쓰러져 있는 당신을 데리고 와서 치료했지요.”

“당신이…? 그러고 보니 여긴…”

“제가 사는 오두막입니다.”

아크는 그렇게 말하고선 몸을 뒤로 물렸다. 줄리아는 한참동안 눈을 깜빡이더니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그제야 안심이 드는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당신이 나를 구해준 모양이군요. 실례지만 상처는…”

“옆구리에 꽤 큰 상처가 있더군요. 일단은 치료했습니다만 당분간은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그의 말에 줄리아는 옆구리를 만져보았다. 두툼한 붕대가 느껴진다. 희미한 약초 비슷한 냄새가 나는 걸로 봐서 그가 치료한 모양이다. 고맙다기보다는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런 산골에 사는 사람들은 증명되지 않은 원시적인 방법을 믿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부하들의 말이 떠올랐다.

“치료법은 안심해도 좋습니다. 약효가 입증된 것들만 썼으니까요. 약간의 흉터를 빼면 잘 나을 겁니다.”

“그렇습니까…그…탄두가 몸에 있었을 텐데.”

“이걸 말하는가보군요. 빼낼 때 꽤 애를 먹었습니다.”

아크가 손바닥에 자그마한 납탄을 올려놓았다. 줄리아는 그걸 보고 잠깐 굳었다. 이 남자는 자신의 몸에서 납탄을 빼내는 수술을 한 것이다!

“어, 어떻게? 이런 숲속에서 어떻게 수술을…?”

“그렇게 깊이 들어가 있진 않았습니다. 옆구리 살덩이에 살짝 걸쳐 있었다고나 할까요? 가까이에서 맞진 않은 모양이죠?”

그가 워낙 태연하게 대답한터라 줄리아는 그런가? 하고 의심을 접게 되었다. 확실히 기병총의 위력은 대단하긴 하지만 장거리에서 쏘게 되면 위력이 반감된다.

그리고 어쩌면 허리에 찬 두꺼운 가죽벨트가 납탄의 위력을 줄여줬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합리화를 시작하니 눈앞의 검은 머리의 청년이 한 것도 그리 대단하지는 않다는 착각을 하게 되었다.

그나저나.

줄리아는 목이 엄청나게 말랐다. 물을 좀 부탁하자 그가 미지근한 물을 가져다주었다. 벌컥벌컥 마시고 나니 겨우 정신이 돌아온다. 그녀는 자신의 옷이 벗겨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그렇다고 해서 이 남자가 뭔가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 것 같지는 않았다. 치료 차원에서 바지를 내리고 상의를 걷어 올린 정도랄까. 기병대 장교복은 상처를 치료하는데 방해가 되니 벗겨버렸을 것이다. 그녀는 조심스레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아크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는 목숨을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의 이름은 줄리아 가덴. 골란 왕국의 기병대 장교였습니다.”

“아, 그렇군요…그런데 장교였다는 말은? 지금은 장교가 아니란 말인가요?”

아크가 물었고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습니다, 뿔새를 타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분명히 왕국기병대의 장교였지만…아, 뿔새는 있었습니까? 뿔이 붉은 녀석인데.”

“예. 밖에 있습니다. 물과 식량을 충분히 먹고 지금은 쉬고 있습니다.”

“다행이군요…”

줄리아는 바로 앉아서 옆을 더듬었다. 차원주머니를 뒤적거려 기병총과 여러 물품을 만지고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도망쳤고, 자신은 살아남았다. 미끼 역할을 할 때만 해도 이게 정말 최선인지 의심스러웠으나 어찌되었건 작전은 성공했다. 골란 왕국의 왕자는 성공리에 히드라 용병대로 도망쳤고, 자신은 목숨을 구원받았다.

‘도, 돌아가야 하는데.’

하지만 어디로 간단 말인가. 미끼 역할을 했을 때부터 그녀는 거의 반쯤 목숨을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골란 왕국에서 그녀는 반역자다. 발견 즉시 처형될 것이다.

꼬르륵

초조한 눈빛을 하고 있는 그녀의 배가 밥을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도자기 같은 피부가 붉어졌다. 아크는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식사를 준비했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 아마…’

누군가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크는 곤란한 상태에 빠져 있는 아가씨를 발견하는 재능을 가진 것일지도 모른다. 별로 달가운 재능은 아니다.

============================ 작품 후기 ============================

400년을 점프했군요!

디보라의 목걸이가 양산화되고 콜로서스가 날뛰는 그런 막장시대는

오지 않았지만 총과 자동차가 등장했습니다!

스팀펑크 세계관의 초기 정도라고 할까요? 지구로 따지면 대략 17-19세기

정도인데 거기에 마법공학을 끼얹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당. 비공정도

초기단계에 이르러 있고요.

참 줄리아는 히로인인데 걸판 다즐링의 성인버전입니다. 나머지 한 편은

점심 때쯤에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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