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9 세계석 =========================
세계석 - 9
아무도 없는 지하도시는 고요하다. 드워프들이 만든 도시답게 거대한 동물에 온갖 마법공학 아이템과 탑이 가득하다. 이제 막 유행하고 있는 골렘도 소형화를 시킨지 오래인지 아크의 것과 거의 비슷한 미니언들이 작동을 멈춘 채 방치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지상과 차원을 달리하는 점은 바로 금속을 다루는 기술이다. 드워프들은 인간을 포함한 다른 아인종보다 야금술, 주조술 등이 거의 100년은 앞서 있다. 이 발전에 아크는 전혀 개입한 적이 없으므로 순전히 드워프들의 노력으로 이뤄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저기에 있군.’
아크는 조심스레 걸었다. 대륙 지하에 이토록 거대한 도시가 조성되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나중에 기록할 요량으로 대충 동굴의 크기와 지형만을 눈에 담아둔다. 목적지는 저 언덕 너머에 있는 투명한 알이다. 거기에는 작은 인간 같은 개체가 눈을 감고 있었다.
스스슥―
네 명의 사도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다른 사도는 드래곤들을 막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이다. 아무리 신의 힘을 이어받은 사도라고 해도 드래곤 수십 개체를 피해 없이 막기는 불가능하다.
아크는 입술을 실룩이며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과거 연인들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인형들을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까. 더군다나 그들의 머리 위에 헤일로가 떠올라 있다면.
“이야기를 다 들은 모양이군요. 아크.”
“허나 당신은 중대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대가 세계석에 접근하고 안 하고는 우리에게 크게 상관이 없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을 뿐.”
“잠시 여기에서 우리와 얘기를 나누지 않겠어요? 나는 당신에게 내 창조물들을 선물한 자, 디보라라고 합니다.”
다루사의 외모를 한 사도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40년 전의 그녀와 너무 달라서 본인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아크의 시야에 보이는 괴악한 스탯과 너무 젊은 외모는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이제는 다루사도 제법 나이가 들어 귀여움이 사라진 대신 섹시해졌는데 말이다.
어쨌든 아크가 세계석 지척에 근접하니 더 이상 사태를 좌시할 수 없었던 신들이 직접 나서는 모양이다. 하지만 슬러스가 이야기했다. 신들은 영혼 상태이기에 최대한의 전투력을 발휘해봐야 사도 정도라고. 그 말은 아크가 사도 넷을 처리하면 결론이 난다는 이야기다.
‘당신이 저의 주인이 될 존재군요.’
아크의 머릿속으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아크는 티를 내지 않고 조용히 그 목소리를 들었다. 장난기 많은 소녀 같기도 하고, 하여튼 어린애 비슷하다.
‘당신이 근처에 오자마자 알 수 있었어요. 저는 월드 엔진의 제어프로그램인 아르마. 제가 새로 구성한 루틴에 따라 당신을 새로운 관리자로 승인하고자 합니다. 허락하시겠습니까?’
새로 구성한…아무래도 월드 엔진의 AI인 아르마는 기존 칸나이족이 입력했던 루틴을 버리고 새로운 루틴을 따르고 있는 모양이다. 어쩌면 이렇게 머릿속으로 말을 걸어오는 것도 신들의 예상 밖인지도 모른다.
‘이거 다행이군.’
아크가 아무리 강해도 세계석의 지원을 일부 받고 있을 사도 넷을 한꺼번에 상대하기는 무리다. 그가 재빨리 대답했다.
‘허락한다.’
‘루틴 알파-2항에 의거, 당신을 새로운 관리자로 임명합니다. 다만 직접적으로 접촉했을 때만 완전하게 권한을 이양할 수 있습니다.’
‘지금 줄 수 있는 것은 뭐가 있지?’
이렇게 대화하고 있으니까 사도의 육체에 들어선 신들이 이상하게 여기는 모양이다. 아크는 최대한 고민하는 척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시간을 끌되 너무 끌면 곤란하다.
초월 3단계를 달성한 채 세계석을 장악하게 되면 그가 칸나이족으로 인식되기에 그들이 입력한 루틴을 따르게 된다. 즉 아크의 영혼이 뽑혀져 나간다는 뜻이다.
‘시간이 없다…’
‘당신에게 무한의 에테르를 제공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월드 엔진에서 에테르를 뽑아 쓸 수 있습니다’
‘무한의 마나라.’
그렇다면 아크가 쓸 수 있는 답안은 하나뿐이다. 그의 막대한 마나로도 엄두가 안 나서 쓰지 못했던 무기, 그것을 꺼낼 차례다. 그런데 누가 아크에게 다가왔다.
“아직도 고민하고 있나? 최초 다른 차원에서 당신을 데리고 온 것도 우리고, 힘을 준 것도 우리야. 당신은 우리와 협력해야 할 의무가 있어.”
사도의 목소리는 매우 딱딱하게 들린다. 영혼과 몸뚱이가 엇박자를 내고 있는 것일까? 아크는 차원에서 그간 꺼내지 않았던 무기를 집었다. 540년이 넘는 세월동안 최고의 걸작이라 불린 무기는 단 하나 뿐이다.
월드 브레이커.
구울 드래곤 한 마리의 목을 잘라버린 무기가 라비리스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무기의 특징이라면 차원 자체를 파괴하는 것에 있다. 월드 브레이커라는 이름답게 공간과 차원을 한꺼번에 갈라버리므로 누구든지 도망칠 수 없다. 무기에 적용된 스킬도 아크가 심혈을 기울여 이식한 것들 투성이라 하나하나가 챔피언들을 아작낼 수 있는 위력을 가졌다.
“나는 너희들과 대화할 마음이 없어. 그러니까 나를 설득하고 싶으면 일단 나를 반쯤 족쳐야 될 거야.”
월드 엔진이 무한의 마나를 보내왔다. 아크의 전신이 빛나기 시작했다. 생애 최초로 전력을 다하자 수십 개의 서브스킬이 활성화되었다. 5개가 넘는 배리어와 강력한 물리저항, 마법저항은 공격자로 하여금 전의를 잃게 만든다.
거기에 아크의 등 뒤에 위치한 월드 브레이커가 수십 개로 분열되고 있었다. 마치 환상처럼, 월드 브레이커 수십 개가 사도들에게 겨누어진다.
“아크, 이러면 안 됩니다. 아직 되돌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어요!”
한 사도가 안타깝게 외쳤다. 그들은 놀라고 있었다. 셋이면 아크를 상대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혹시나 해서 세계석의 지원까지 받아 넷을 데려왔다. 그거면 그를 압박해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반신이 된 아크는 그들의 예상을 초월하는 전투력을 갖고 있었다. 영혼 상태로 천 년이 넘는 시간동안 정령계에 처박혀 있느라 현실감각을 상실해 버린 것일까? 아니면 아크에게 기이한 힘이 작용한 것일까?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던 아르테온은 입을 크게 벌리고 외쳤다.
“안 돼!”
콰차차착!
수십 개의 월드 브레이커가 사도들에게 쏘아졌다. 검 하나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차원을 뚫고 찰나의 시간 동안 날아가 사도의 가슴 깊숙이 박혔다. 그 시간은 너무 짧아서 사도라 할지라도 대응할 수 없었다.
“이, 이럴 수가…”
아르테온이 가슴에 검을 꽂은 채 중얼거렸다. 신의 의식으로도 월드 브레이커가 날아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저 아크의 등 뒤에서 도사리고 있던 녀석이 갑자기 가슴으로 자리를 옮긴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여파는 엄청나서 공간과 차원이 온통 깨어지고 있었다.
아르테온의 영혼이 들어 있던 사도는 서서히 무너졌고 지하도시의 방대한 공간이 마치 거울처럼 깨어져나갔다. 네 명의 사도가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다. 아크는 자신을 부른 아르마에게 다가갔다.
‘99%…’
“환영합니다, 새로운 관리자여. 당신의 이름을 말씀해주십시오.”
“아…유지하.”
“유지하…이름을 확인했습니다. 이제 당신에게 월드 엔진의 모든 관리권한을 넘기겠습니다. 언제든지 필요하시다면 아르마라는 호출부호로 저를 불러낼 수 있습니다.”
투명한 알 속의 소녀는 웅크린 채 빛을 발했다. 월드 엔진의 관리자로 인정받은 아크의 시야에 초월 3단계 달성률 100%가 나타났다. 조금만 늦었어도 꼼짝없이 영혼이 날아갈 뻔했다.
‘이제…’
반신 따위가 아닌 진정한 신격이 될 차례다. 아크는 지하도시의 두꺼운 암반을 뚫고 갈란테 행성 상공으로 치솟았다. 예전에 그를 맞이했던 7대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크에게 갈란테 행성은 이제 숫자와 문자의 조합으로 보이고 있었다.
‘…그렇군.’
시간과 차원의 신 아크가 새로 탄생했다. 그는 월드 엔진의 관리권한을 획득함으로써 진정한 신이 되었다. 물론 전지전능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갈란테 행성에서 그를 방해하고 거역할만한 존재는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움직일 수 있다.
잡초의 탄생과 죽음, 나무의 성장, 몬스터의 번식과 전투력, 기후, 재해, 이 모든 것들을 포함한 대륙을 제어할 수 있다. 그러나 4단계 전능신은 아니기에 완전한 전지전능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쯤에서 만족하기로 한다. 아크의 목적은 일단 이뤄졌으니까.
‘이제…내가 신이다.’
그리고 각종 스탯이 전부 ∞으로 변했고 스킬 레벨 제한이 30으로 올랐다. 목적은 이뤄졌고 이제 해야 할 일이 남았다. 아크의 의식이 발리노어 대륙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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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계.
어비스와 같이 갈란테 행성에 존재하는 다른 차원이다. 그러나 정령들은 기본적으로 의식이 거의 없이 자신을 소환하는 자의 의지를 따르기에 어비스 게이트 같은 것을 만들어 밖으로 뛰쳐나오지 않는다. 모든 정령을 통솔하는 정령왕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슬러스와 디파이어스가 어비스에서 뛰쳐나왔을 때, 전자는 황궁을 침범했고 후자는 정령계를 살폈다. 몇몇 엘프를 납치해 정령계로 통하는 차원의 틈을 열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디파이어스가 실패한 것은 그의 탓이 아니다. 7대신들의 영혼이 정령계를 꽉 틀어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7대신들은 정령계에서 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그들은 영혼이지 실체를 가진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정령계가 쉽게 드나들 수 없는 막힌 차원이며 정령들 또한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기에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 그 평화가 깨졌다. 한 명의 인간도, 반신도 아닌 존재가 정령계에 난입해 들어왔다. 거울이 깨어지듯 정령계의 일부가 깨어져 나가고 헤일로를 머리 위에 띄운 신이 들어왔다. 수많은 정령들이 길을 비켰고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가 대지의 정령계구나.”
대지의 정령계는 발리노어 대륙의 지하공간과 매우 닮았다. 그러니까 하늘이 없는 동굴 같은 곳이다. 온갖 정령들이 날뛰고 있다가 아크의 등장에 숨을 죽이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크는 아르마가 보내주는 대지의 정령계 지도를 검색해 정령왕을 찾았다.
대지의 정령왕 아다만토스. 거대한 지룡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가 아크를 태우고 땅 속을 헤엄쳤다. 대지의 정령왕답게 마치 물속에서 헤엄치는 것처럼 땅속을 파고든다. 아크는 밑으로 들어가면서 온갖 희한한 광경을 목격했다.
산만한 수정이 박혀있는 대공동, 마그마가 진득하게 끓어오르는 동굴, 시퍼런 폭포가 쏟아지는 계곡 등이 아크의 눈을 즐겁게 했다. 정령계의 이런 모습들은 평범한 인간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것이지만 아크는 이제 반신도 아니고 신이다. 이제 그에게 불편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행성 자체가 파괴되면 몰라도 말이다.
아다만토스는 아크를 한 동굴에 내려놓고는 땅을 파헤치며 돌아갔다. 그는 거기에서 실험실 비슷한 공간을 발견했다. 일곱 개의 튜브 안에는 푸르스름한 뭔가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여기가 칸나이족 최후의 피신처였던 모양이지?’
일곱 칸나이의 육체는 이미 증발하고 없다. 그러므로 튜브 안에 있는 것은 그들의 영혼일 것이다. 즉 일곱 신이 저 안에 들어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크는 실험대 위의 콘솔에 다가갔다. 화면이 켜지며 신들이 내보내는 온갖 메세지가 드러났다.
―이 모든 것들은 갈란테 행성의 평화를 위한 것일세! 아크! 지금 그대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아는 바지만…
달칵.
아크의 손가락이 스위치를 내렸다. 튜브의 신호가 꺼지며 안에 있던 푸르스름한 구체가 부르르 떨더니 흩어졌다. 방금까지 자기를 변호하던 신이 소멸했다. 이렇게 간단하게 신을 죽일 수 있다니,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
“아니, 신이 아니지. 내 몸을 차지하려 한 외계인일 뿐이야.”
―기다려! 우리를 용서해 다오! 우리는 다만 고향을 찾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 내 육체를 차지해서 말이지.”
달칵.
또 하나의 스위치가 내려간다. 이제 신들은 발광하기 시작했다. 아크는 귀찮아져서 모든 스위치를 내려버렸다. 푸른 구체가 동시에 소멸되었고 튜브가 완전히 꺼졌다. 실험실은 고요해졌고 아크는 비로소 유일신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다소 허무하긴 하지만 앓던 이가 빠진 느낌이라 기분 나쁘진 않다.
신들, 칸나이족의 입장에서 아크란 놈은 기껏 데려와 혜택을 퍼부어 반신으로 만들어 줬더니 뒤통수를 후려치는 악랄한 놈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영혼 상태로 너무 오래 살아온 때문이지 아크의 거부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 몸에 제멋대로 떠들어대는 일곱 영혼이 들어온다는데 좋아할 놈이 어디에 있겠는가. 아크는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기보다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머리통을 후려갈치는 선택지를 골랐고, 아슬아슬하게 성공했다.
‘추종자 수 9천 5백만…’
아인종을 포함해서 대륙 전체의 인구수가 1억이 약간 안 된다. 신들을 끝장낸 아크는 아르마에게 말했다.
‘아르마, 마왕들의 위치를 파악해 줘.‘
이제 마왕들을 처리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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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가 하고픈 얘기가 나오겠군요.
세계석 챕터까지가 사실은 프롤로그였습니다...
다만 분량까지 프롤로그란 얘기는 아닙니다.
한 절반 정도? 약간 못 온 것 같은데...
세계석 챕터가 끝나면 글의 분위기가 조금 바뀔 것 같습니다.
그래봐야 주인공이 이런저런 곳을 여행하며 사건을 겪고
사람들을 만난다는 큰 부분은 변하지 않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