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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을 살아온 남자-109화 (109/217)

00109 생명 창조 =========================

생명 창조 - 1

아크는 락사나를 살려 보냈다. 서큐버스인 그녀가 예뻐서가 아니다. 지금까지 몰랐던 정보를 알려준 데에 대한 감사의 표시도 아니다. 그녀가 적이라는 사실 자체를 잠시 잊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기가 살줄은 몰랐던지 고개를 연신 갸웃하며 미궁 안으로 돌아갔다. 아크는 다시 떠들기 시작한 딩고의 주둥이를 꽉 누르고 5층으로 올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용사팟 일원들은 채집활동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크를 대환영했고 같이 채집활동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미궁 안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으므로 곧장 나가기로 한다.

아크는 데스나이트를 봤냐는 질문에 좀비와 구울만 실컷 봤다고 답했다. 크로우는 다행이라면서 복귀하자고 말했다.

“이번 탐사는 끝났습니다. 집으로 돌아갑시다. 선행 빠르게, 우리가 모두 해치운 덕분에 아직 몬스터의 재배치가 끝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안심은 금물입니다. 후미는 사소한 공간의 변화도 절대 놓쳐서는 안 됩니다.”

미궁은 살아 움직이는 공간이다. 그래서 사냥을 끝낸 곳이라 하더라도 공간 자체가 움직여 몬스터를 토해놓을 수 있다. 즉 멋모르고 계속 밑으로 내려가다간 뒤통수를 맞을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일행이 몬스터와 싸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서큐버스가 한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느라 귀찮아진 아크가 동물지배 스킬을 켠 것이다. 다가오던 몬스터들은 마왕을 능가하는 그의 존재감에 놀라 달아났고 이는 케테르도 마찬가지였다. 크로우 용사팟은 아무 몬스터도 만나지 않고 미궁 밖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히야후!”

“해방이다앗!”

며칠간 미궁에 처박혀서 돌아다닌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몬스터나 음습한 공기도 그렇지만 폐쇄적인 공간에 갇혀 있다는 공포, 햇볕을 쬘 수 없다는 답답함이 더 크다.

어쨌든 일행은 그간의 마음고생을 풀어버릴 수 있었다. 죽은 사람 아무도 없고, 마나석은 두둑하게 벌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을까.

숙소로 복귀 후 짐을 풀고 곧바로 마나석과 채취한 재료 등을 정산한다. 크로우가 바닥에 마나석들을 쫙 깔아놓자 다들 황홀감에 젖었다. 이게 다 돈이다. 아크는 머리에 딩고를 얹고 밖으로 나섰다.

“잠깐만요, 아크씨. 정말 정산 안 받으셔도 되겠습니까?”

“예. 시체꽃을 얻었으니까 그걸로 됐습니다.”

“아니, 그래도 이게 돈이 얼만데…그리고 우리가 아무 피해 없이 미궁을 탐험할 수 있었던 것도 아크씨 덕분이고…”

“그래요, 받으세요. 이번에 많이 나와서 전체적으로 풍족해요.”

다들 권했지만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아크가 받지 않으면 자기의 몫이 늘어난다. 그거나 그걸 밖으로 표현할 수는 없다. 쪽팔리니까.

아크는 손을 저으며 밖으로 나섰다. 그가 나오자마자 숙소 안은 왁자지껄 소란스럽게 변했다. 정산도 참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이다.

“딩고야, 어떻게 생각해?”

“뭘?”

“그 서큐버스.”

“아…몸매가 죽여줬지. 얼굴도 예쁘고.”

딩고는 무성이다. 하지만 아크가 만들었기 때문에 성격은 꽤나 닮았다. 아크는 머리 위에 철푸덕 엎어져선 움직이지 않는 녀석을 내렸다.

“이 두더지가. 마족 따위 몸매 좋아서 뭐해?”

“혼혈도 된다잖아. 그럼 아인종인 거 아냐?”

“…”

아크도 거기에는 할 말이 없었다. 발리노어 대륙에서 아인종과 동물, 몬스터를 구분하는 것은 인간과 혼혈이 되느냐이기 때문이다. 오크는 자기들끼리의 언어를 갖고 있고 나름대로의 사회를 구성하고 있음에도 인간과 혼혈이 되지 않기 때문에 몬스터로 친다.

다만 아크가 본 마족들은 아인종이라고 쳐주기엔 너무 이질적이다. 서큐버스와 불타 종족은 인간과 매우 닮았지만 너그리스나 슬러스 쪽으로 가면 눈뜨고 못 볼 마족이 넘쳐난다.

‘혹시 내게 거짓말을 했다면…’

지성을 가진 존재가 적을 속이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아크는 락사나가 요그로토스의 명을 받고 그를 만났다고 가정해서 사고의 폭을 넓혀 보았다.

‘마왕이 내게 거짓말을 해서 얻는 이익…진실을 말했을 때 얻는 이익…’

7대신도 빠트려서는 곤란하다. 그들이 구원을 말하긴 했지만 아크는 그들을 완전히 믿지는 않고 있었다. 신들은 항상 이야기해왔다. 마왕과 케테르는 적이라고 말이다. 아인종과 양립할 수 없는 적이기에 보이는 즉시 소멸시켜야 한다고 추종자들에게 말해왔다.

아크가 어비스로 쳐들어가 난리를 친 것도 신들의 그런 목소리를 믿었기에 그런 것이다. 하지만 근본부터 흔들리니 뭐가 뭔지 모르게 되었다.

신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마왕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혹은 둘 다인가? 한 쪽은 거짓이고 다른 쪽은 진실인가?

‘지금 판단하기엔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아.’

어쨌건 7대신과 9마왕이 뭔가를 획책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아크의 의식이 현실로 되돌아왔다. 미궁에서 며칠 지내서 그런지 밝은 햇살이 약간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다음날 아침, 숙소와 연결된 아크의 집에 두 명이 찾아왔다. 점심을 먹고 떠나기로 했는지라 작별의 말을 건네러 온 것은 아닐 것이다. 크로우와 에이레네는 아크가 권한 의자에 앉아마자 말했다.

“아크씨, 오늘 저희는 떠납니다. 먼저 이거 받으시고…”

두툼하게 리블 금화가 든 주머니를 건넨다. 아크는 사양하면서도 재차 권하자 받았다.

“이번에 감사했습니다. 아크씨가 아니었더라면 저희팟은 이렇게 쉽게 미궁을 탐험하지 못했을 겁니다. 돈도 많이 벌었고, 사람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크로우씨.”

둘이 얌전을 떨자 에이레네가 입을 열었다.

“아크씨, 그래서 말인데요…저희팟에 들어오시는 게 어떨까요? 크로우가 넉넉하게 대접하겠다고 하는데. 비율은 15% 정도로 해드릴 수 있고요.”

개인이 정산비율 15%를 차지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아크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비율은 그의 고려대상이 아니다.

“안타깝지만 힘들 것 같습니다.”

“17%로 해드리겠습니다. 아크씨. 이 정도 비율은 어디에 가서도 볼 수 없을 겁니다.”

“아뇨. 비율이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해야 할 일이 있어서고요. 만나야 할 사람도 있습니다. 마나석은 그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죠.”

“아…그렇군요…”

에이레네의 말이 묘하게 늘어진다. 그녀는 이런 좋은 조건을 거부하는 아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천지 개인이 단독으로 17%를 먹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혹시 무슨 일인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요즘 세상에 미궁 탐험보다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하면 정말 대단할 일일 텐데요.”

크로우가 물었고 아크는 잔잔히 웃었다.

“이런저런 소일거리죠. 세상에 내세울 정도는 아니지만 저에게는 소중한 일입니다.”

“아, 예…”

조용하지만 단호한 말투에 크로우는 본능적으로 아크가 고집을 꺾지 않으리란 걸 깨달았다. 그게 대체 뭔데? 하고 속으로 투덜거리긴 해도 예의상 밖으로 꺼내질 못한다. 에이레레는 다른 방식으로 아크를 유혹했다.

“저희팟이 별로 마음에 안 들더라도 일단 들어와서 활동하다 보면 아크씨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원래 그렇게 스스로의 가치를 높여가는 거거든요. 그 미니언만 해도 마법공학을 잘 아는 사람을 만나면 천금을 투자할 거예요. 아크씨.”

“아뇨, 괜찮습니다.”

“젊은 나이에 좀 아쉽잖아요. 이런 촌구석에 틀어박혀 있는 게…누구를 만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 나가서 많은 사람을 만나볼 수 있는데…”

에이레네의 말투가 약간 변했다. 크로우는 더 이상 여기 있다간 아크의 화를 돋을 수 있다는 걸 안다. 에이레네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그만할 것을 종용했다.

“그만해, 그만. 싫다는데 왜 자꾸…미안합니다, 아크씨.”

크로우가 에이레네를 반강제로 끌고 밖을 나갔다. 에이레네는 아크처럼 실력 있는 인재가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들으라는 듯 소리를 질러댔다. 머리 위에 얹혀서 보통의 두더지를 연기하던 딩고가 뒷발을 탕탕 굴렸다.

“어처구니없는 여자네.”

“젊은 나이에 용사팟에 들어가서 여러 곳을 여행하다 보면 그게 진리란 생각이 들기 마련이지. 돈도 많이 벌고, 사람들도 떠받들고 말이야.”

“말해주지 그랬어? 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태어났을 때 나는 이미 대륙을 한 바퀴 돌았다고.”

“…그거 계산하고 한 소리냐?”

아크의 말에 딩고는 쪼르르 어깨로 내려왔다.

“당연히 아니지. 자, 쟤네들 가면 숙소 정리해야지. 아크.”

“내가 청소하나? 미니언들이 하지.”

아크는 강하게 끓인 차를 호로록 마셨다. 딩고가 한번 마셨다가 나를 죽일 셈이냐고 항의한 흑차다. 시큼하고 쌉쌀한 맛이 입안에 맴돈다.

“누구나 자기만의 세계가 있기 마련이야.”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편의대로 남을 평가하려 든다. 그건 인간의 본능이나 다름없다. 젊었을 때 성공한 사람들은 세상에 만 명이 있다면 만 가지 삶이 있다는 걸 좀처럼 인정하지 못한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아크가 만난 성공의 길을 걷던 사람들은 대체로 그런 성향을 보였다.

삑삑삑―

갑자기 벽에서 알람이 울렸다. 아크는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들이 왔다. 그랜드 투어의 반환점을 찾아.

.

.

.

“그럼 갑니다!”

“잘 쉬다 갑니다!”

크로우 용사팟이 떠난다. 아크는 언덕 위에 서서 그들을 배웅했다. 에이레네는 아쉬운지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아크는 그녀에게서 은근히 유혹도 받았다. 마법공학을 가르쳐 줄 수 없느냐고 말이다. 대가는 보다 특별한 그것이다.

‘출세지향적인 사람이군.’

이런 곳에서 용사팟을 맞이하다 보면 온갖 인간군상을 만나기 마련이다. 아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 여덟 마리가 창공을 날고 있었다.

“저거 새야?”

“새 치고는 좀 큰데?”

밑으로 내려가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러나 새가 아니었다. 새 치고는 너무 큰 실버드들이 일제히 방향을 틀어 계곡을 지났다. 사람들이 이제 걸음을 멈추고 실버드들을 향해 팔을 뻗으며 감탄했다.

“세상에, 실버드야!”

“와…나 실버드 처음 보는데. 진짜 날개가 있구나.”

“대체 어떻게 나는 거지?”

“정령의 도움을 받는 거예요! 정말 멋지게도 나네.”

실버드 8명이 하강하기 시작했다. 다루사와 텔루리안이 선두에 서서 갓 성인이 된 실버드 여섯 명을 인도하고 있었다. 그랜드 투어. 실버드가 성인이 된 후 치르는 행사인데 아크는 매년 브레톤 남쪽 지방에서 그들을 맞았다. 남성 실버드는 방향이 다르고 여기로 오는 것은 전부 여성이다.

“아크으!”

새가 지저귀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멍하니 실버드가 아크에게 돌진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저러다 다치는거 아냐? 하고 웅성거렸지만 다루사는 충돌직전 날개를 쫙 펼쳐서 바람저항을 강하게 받았다. 속도가 급격하게 줄고 아크의 품으로 뛰어든다.

“흐억!”

다루사와 아크는 서로 감싸 안고 풀 위를 뒹굴었다. 회전이 멈추고 다루사가 아크의 몸을 깔고 올라탔다. 그녀의 눈이 반달처럼 휘어져 있었다.

“아크! 오랜만이에요!”

“…다루사. 이번에는 안 온다고 들었는데.”

“제가 어떻게 안 오겠어요! 아크가 여기에 있는데.”

“하여튼 잘 왔어. 아이고 무거워라.”

“여자한테 무겁다고 하는 게 요 입인가요?”

하얀 손가락이 아크의 입술을 꽉 붙들었다. 그녀는 웃음을 터트리며 아크의 가슴에 얼굴을 대었다. 뒤늦게 도착한 실버드 7명이 아크의 집 앞에 내려앉았다. 텔루리안의 표정은 그저 그랬지만 이런 모습을 처음 보는 어린 실버드들은 꽤 놀란 모양이다.

“저거 봐…다루사님이 웬 인간 남자한테…”

“가만, 그 사람 아냐? 디보라님의 계시에 나오는 그…”

“어쩜 좋아. 그럼 저 사람하고 해야 하는 거야?”

“얼굴은 내 타입이 아닌데.”

한편 언덕 밑에서 실버드가 아크의 집을 방문하는 것을 본 용사팟 일원들은 다들 흥분해 있었다. 다른 종족도 아니고 실버드라니, 섀도우 엘프나 스노우 엘프처럼 구경하기 힘든 종족이다. 그런 희귀종족을 한 명도 아니고 여덟 명이나 만나다니 아크를 부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에이레네의 얼굴은 잔뜩 붉어져 있었다. 여러 사람을 만나봐야 한다는 자신의 말을 얼마나 가당찮게 여겼을까. 그는 전혀 반론하지 않았다. 실버드가 그녀를 약 올리려 온 것도 아닐 테고, 우연의 일치이리라. 옆에서 실버드를 지켜보던 크로우가 한마디 했다.

“많은 경험을 한 사람이군.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저 나이에 마법공학과 연금술, 실버드와의 인맥이라…대체 어떤 경험을 한 걸까?”

“모르지. 27살이라는 스탯창이 안 믿겨지는데. 아크라.”

둘은 그렇게 얘기하며 사람들을 재촉했다. 아크는 다루사와 텔루리안에게 여러 실버드들을 소개받았다. 둘도 물론 아름답지만 역시 이 여섯 명은 어린 티가 난다. 아크는 일일히 눈을 맞춰주며 인사했다.

“세루아, 라트니, 아리아, 마르그리트, 레오나, 지센…잘 오셨습니다. 여기는 그랜드 투어의 반환점이자 제 집이기도 합니다. 먼 길 오셨으니 며칠간 푹 쉬다 가시면 됩니다.”

“그럼 이제부터 아크님과 섹스하는 건가요?”

엷은 주황색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기른 여성 실버드가 그렇게 물었다. 아크는 침묵했고 다루사, 텔루리안은 당황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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