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4 마왕과 용사의 시대 =========================
마왕과 용사의 시대 - 2
―나의 연인이자 루아크와 마리앤의 어머니, 마를레네 애쉬포드의 영혼이 여기에 잠들다.
“어? 여기에 뭔 비석이지?”
“애쉬포드? 어디서 많이 들어본 성 같은데.”
“옛날 트라움 제국의 황가가 애쉬포드 아니었나?”
“설마…다른 가문이겠죠. 그런 대단한 인물이 이런 촌구석에서 죽었을 리가 없잖아요?”
“아니, 영혼이 잠든 거니까…에라 모르겠다. 뭔 비석 하나가지고.”
수십 명의 무리가 알로이 지방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웃고 떠들며 각자의 무용담을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다. 선두에 선 자들은 대개 강건한 체격을 지녔다. 그 뒤로 긴 활을 멘 궁수와 특유의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이 눈에 띤다. 가장 뒤에는 상인과 짐꾼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대륙에선 이들을 용사팟으로 불러왔다. 미궁을 탐험하고 케테르와 마족을 잡기 위해 최적화된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규모는 너무 크지도 않고 또 작지도 않다. 30명 중에서 실제로 미궁을 탐험하는 것은 약 20명 정도다. 나머지는 짐꾼과 마나석을 환전해주는 상인이다.
용사팟은 오솔길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갔다. 이 부근은 배신의 마왕 요그로토스의 미궁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가끔 미궁에서 탈출한 케테르가 있기에 근처에는 사람의 흔적이 없어야 하지만 특이하게도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한 청년이 여관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아크라고 했다. 처음 그를 만난 용사들은 아크라는 이름에 웃고 말았다. 주신 아크와 이름이 동일했기 때문이다. 20년 전, 트라움 제국에서 주신의 이름이 비로소 아크라고 판명된 후 자식의 이름을 동일하게 짓는 사람이 많아졌다. 용사들은 생각했다. 알로이 지방의 아크는 조금 나이가 들어보이긴 하지만 사실은 젊을 것이라고.
그러나 아크가 어떻게 해서 미궁 주변에서 양을 기르며 여관을 경영할 수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자자, 조금만 올라갑시다! 저기 입구가 보입니다!”
메에에―
목장 여기저기에 양들이 돌아다니며 풀을 뜯고 있었다. 용사팟의 일원인 한 여성 마법사는 종종거리며 걷는 새끼 양을 보곤 귀여워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녀는 가까이 가려다가 용사 크로우에 의해 제지를 받았다.
“양한테 손 안대는 게 좋을 거야.”
“왜? 그냥 귀여우니까 좀 만지는 것도 안 돼?”
“나야 상관없지. 하지만 저 골렘들 보라고. 양들을 지키는 모양인데 에이레네 당신이라고 해도 봐주진 않을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목장에는 초소형 골렘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20년 전과 달리 이제 더 이상 마법사와 마법공학자가 협업해서 골렘들을 만들어내는 시대는 지났다고 하지만 저렇게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골렘을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근처에 사람도 없는데 잘 돌아다니네?”
“그러게요. 대체 마기 로직을 어떻게 짰기에 저런 움직임이 가능한지 좀 물어봐야겠어요.”
마법사들이 그렇게 수군거리자 크로우는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이 목장의 주인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강조했음에도 특이하면 얼마나 특이하냐고 말하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아직 멀었지.’
크로우는 안다. 아크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말이다. 그는 여러 용사팟을 이끌었고 대륙의 미궁을 10개나 돌파한 경험이 있다. 비록 깊이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용사들 사이에선 제법 알려져 있는 실력자였다. 그런 그를 경악하게 한 것이 목장의 주인이다.
일행이 언덕을 올라서자 커다란 3층 건물이 드러났다. 뒤로 쭉 뻗어 있는 것이 건물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짐꾼들이 건물 벽에 짐을 내려놓았다. 용사팟의 일원들은 문이 닫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나눴다.
“아직 주인장이 안 온 모양이네.”
“어디 갔습니까? 근처에는 안 보였잖아요.”
“아침에는 바다에 나간다고 그러던데요.”
“그나저나 여기 경치 죽이네…”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자 다들 언덕 밑을 내려다보았다. 황금빛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땋아 내린 여성 마법사 에이레네는 정신없이 멋진 경치를 구경했다. 저 멀리 반짝이는 빛은 분명 에메랄드색 바다에 반사된 햇빛일 것이다.
계곡에선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릴 것 같다. 이런 좋은 곳에 마왕의 미궁이 있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어, 왔다, 왔어!”
아크는 집 근처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머리에 얹혀 있던 두더지 딩고는 재빨리 아크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보통 두더지는 괜찮지만 말을 할 줄 아는 두더지는 들키면 좀 곤란하다. 아크는 환하게 웃으며 내려오는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남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셨군요, 크로우씨.”
“와하하! 이거,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에 신세를 져서 오늘은 꼭 갚으려고요!”
“많이 다치지만 않았으면 하는데 말입니다.”
“이번에는 저희 팟이 좀 많아서요. 30명이나 됩니다!”
잿빛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크로우는 자신의 팟원들을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다들 이쪽을 보고 뻘줌하게 인사한다. 아크는 크로우와 함께 걸으며 물었다.
“며칠 쯤 걸릴 것 같습니까?”
“이번에는 작정을 하고 왔습니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일주일 정도는 걸릴 것 같은데요. 아크가 물건을 좀 채워놨으면 더 길어질 수도 있고요. 그 포션님들은 안녕하십니까?”
“다행스럽게도 상인들의 도움을 받아 포션을 채워놓을 수 있었습니다.”
아크의 말에 크로우의 입에 큰 웃음이 걸렸다. 그가 포션님이라고까지 표현한 것은 물리내성을 일시적으로 높여주는 아주 희귀한 아이템이다.
용사들이 등장한 후로 대륙은 여러 스탯에 대해 알게 되었다. 보통 작물과 달리 희귀한 채집품에 여러 특이한 효과가 있는 것도 드러났다. 아크가 판매하는 것은 그 중에서도 발견하기가 어려운 여러 채집품을 연금술로 만든 것이다. 제법 경험이 많은 크로우도 물리내성 포션을 여기에서 처음 봤다.
포션의 레시피가 아예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크로우의 눈에는 포션의 성능이 정확히 보이고 있었다.
「물리내성 포션(중) : 1시간 동안 물리내성을 35% 끌어올릴 수 있다. 중복되지 않는다」
‘연금술 10스킬에 만들 수 있는 거란 말이지…’
크로우의 눈에는 감탄이 어렸다. 그는 아크의 스탯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이는 27세. 체력이나 힘 같은 기본 스탯은 평범하지만 조리나 연금술, 건축 같은 생산계 스킬이 상당히 많고 수준도 높다.
그 중에서 백미는 마법공학과 연금술인데 무려 10레벨이다. 어지간한 용사도 이 수준에 다다르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굉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아크의 목장에 들르는 사람들은 절대 그를 업신여기지 않는다. 미궁 바로 앞에서 여러 물품을 구하고 편안한 잠자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데 왜 미친 짓을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미친놈은 어딜 가나 있는 법이어서 가끔 그의 재산을 노리고 덤비는 얼간이가 있긴 하다. 아크는 그런 놈을 바로 땅에 묻어버린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에 일행도 어딜 갔는지 모르고 그저 허탈해할 뿐이다.
“그럼 문을 열겠습니다. 이쪽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이용료는 먼저 정산하도록 하지요.”
아크가 숙소의 문을 열었다. 상인이 아크에게 다가와 숙박료와 이용료 등의 이야기를 주절거렸다. 아크는 대충 그를 상대하며 용사팟을 살폈다. 확실히 예전에 비해 규모가 크다.
‘물리내성 포션을 언급한 걸로 봐서 4층까지 내려가려나 보군.’
미궁은 땅에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차원이지만 어쨌거나 느끼기에 지하로 내려가는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밑으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환경은 험악해지고 위험도도 증가한다.
그 중에서 용사팟이 통곡의 벽으로 느끼는 층이 있었으니 3-4층이다. 요그로토스의 미궁 4층에는 물리공격력이 절륜한 만티코어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5층을 통과한 용사팟이 거의 없었지, 아마…’
용사팟은 쉽게 모이고 해체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경험이 많고 전투력이 높은 용사가 이끄는 파티를 선호하게 마련이다. 오늘 아크의 목장을 방문한 크로우는 중견급 용사로서 꽤나 신뢰를 받고 있다. 이 정도 팟을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단과 긴밀한 관계라는 말이니까.
저녁이 되었다.
숙소와 아크의 집은 두꺼운 벽으로 구분이 되어 있다. 하지만 30명이나 되는 인원이라 아무래도 시끄럽기 마련이다. 라이트 구체가 여기저기 켜졌고 긴장을 풀기 위해 마련된 약간의 술이 몇 몇 사람을 취하게 한 것 같았다.
아크는 마법책에 뭔가를 써넣고 있다가 앞에 눈길을 주었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크로웁니다, 크로우요.”
“이 늦은 저녁에 어쩐 일로…들어오시죠.”
아크의 머리 위에서 졸고 있던 딩고는 후다닥 테이블 위의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제법 상기된 표정의 크로우와 한 여성이 들어왔다. 크로우가 그녀를 소개했다.
“얼굴은 좀 보셨죠? 에이레네입니다. 우리팟의 마법사양이지요.”
“반가워요, 아크.”
“어서 오십시오.”
아크는 둘에게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용사팟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은 첫 번째가 바로 용사다. 그 중에서도 방패를 장비해 높은 방어력을 자랑하는 전사가 핵심인원이라고 할 수 있다. 케테르의 공격을 최전선에서 막아낼 수 없으면 이야기가 안 된다.
용사 스킬을 가지지 않은 기사는 아무리 전투력이 높아도 한계가 있다. 물물리내성과 마법내성이 낮기에 케테르의 공격을 버텨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전에 최정예로 인정받았던 기사들은 이제는 2선으로 밀려난 상태였다.
두 번째가 아크의 눈앞에 보이는 에이레네와 같은 마법사다. 용사가 케테르의 돌진을 틀어막는 틈을 타 강력한 파괴력의 마법을 우겨넣어 체력을 깎아내는 핵심딜러다. 아크는 크로우가 왜 에이레네를 데리고 이 늦은 밤에 찾아왔는지 궁금했다.
“저, 아크씨. 진짜 고민했습니다만, 방법이 나오지 않아서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어떤 겁니까?”
“저희팟 규모가 좀 크지요? 원래는 아스텔라의 사제님을 모시기로 했었습니다만…도중에 차질이 생겨서…”
크로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니까 힐링 스킬을 쓸 수 있는 아스텔라의 사제 팟원으로 데리고 오려고 했는데 잘 안된 모양이다.
마왕들이 등장한 뒤, 7대 신들은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대신 여러 기적을 선물했다. 아스텔라의 사제의 경우에는 상처를 치료하는 힐링 스킬을 쓸 수 있게 되었다.
힐링 스킬은 힐링 포션과 효과가 동일하다. 다만 힐링 포션이 매우 비싸고 양이 적은데 비해 사제의 마나는 비교적 풍부하기 때문에 전투력 유지 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크로우도 이번에 작정하고 왔기에 아스텔라의 사제를 반드시 영입하려고 했던 것인데 중간에 누가 채어가 버렸다.
“하지만 저는 아스텔라의 사제가 아닙니다. 힐링 스킬도 못 쓰고요.”
당연히 거짓말이지만 크로우는 아크의 말을 믿었다. 그의 눈에는 아크가 만들어낸 가짜 스탯창이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용사들은 아크의 스탯창을 볼 수 없다. 의심을 받기 싫어 만들어 낸 것이 바로 가짜 스탯창이다. 미르위키에는 라만툴의 새로운 지식이 업데이트되어 있었고, 아크는 지금까지 몰랐던 여러 수단에 대해서 알아냈다.
“압니다. 그런데 말이죠. 아무래도 방패가 많아지면 저희 팟원들이 상처 입을 일도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입니다.”
“아까 오전에 여기 올라오면서 골렘들을 많이 봤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면 저희와 함께 하셔서 골렘들을 좀 동원할 수 있는가 해서 말이죠.”
목장에서 일하는 미니언들을 말하는 모양이다. 아크가 만든 미니언들은 이제 그렇게 특이한 존재는 아니었다. 마법공학 대학이 비록 폐쇄되었지만 20년 가까운 발전은 장난이 아니어서 어느새 소형 골렘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비록 아크의 미니언처럼 스킬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여러 작업도 불가능한 깡통이지만 그래도 방패로는 꽤 쓸모가 있다. 크로우는 골렘을 방패로 쓸 생각을 한 것이다.
“글쎄요, 전 아무래도 전투원이 아니라서 미궁에 들어가기엔 좀…”
아크가 사양하자 크로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대번에 거절하지 않았으니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걱정 마십시오! 저희가 완벽하게 보호해드리겠습니다! 골렘만 소환해주시면 그냥 뒤에서 춤을 추셔도 됩니다! 이 크로우가 보증합니다!”
“하하…”
아크는 작게 웃었다. 이 크로우란 용사는 아무래도 자신을 꼭 데려가고 싶은 모양이다. 하기야 팟원들의 희생을 줄이려는 의도이니 나쁘게 볼 순 없다. 미궁은 제법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저층에서부터 사망자가 날 수도 있는 위험한 공간이다.
“몇 층까지 내려갈 요량이십니까?”
아크가 묻자 크로우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일단 만티코어가 있는 4층은 꼭 돌파하고 싶습니다. 5층은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여러 희귀한 재료가 있다고 하니 가능하면 내려가고 싶고요.”
“6층까지 내려간다면 제가 동행하죠.”
“6층이요?”
아크의 제안에 크로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5층은 그렇다 치더라도 6층에 엄청난 괴물이 있는 걸 알기 때문이다. 에이레네는 크로우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왜 그렇게 놀래?”
“어? 아, 아니…6층은 좀 그래서 말이지… ”
“6층에 뭐가 있는데?”
에이레네는 여기에 처음 오는 모양이다. 아크는 그녀에게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데스나이트가 있습니다. 미궁에서 죽은 희생자들로 만들어낸 마왕의 기사라고 할까요. 카테고리 5의 몬스터를 간단히 죽여 버리는 굉장히 무서운 놈들입니다.”
아크가 6층에 내려가는 이유는 딱 하나다. 시체꽃. 그게 6층에 있다.
============================ 작품 후기 ============================
휙휙 넘긴 부분이 좀 있죠?
화이트 드래곤이라던가...섀도우 엘프라던가...
차차 나올 겁니당!
이제 언데드나 리치 이런 것도 슬슬 나올 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