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1 고대의 악 =========================
고대의 악 - 11
마를레네는 얼마 남지 않은 기사들을 데리고 황급히 피레네 산맥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미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그녀였지만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다. 아크의 자식들 간의 싸움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황급히 말을 달려 산기슭에 도달해 산맥에 오른다. 그녀와 뒤를 따르던 기사들은 피레네 산맥 상공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화아악!
빛이 그들을 감싼다. 시간의 흐름이 정지되었다. 마를레네와 기사들은 마치 박제된 듯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누군가 하얀 존재가 승천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머리 위에 찬란한 헤일로가 사방으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크.
초월자이자 주신 후보자인 그가 마침내 초월 2단계에 도달했다. 그의 신격은 시간과 차원의 주신. 700여년 전 주신에 오르는 것에 실패하고 무너진 전대 주신의 남아 있던 육체와 영혼이 모조리 아크에게 흡수되었다.
‘시간과 차원, 그게 주신의 신격이구나.’
시간이 정지했다.
초월자가 반신으로 각성하는 순간 발리노어 대륙의 모든 시간이 멈추었다. 맑게 흐르던 계곡물은 더 이상 졸졸거리는 소리를 내지 못했다. 양을 치던 목동들은 소리를 지르던 그 상태에서 멈췄다. 모든 사물이 멈춘 반면 아크는 승천한 상태에서 움직일 수 있었다. 초월 1단계 때보다 더 높이 올라왔다.
‘반갑다. 내 후예여.’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크는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갈란테 행성 전부가 보인다.
‘누굽니까.’
‘짐작하고 있지 않았나. 나는 지상과 어비스를 구분하는 밑거름으로써 쓰이고 있는 자…라만툴이다.’
‘라만툴? 당신이 전대 주신입니까?’
‘정확히는 주신으로 승격 실패한 패배자라고 봐야겠군. 나는 3단계에서 4단계로 오르던 도중 실패하고 미끄러졌다.’
‘왜? 이유를 들을 수 있습니까?’
‘인간의 감정을 버리지 못해서였지. 미안하다. 그대에게 사적인 이야기를 못하는 것도 내가 실패한 원인이다. 나는 실패했지만 그대는 주신의 자리에 오를 수 있기를 바라네.’
라만툴의 아주 작은 영혼과 육체가 모여 우주에서 밝은 빛을 뿜어내었다. 아크는 그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저는 인간의 감정을 거의 버렸습니다.’
‘완전히는 아니지. 그래서 여기로 온 것 아닌가?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해. 자식을 죽이기 위해.’
‘…’
아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상공에서 얼핏 본 바, 마리앤은 이미 용사들을 이끌고 바바리안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미 말로 어찌 해결할 상황은 지났다. 누구든 피를 봐야 끝날 것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아직은 초월 2단계에 오른 상태니까 괜찮네. 다만 4단계에 오를 때는 조심하게. 모든 것을 버려야…그대는 비로소 진정한 주신이 될 수 있을 걸세.’
‘제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아크는 라만툴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로 표현되는 밝은 구체가 번쩍거렸다.
‘고대부터 존재했었던 악을 조심하게. 지금 어비스에 처박혀 있는 마왕들은 놈의 편린에 불과해. 모든 불순한 감정에서 태어난 놈이 지금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네.’
‘그 놈은 대체 누구입니까?’
‘나의 숙적. 그리고 미래에 그대의 숙적이 될 자. 7대신들로부터 구원해달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거네. 놈은 신들조차 두려워하는 존재야. 그렇기에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동원해서 놈에게 맞서려 하지. 그 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존재는 나와, 그대다.’
‘마신…쯤 되겠군요.’
‘무엇으로 불러도 무방하네. 놈은 몇 가지 단어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니까. 나의 후예여, 기억해두게. 놈은 육체를 찾으려 할 걸세. 그의 영혼을 담을 수 있는 아주 든든한 육체를. 그대가 놈을 방해하고 싶다면 먼저 드래곤을 찾아보게.’
‘화이트 드래곤의 실종이 거기에 관련이 있었군.’
실마리가 잡힌다. 마왕보다 상위의 존재가 지금 눈을 뜨려 하고 있었다. 육체를 찾는다는 걸로 봐서 대륙에서 가장 튼튼한 드래곤의 육체를 빌리려는 모양이다. 하지만 화이트 드래곤을 고른 이유는 뭘까? 눈앞의 빛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제 나는…영원한 안식의 축복에 들게 되겠군. 참으로 긴 세월이었어.’
아크는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신이 되기 위해 노력하다 마침내 실패하고 이제 영면에 들려 하고 있었다.
‘내가 소멸하면 어비스와 지상의 구분이 사라지네. 마왕과 케테르가 더 자유롭게 지상을 드나들 수 있게 되겠지.’
‘놈들을 영원히 소멸시킬 수는 없네. 모든 존재에 빛과 그림자가 있지. 하지만 최소화할 수는 있을 걸세. 그게 주신이 될 그대의 역할이네.’
‘내 얘기만 해서 미안하네. 곧 소멸하는 작은 영혼의 넋두리라 생각해주게. 대신 그대는 나의 힘을 일부 이어받을 수 있으니 이 정도면 제대로 값을 치렀다고 할 수 있겠나. 말이 길었군. 잘 있게, 나의 후예여.’
빛이 사라진다. 아크는 우주의 수많은 반짝이는 별들을 보고 있었다. 저 별들 중 태양이 있을까? 아크의 고향인 지구가 있을까? 각각마다 생명체가 존재하고 있을까?
다시 갈란테 행성을 내려다본다. 저기가 아크의 새 고향이다. 500년 넘게 살아온 모든 인연, 악연, 그 외에 각각의 삶을 살아가던 존재들이 살고 있는 고향이기도 했다.
‘내 역할.’
발리노어 대륙에 존재하는 신의 역할. 그것은 마왕과 새로이 태어날 마신과 대립해 생명체가 더욱 나은 삶을 영위하도록 돕는 것이다. 모든 악은 생명체의 감정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완전히 소멸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갈란테 행성에 적용되는 오리진은 그 대척점으로서 8대신과 그들의 챔피언, 그리고 용사를 만들어내었다.
‘이거 갖고 힘내라는 건가.’
아크는 자그마하게 미소 지었다. 갈란테라는 어머니가, 작은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쥐어주는 광경이 떠오른다. 뒤늦게 전대 주신 라만툴의 힘과 지식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크는 수많은 글자와 숫자가 엉망으로 시야를 가리다가 차근차근 조립되는 모습을 보았다.
종족은 반신이 되었고 모든 스탯이 두 배로 뻥튀기되었다. 정령친화는 ∞가 되어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게 되었고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신성력이라는 새로운 항목이 생겨났다. 새롭게 나타난 스킬도 있고 기존 존재했던 두 개의 스킬은 더 강화되었다.
「신력 : 500/500
생명 창조 : 호문클루스를 만들 수 있습니다. 신력 400소모.
크로노 트리거 : 대상의 시간을 앞으로, 혹은 뒤로 감을 수 있습니다. 신력 500소모.
차원문 열기 : 차원을 마음대로 열고 닫을 수 있습니다. 신력 10소모.
기도 듣기 : 당신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정화의 손길 : 모든 종류의 질병, 상처를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신력 50소모.
권속 지정 : 당신의 챔피언을 지정합니다. 신력 300소모.」
‘이건 또 뭐야, 신력이라니.’
라만툴의 지식에 의하면 이제부터는 궁금한 것이 있다면 단어에 집중하는 것으로 과거 라만툴의 경험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신력이라는 단어에 집중하자 새로운 메세지가 팟 떠올랐다.
「신력 : 신격을 얻은 자가 쓸 수 있는 힘이다. 추종자가 늘어날수록, 기도하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줄수록, 신격이 높아질수록 최대치가 늘어난다. 평상시에도 조금씩 회복되기는 하지만 그 양은 적다. 영향력 포인트를 신력으로 바꿀 수도 있으며, 그 반대도 가능하다. 다만 이 경우 최대치는 늘어나지 않는다. 비율은 100:1.」
‘짜다.’
영향력 포인트 10만이라면 겨우 1,000의 신력을 얻을 수 있다. 그나마도 얻을 수 있다는 게 다행인가? 아크는 새로운 스킬을 살펴보다 저 멀리 우주에서 바쁘게 달려오고 있는 천체를 발견했다. 오래된 친구가 다시 갈란테 행성에 찾아왔다.
‘너 또 왔구나.’
130년 주기로 갈란테 행성을 찾아오는 혜성, 아크는 녀석을 아크혜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혜성은 갈란테 행성을 상당히 근접해서 지나가는데, 그때마다 대륙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곤 했다. 100년 전에는 이 녀석이 대량으로 바윗덩어리를 뿌리고 가는 바람에 해안가에 쓰나미가 생겼던 적이 있다. 하여튼 곤란한 녀석이다.
‘그래도 반갑긴 하네.’
아크는 미소를 머금었다. 라만툴을 흡수한 뒤 그의 몸이 점차 하강하고 있었다. 이렇게 대륙이 드러나 보이는 높은 상공에 있으면 지금까지 그가 해왔던 일들이 참으로 부질없이 느껴진다.
‘사랑…증오…다 쓸모없는 거지.’
원래 감정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는 있었으나 이렇듯 반신이 되고나자 더한 감정의 실종을 느낀다. 어지간한 자극으로는 아크를 화나게 할 수도 없고, 괴롭힐 수도 없다.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해야지.’
아크가 지상에 내려오자 사방에 가득했던 빛이 사라졌다. 그때까지 정지해 있던 모든 존재가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배의 마왕 엔케이두스는 그를 구속하던 경계가 사라졌음을 알았다.
‘드디어.’
드디어 때가 왔다. 이제 더 이상 악물을 보내 아인종을 타락시키지 않아도 된다. 온갖 노력을 다해 어비스 게이트를 열지 않아도 된다. 마왕의 강대한 마력으로 차원문을 열어 케테르를 보내면 된다. 그의 의식이 지상으로 빨려들어갔다.
마왕의 강림이 이루어지려 하고 있었다. 발로크의 양손도끼가 마리앤의 다리사이에 내려찍힐 때, 루아크가 달려가고 있을 때, 아크가 막 구름을 뚫고 하강하고 있을 때 타락한 롱엣지에서 빛이 번뜩였다. 거대한 그림자가 마리앤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허윽! 뭐, 뭐야?”
“물러나라!”
바바리안들은 별안간 느껴지는 섬뜩한 기운에 후다닥 물러섰다. 마력갑옷을 입고 있던 마리앤이 그림자에 삼켜져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온 몸의 관절이 축 늘어지며 마치 인형처럼 변했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쉽게 영혼을 잡아먹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리앤은 지배의 욕망으로 가득했고 거듭된 죽음의 공포로 이성을 잃고 있었다. 거기에 어비스와 지상을 구분짓던 차원이 없어져 마왕은 마음껏 힘을 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마리앤의 영혼이 엔케이두스에게 잡아먹혔다.
아아아아!
마리앤은 검을 팽개치고 머리를 감쌌다. 형언할 수 없는 온갖 고통이 머릿속을 파고들고 있었다. 그녀는 비명도 지르기 못하고 숨을 헐떡였다. 마침내 고통이 멈추고 그녀가 부르르 떨던 움직임을 멈춘다.
“나는…”
“누나! 폐하!”
루아크가 스톤골렘 몇 기와 함께 달려왔다. 호위병 역할을 하는 스톤골렘이 팔을 휘두르면서 주위의 바바리안을 물러서게 했다. 이제 전황은 바바리안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해졌다.
저 전사 같지도 않은 흰둥이들은 이제 황제만 쳐다보고 있었다! 발로크는 양손도끼를 들고 앞으로 성큼성큼 나섰다. 루아크와 스톤골렘이 그의 앞을 막아섰지만 어림도 없다.
“나는…지배와 보호의 마왕 엔케이두스. 마침내, 여기 섰도다.”
엔케이두스는 지배라는 부정적인 면을, 보호라는 긍정적인 면을 가진다. 그의 상징자는 귀족. 먼 옛날부터 지배력을 행사해 온 집단이다. 엔케이두스는 지배력을 행사하는 모든 권력층을 없애지 않는 한 소멸되지 않는다. 그가, 마침내 지상에 강림했다.
“마, 마왕이다…”
“으아아아!”
마리앤은 마치 그림자 옷을 입은 것처럼 변해 있었다. 어머니가 선물한 마력갑옷과 티아라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옷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며 나신이 드러났다. 엔케이두스의 본체가 두 팔을 벌리고 허공에 떠 있는 그녀를 뒤에서 품었다. 전신에 뿔을 가진 엔케이두스는 공기를 태우는 화염 숨결을 뿜더니 곧장 어비스 게이트를 열었다.
“나와라, 나의 수하들이여, 케테르여. 여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먹어치워라.”
케아아악!
키케륵!
엔케이두스의 수족들이 어비스 게이트에서 뛰쳐나왔다.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빠져나오는 바람에 자기들끼리 치고 밟고 난리도 아니었다. 이제 바바리안과 용사의 싸움은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마왕이 그들을 멸하러 나타났으니까.
“후퇴하라! 후퇴하라! 마왕이다!”
“산맥으로 도망가라! 가능한 멀리!”
“흐아아악!”
어비규환이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는 인간들에게 오만한 눈빛을 던지는 존재들이 있었다. 엔케이두스의 챔피언, 그리고 마족이다. 그들은 아주 오랜만에 지상으로 나와 햇볕을 쬐는 것에 만족한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위에서 그들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는 존재가 있었다.
“어비스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잘도 기어 나왔구나.”
머리 위에 헤일로를 띄운 아크가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의 전신은 이미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어비스의 악몽, 마왕 살육자로 불리는 그의 등장에 모든 마족과 케테르가 긴장했다. 그러나 마리앤의 몸을 가로챈 엔케이두스는 기분 좋게 웃었다.
“너도 이제는 별 수 없을 것이다. 불멸자여.”
“별 수 없다고? 설마 새로운 계획을 세운 건 아니겠지?”
“너 따위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위하여, 우리는 일어섰다. 나를 죽여 봐야 소용없다. 불멸자여. 나는 다시 태어날 것이고, 너를 방해할 것이다. 시간은 우리의 편이다.”
“하하하…”
아크는 그 대목에서 유쾌하게 웃었다. 시간이 누구의 편이라고? 안타깝지만 아크는 시간과 차원의 신이 되었다. 그가 눈을 빛냈다.
“마신이라도 만들어내려는 모양이지? 어서 빨리 만들어라. 내가 너희들의 신을 죽여 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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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