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8 고대의 악 =========================
고대의 악 - 8
아크는 라크러스와 함께 삭사스 공국을 찾았다. 에트라곤의 등을 잠시 빌리려 했지만 녀석은 그 새를 못 참고 도망간 상태였다. 하여간에 의리도 인내심도 없는 놈이다. 아크는 녀석을 속으로 욕하며 라크러스와 함께 삭사스 공국으로 향했다.
삭사스 공국은 마법도시 헤이본과 함께 도시국가에 해당한다. 다만 헤이본과 비교하기에는 규모가 제법 차이난다. 삭사스 공작 휘하에 의회를 꾸밀 정도의 귀족은 있고, 또 민망하긴 해도 군대는 있다. 바르마 제국이 보면 헛웃음을 지을 규모지만.
마법공학의 코어인 만큼 삭사스 공국에 도는 돈은 엄청나다. 아크는 그걸 거리에서부터 느낄 수 있었다. 주변의 작은 소왕국들과 비교하면 시대가 다른 느낌이었다.
‘150년 정도 앞서있군.’
심지어 트라움 제국마저도 전체적인 발전도를 따지면 삭사스 공국에 미치지 못한다. 제국의 규모가 너무 크기에 골고루 발전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아크는 라크러스와 함께 도시의 거리를 걸었다. 어떤 대형 상점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 간판을 걸었다.
“야야야, 아크야. 저거 보이지? 나 저거 처음 보고 엄청 놀랐다니까. 대체 무슨 조화냐, 저거? 너도 마법공학에 일가견이 있잖아.”
라크러스가 빛나는 간판을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물론 아크는 저걸 안다. 안에 작은 마나석 조각과 여러 부품, 마기 로직이 들어있고 라이트 마법과 라이트닝 마법을 아주 작은 규모에서 실현시킨 결과다.
“안에서 작은 마법들이 번갈아가면서 터지는 거야. 라이트 마법, 라이트닝 마법이지.”
“어? 그러냐? 근데 그게 가능해?”
“가능하니까 저러고 있는 거지.”
마나석의 소비가 있긴 하겠지만 주목도에서는 최고였다. 상점 앞은 아직 들어가지 못한 여러 손님들로 난장판을 방불케 했다. 마법공학 아이템을 파는 상점인데 투자를 확실하게 한 모양이다.
“하여튼 인간들은 신기하네…마법을 저렇게도 쓸 수 있다니.”
라크러스가 감탄하자 아크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500년 전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마법과 달리 마법공학은 아크가 이론을 정립하고 하나하나 실험해서 뼈대를 세운 학문이나 다름없다. 물론 아크가 가진 치트키 같은 시스템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가자, 여긴 너무 사람들이 많아.”
“뭐 사러 왔다며? 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라크러스의 날개를 보고는 수근거린다. 실버드는 외지인들이 많은 이런 도시에서도 꽤나 희귀한 존재다. 그들은 하늘정원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라크러스는 겉으로 보면 미끈한 미남이라서 특이취향인 남정네나 귀족 부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을 만도 하지만 삭사스 공국은 꽤나 치안이 좋아서 납치 등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크는 라크러스를 끌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부품을 구입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손이 많이 가면서 미니언들이 제작할 수 없는 정밀한 마법공학 부품이다. 예전에 아크가 마법공학을 보급할 때만 해도 공학자들이 직접 마기 로직을 구현할 부품을 만들었지만 요즘은 아니다.
삭사스 공국에서는 인건비가 싼 일반인들을 동원해서 부품을 만들고 있었다.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일반인인 만큼 불량률은 치솟지만 마법공학자의 시간은 비싸기 때문에 오히려 싸게 먹힌다고 한다. 덕분에 아크는 속으로 욕을 내뱉으며 일일이 부품을 검사해야 했다.
‘원가절감 너무하네.’
이렇게 부품을 팔아놓고 문제가 생기면 나 몰라라 한다. 그게 삭사스 공국의 실체다. 아크는 라크러스를 끌고 근처의 음식점에 들어갔다. 한참동안 돌아다녀서 그런지 녀석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있었다.
“밥 먹자, 밥. 뭐가 좋을까…”
라크러스가 주문을 하는 동안 아크는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삭사스 공작을 욕하는 소리, 바르마 제국에서 주문이 들어왔다는 소리, 마누라와 싸웠다는 소리가 들린다. 그 중에서 아크의 주의를 끄는 것이 있었다.
“아무래도 트라움 제국이 이기지 않겠어? 상대는 야만인이라며?”
“그래도 2,000명 넘는 전원이 전사라던데. 피레네 산맥인가 뭔가도 꽤나 걸림돌이라고 하더라고. 그거 넘기가 쉽지 않을 걸.”
“제국이라고, 제국. 바르마 제국보다 발전됐단 말이지. 걔네들이 그깟 야만인 수천 명을 정벌하지 못하면 말이 안 되지.”
“그 골드 드래곤인가 하는 년 있다며? 걔는?”
“드래곤이니까 인간 세상 어쩌구 하면서 투입 안한다던데? 아깝네. 야만인들 머리 위로 브레스를 확 뿜어줘야 되는데.”
‘쓰레기 같은 놈들이군.’
사내놈 셋의 대화는 귀에 거슬렸지만 아크는 트라움 제국이 피레네 산맥을 넘는다는 대목에 황당할 지경이 되었다. 거긴 바바리안의 영역이 아닌가?
‘갑자기 이게 무슨 난리야. 200년 동안 내버려 둔 피레네 산맥 북쪽을 왜 이제야?’
아크는 초월자이긴 하지만 전지전능하지 않기 때문에 대륙 반대쪽에 있는 마를레네와 마리앤의 행동과 생각에 대해 모른다. 음식이 나왔고 라크러스가 신나게 먹어치우는데도 그는 깔짝거리기만 했다.
‘바바리안 중에서도 내 아이들이 있을 텐데.’
초월 이후 20명의 여인들과 잠자리를 가졌으니 지금쯤은 성인이 된 20명의 용사가 있을 것이다. 쌍둥이가 태어날 수도 있고 말이다. 제대로 자랐다면 그들의 능력은 어지간한 기사를 어린애 취급할 수 있다.
전성기의 마를레네 정도는 아지만 20여 명이 힘을 모으면 작은 소왕국을 뒤집어 엎을 정도는 된다. 그런 그들에게 트라움 제국이 공격해 들어간다고?
‘마리앤을 잘못 키웠지…’
아크는 마리앤을 교육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야 귀여워해주는 정도로 충분했지만 자그마치 황제의 딸이다. 글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을 무렵부터는 마를레네가 맡아 교육했다. 아크는 에키드나와 함께 루아크를 맡았다.
마를레네는 마리앤을 혹독하게 가르쳤다. 귀족들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를 딸에게 푸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칠었다. 보다 못한 아크가 몇 마디 하긴 했지만 그대는 루아크 교육에나 신경 쓰라는 매정한 말에 입을 닫고 말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균열이 있었지.’
마를레네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긴 했지만 그놈의 정통성 문제로 즉위기간 내내 귀족들로부터 견제를 받았다. 아크처럼 그딴 거 신경 안 쓰는 놈이면 폭군처럼 행동했겠지만 마를레네는 뼛속부터 귀족이다. 그녀는 귀족정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비판을 견디지 못했다.
따라서 마를레네는 말 안 듣는 소왕국들을 설득하는 것은 물론이고 귀족들까지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부어야 했다. 아크는 차라리 밟아버리는 게 낫다고 조언했지만 마를레네는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은 그대와 다르다. 트라움 제국의 근간은 귀족이다.
‘그때 귀족들을 밟아버렸어야 했는데…아니…마리를 황제로 즉위시킨 게 잘못이었지.’
아크는 한숨을 내쉬었다. 품에서 떠난 새끼 새들까지 어미가 책임져줘야 할 필요는 없지만 바바리안들은 무슨 죄인가. 그들은 아크가 데리고 왔다. 강대한 트라움 제국에 맞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뿐이다. 그들은 항복하지 않는다.
‘한번 가봐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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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앤 황제는 성도로 돌아온 후 즉각 용사를 모집했다. 45명, 마리앤 자신까지 포함해서 46명이 전원 모였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선언했다.
“이번 전투는 패배를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그대들과 나, 용사들이 벌이는 최초의 실전이니까, 절대 패배해선 안 됩니다. 물론 패배할 수도 없습니다. 적은 야만인이니까.”
싸늘한 시선이 용사 후보생들을 가로질렀다. 그들은 제국에서 지급한 뛰어난 무구들로 무장하고 있다. 서로의 시야에 서로의 스탯이 보인다. 따라서 누가 지휘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도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가장 강한 놈이 하면 된다.
“단, 야만인들 중에서 주의해야 할 놈들이 있습니다. 20명 정도 되는 것 같은데…불행하게도 그들의 스탯은 여러분을 뛰어넘습니다.”
“우리를 뛰어넘는다고요?”
“그러면 합공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지원은 없습니까?”
후보생들이 웅성거렸다. 마리앤 황제는 들고 있던 마기스태프를 바닥에 찍었다. 사방이 조용해졌다.
“지원은 없습니다. 귀족들은 아직도 우리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원정을 반드시 승리로 장식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이번 전투는 마리앤 황제의 자랑거리인 셈이다. 그녀는 어머니인 마를레네로부터 황제 자리를 물려받아 아무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막 즉위한 황제에게 무슨 성과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마리앤은 성격이 급했다.
마침 그녀의 눈앞에 야만인 세력이 보인다. 바바리안들을 복속시키고 땅을 지배한다면, 그 젠장맞을 귀족들도 그녀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리앤 황제는 그 강력한 바바리안들이 전대 재상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아크의 자식으로 추측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걸 인정하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당신은 정말 제멋대로였군요.’
말로는 어머니에게 충실했다고 하면서 이게 뭔가? 결국 바바리안에게 쏙 빠져 허리를 놀리고 다녔다는 이야기밖에 더 되겠는가?
마리앤 황제는 어릴 적 잠시 동안을 제외하고는 아버지로부터 떨어져 지냈고, 별로 살갑게 지내지도 못했다. 사는 곳도 달랐고 마주칠 일도 거의 없었다. 마를레네가 그녀를 혹독하게 교육시켰기 때문이다.
‘어머니밖에 모른다더니…또 누가 있나요? 누구와 살을 맞댔죠?’
그녀는 어머니의 추측을 믿지 않는다. 신? 요즘 세상에 그걸 누가 믿는단 말인가. 게다가 주신이라니, 저잣거리에 돌아다니는 어린아이조차도 믿지 않을 것이다.
200년을 살아온 남자, 마를레네 외에 또 후손을 남겼는지 어떻게 알까. 마리앤은 세상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그들에게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녀를 부정하는 것 같아서였다.
용사들이 돌아간 후, 마리앤은 루아크를 불렀다. 마리앤은 어렸을 때와 인상이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루아크는 그대로라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순진한 척하는 동생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육체적인 스탯은 제법이지만 제대로 쓸 생각이 없는 듯하다.
“루크. 이번에는 네가 날 좀 도와줘야겠어.”
마리앤이 침대에 비스듬히 드러누웠다. 그녀의 착한 동생은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굳이 루아크를 루크로 줄여 부른 이유는 아버지 이름이 생각나서였다. 마리앤은 아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아버지에게서 자란 루크도 탐탁해하지 않는다. 다만 쓸 만하니 이용할 뿐이다.
“누나…”
“나는 황제야, 루크. 똑바로 말해.”
“…”
루아크는 음울한 시선을 누나에게 던졌다. 10살 전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어디서부터 변해버린 걸까. 어머니가 누나의 교육을 전담하면서부터일까? 귀족들에게 시달림을 받아서일까?
“…황제 폐하.”
“좋아. 루크. 넌 이번에 나를 따라가 줘야겠어. 아무래도 멍청이들만 데리고 가는 것은 조금 곤란하거든.”
“피레네 산맥 북쪽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유야 너도 잘 알겠지? 세간에 소문이 자자하니.”
“바바리안을…친다고 들었습니다.”
마리앤이 상반신을 일으켰다. 잠옷을 입고 있는 그녀의 입술이 묘하게 반짝인다.
“쳐? 아니야, 루크. 이번 바바리안을 치는 게 아니야. 나의 땅을 회복하는 거야. 제국의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하는 거야. 피레네 산맥 북쪽의 땅이 원래 누구의 것이었는지 잊진 않았겠지?”
‘누구의 것도 아니었지요.’
정확히 말하면 버려진 땅이었다. 트라움 제국의 행정력은 더 남쪽의 폴트 마을에도 미치지 못했다. 최근에는 땅을 개간하고 도로를 깔았으니 영토라고 주장할만 하지만 백번 양보해도 피레네 산맥 북쪽의 땅에는 아무런 권리도 없다. 하지만 마리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잔말하지 마, 생각하지 마. 넌 그냥 어릴 때처럼 내 말을 따르면 돼. 우리 둘, 그렇게 놀았잖아? 내가 명령하고, 넌 따르고.”
“…그랬었지요.”
어릴 때는 정말 그랬다. 마리앤은 뛰어놀기를 좋아하는 활기찬 누나였고 루아크는 수줍어하면서도 그런 누나를 잘 따랐다. 어렸을 때의 그녀는 용사를 하겠다고 하다가 어머니 마를레네에게 볼기짝을 맞기도 했었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니 루아크의 입가에 미소가 조금 번진다.
“웃어? 지금 웃음이 나오나보네, 루크.”
‘그 이름으로 나를…’
루아크는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드는 아버지가 붙여준 이름이라고 할지라도 제멋대로 바꿔 부르는 게 말이 되는가. 주위 사람들 모두가 그의 이름을 평범하게 불러준다. 하지만 마리앤은 달랐다. 언제부터인가 편협하고 오만하게 변한 그녀는 루아크의 풀네임을 불러주지 않았다.
“뭐, 상관없지. 아무튼 준비하고 있어. 나중에 부를 테니.”
마리앤이 손짓을 했다. 나가라는 뜻이다. 루아크는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어머니…선황제께선 어떻게 생각하고…”
그 순간 냉기가 느껴질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황제는 나야.”
루아크는 자신을 노려보는 마리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심약한 그로서는 표독한 누나를 거역하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눈을 감고 머리를 숙이고 말았다. 복종의 표시다.
“착하지. 루크. 나만 믿어. 나만 믿고 따라오면 되는 거야. 알겠지?”
“…예, 폐하.”
동생이 누나에게 복종할 그 시각, 과거 슬러스 사태에서 끝까지 살아남았던 마왕의 작은 조각이 움직였다. 마나의 흐름을 추적하는데 대가인 아크조차 발견하지 못한 아주 작은 흔적이었다.
평소라면 이런 작은 흔적을 지상으로 투사하는 데 많은 힘이 들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상과 어비스를 구분하는 신의 육체가 약해졌으니까.
마왕은 생명체의 감정을 기반으로 한다. 마리앤의 지배욕구는 그 조각의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지배의 마왕 엔케이두스가 어비스에서 눈을 떴다. 화이트 드래곤을 타락시켜 지배한 그가 새로운 먹잇감을 찾았다.
“흥미롭군.”
============================ 작품 후기 ============================
전전편에서 마리앤은 말 몇마디 안했는데 엄청난 리플을 끌어모았군요...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찌되었든 이번 챕터에서 결론이 나기는 할 겁니다.
결말과 상관없이 주인공은 또 살아가겠죠.
이게 이 소설의 스토리입니다.
...아침드라마같다구요? 흐안아나우훙흑흐구ㅜ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