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2 고대의 악 =========================
고대의 악 - 2
아크는 에트라곤의 둥지를 찾았다. 녀석은 드디어 이사를 그만두고 둥지를 만들게 되었다. 드래곤답지 않게 모아 놓은 재산도 별로 없어서 아크가 적당히 채워주었다. 그동안 마구 폭행한 것에 대한 작은 미안함의 표시랄까.
형님, 형님 하며 껴안는 에트라곤은 역시 미워할 수 없는 녀석이다. 가끔 바보짓을 할 때면 죽빵을 날려버리고 싶지만.
“에트라곤.”
“형님 오셨네요.”
역시 바닥에 드러누워 잉여짓을 하고 있던 에트라곤이 고개를 돌렸다. 드래곤 본체로 마법책을 보고 있다. 아마 D링크로 다른 드래곤과 채팅을 즐기는 것이리라. 둥지 안은 간신히 그가 누울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아크에겐 드넓은 곳이지만.
“뭐하냐?”
“어…요즘 사건이 생겨서요. 화이트 드래곤 얘긴데.”
에트라곤의 장점이라면 종족을 초월해 아크를 형님으로 받아들였기에 드래곤 사회에서 일어난 일들을 죄다 불어버린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크는 드래곤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비밀스런 이야기를 주워들을 수 있었다. 드래곤들이 치정싸움이 심하다는 것도 처음 들었다.
“화이트 드래곤?”
드래곤 중 최약체. 에트라곤이 아주 약한 드래곤으로 유명하지만 종족 평균으로 따졌을 때 최약체는 바로 화이트 드래곤이다. 다 커도 몸길이는 20m 남짓한터라 드래곤보다는 드레이크를 더 닮았다.
마법도 그다지 신통치 못하고 육탄전에도 영 젬병이라 군 단위의 병력이 덤벼들면 충분히 잡을 수 있다. 그래서 200-300년 전까지만 해도 화이트 드래곤은 인간에게 사냥당하는 존재였다. 최근에는 그렇지도 않지만.
“옙. 요즘 실종사건이 자주 생겨서요. 처음에는 놀러다니는 게 아닌가 했는데 둥지가 오래 비워져 있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네요.”
아크는 에트라곤 옆에 서서 마법책을 들여다보았다. 드래곤이 쓰는 마법책답게 상당히 큰데 거기에 글자가 마구 쓰여지고 있었다. 지금 발언권을 얻은 자는 블랙 드래곤 카밀라다.
“카밀라, 그 아줌마가 아직도 있었나.”
아크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하자 에트라곤은 누가 쳐다보기라도 하는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쉿, 형님. 카밀라가 알면 큰일납니다. 성격 더러워요. 그나저나 언제 카밀라 만난 적 있습니까?”
“있지, 아주 많이.”
“대체 언제…”
에트라곤은 뒷다리로 턱을 벅벅 긁었다. 이 인간 같지도 않은 아크라는 인간은 도대체 정체가 뭔지 수상하다. 그는 챔피언이라고 했지만 사실 챔피언은 아크처럼 무지막지한 힘을 가지지 못한다.
“카밀라가 내 정체를 알아내면 지금 당장 여기로 올지도 몰라.”
“예? 그, 그건 안 되는데요?”
에트라곤은 간신히 얻은 둥지를 애지중지한다. 그 성격 더러운 블랙 드래곤 카밀라가 아크를 쫓아와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면 에트라곤은 가운데에서 쥐어터질 것이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비켜봐라. 내가 D링크 좀 써야겠다.”
“근데 형님, 이거 드래곤 전용인거 아시죠?”
“내가 그걸 모를 것 같냐?”
에트라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아크는 통신구에 손을 올려 마나를 전달했다. 에트라곤의 잡스러운 마기 로직을 복사해 채워 넣자 마법책에 승인 문구가 떠오른다.
이제 아크는 에트라곤의 이름으로 D링크에 접속할 수 있게 되었다. 옆에서 정신없이 보고 있던 에트라곤이 주둥이를 떡 벌리곤 마법책과 아크를 번갈아 쳐다봤다.
“헐…이게 대체 뭔 조홥니까? 제 마기 로직을 어떻게?”
“다시 말해주랴?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는 9클래스의 마스터였다.”
에트라곤은 할 말을 잃고 앞발을 늘어트렸다. 아크는 녀석의 주둥이를 밀어내고 적당히 자리를 잡아 옆으로 누웠다. 에트라곤이 콧김을 내뿜으며 다가오는 게 영 신경 쓰이지만 여기서 쫓아내면 분명히 삐질 것이므로 매몰차게 대하지는 않았다.
―카밀라 :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그 저능한 화이트 드래곤들이 셋이나 사라진 게 우리하고 무슨 상관인데? 보나마나 인간들에게 사냥당해서 나자빠졌겠지.
―데미레스 : 보자보자하니까 진짜 말이 심하네. 화이트는 뭐 드래곤도 아닙니까? 드래곤 레이드가 언제 끝난지도 몰라요? 200년도 더 전에 마지막으로 일어났는데 인간들이 갑자기 드래곤 레이드를 벌인다? 말이 안 됩니다.
―카밀라 : 아 몰라. 니들이 알아서 하라고. 우리들은 움직이지 않을 거니까.
―파라곤 : 자자, 이러지들 마시고…화이트 드래곤들의 실종 사건은 분명 드래곤 전체의 위협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그 실종사건을 일으킨 적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습니까?
―카밀라 : 뭐 마왕이라도 튀어나와서 잡아갔나보지.
카밀라가 툭 던진 말에 채팅창이 얼어붙었다. 16년 전의 그 일, 슬러스가 트라움 황궁을 침범한 사건이 있은 후로 마왕과 케테르족들은 지상을 자기집처럼 드나들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어비스 게이트도 없이 마물들이 튀어나왔고 악마들이 인간들을 타락시켰다.
그나마 트라움 제국에서 적절한 대책이 나왔기에 망정이지, 작은 왕국 몇 개가 사라질 뻔했다. 드래곤들 또한 그 방법을 잘 배워서 써먹고 있었다. 악물이 나타나면 추적할 수 있는 방법이다.
지금까지는 괜찮다.
마왕과 케테르의 주요 목표는 인간에 한정되어 있었다. 간간히 엘프나 드워프가 타락해서 케테르를 불러들이긴 하지만 소수에 불과하고 지닌 힘도 보잘 것 없다.
하지만 드래곤이 타락한다면 이야기는 좀 달라진다. 가장 허약한 화이트 드래곤이라도 다른 생명체에게는 심대한 위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크는 마법책에 올라오는 채팅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했다. 그들이 투닥투닥 싸우는 걸 보며 드래곤도 인간과 별 다를바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위치는…윈드슈어 산맥이군.”
“예. 화이트 드래곤들이 추운 곳을 좋아하니까요. 그런데 형님, 거기 갈 생각이십니까?”
“거리가 너무 먼데. 그리고 난 하늘정원에 들러야 해서 말이다. 에트라곤 네가 나를 태워준다면 가볼 의향도 없잖아 있다만.”
애초에 아크가 여기에 온 까닭도 에트라곤을 말로 쓰기 위해서였다. 녀석은 바보 드래곤 답게 아크의 노림수를 파악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마왕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겠죠?”
에트라곤이 뜬금없이 물었다. 아크는 녀석의 멍청한 면상을 올려다보았다. 놀랍게도 사라진 화이트 드래곤들이 걱정되는지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 천성적으로 마음씨는 나쁘지 않은 녀석이니까.
“화이트 드래곤을 제압해서 끌고 갈만한 녀석이라면 디아보로스, 에피칼로스, 크세르크스 정도로군.”
“디아보로스하고 에피칼로스는 들어봤는데 크세르크스는 누굽니까?”
“살육의 마왕이잖냐. 너 혹시 9마왕을 다 모르는 거 아니냐?”
“어…헤헤, 사실은 잘 모릅니다.”
“어떤 놈이 악물을 매개체로 화이트 드래곤들을 끌고 갔는지 모르지만 꽤나 많은 대가를 치렀을거다. 인간을 타락시키는 것은 비교적 쉽지만 드래곤들은 아니거든. 그랜드 챔피언 하나를 희생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랜드 챔피언을요? 전에 튀어나왔던 파나투스 같은 놈들 말입니까?”
“그래. 마왕들은 뭔가를 희생하길 좋아하지. 어떤 미친놈은 자신의 불멸성을 대가로 종족 전체에게 저주를 걸었던 적도 있으니까.”
“그런 적도 있었나요? 무서워…”
“너그리스가 자이언트에게 저주를 걸었지. 근데 너 정말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아무것도 모르네.”
“헤헤, 제가 워낙 지식이 없어서…꾸왁!”
머리를 긁적이던 에트라곤은 기어코 아크의 발길질에 배를 얻어맞고 뒹굴어야했다. 아크는 녀석에게 마왕들에 대한 정보를 우겨넣는 대가로 하늘정원까지 태워다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윈드슈어로 같이 간다는 약속은 덤이다.
.
.
.
“여긴가.”
주신의 교단 대예배당. 늦은 밤 아무도 오지 않아 고즈넉한 이 곳에 마를레네가 발을 디뎠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라이트 구체가 빛을 발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트라움 제국의 곳곳에 아크의 손길이 묻어 있다. 마를레네는 벽을 따라가며 전시대를 관찰했다.
아크가 어디선가 주워왔다는 아이템들이 주르륵 진열되어 있었다. 거대한 양날도끼, 세밀한 세공으로 장식된 목걸이, 고풍스러운 검 등으로 전시대가 꽉 차 있다. 이 전시대는 아크가 마법을 건 것으로 절대 열리지도 않고 파괴할 수도 없다.
‘이게 갤러트의 성물이라고.’
마를레네는 망원경을 발견했다. 그래, 에키드나의 얘기로부터 여기까지 연결되었다. 그녀는 에트라곤이 갤러트의 성물을 갖고 있었다고 얘기했고, 아크가 야바위를 쳐서 그걸 빼앗아갔다고 전달했다. 마를레네와 안젤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아크는 어떻게 갤러트의 성물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그리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신들의 성물을 얻어 뭘 하려고 했을까.
‘이게 다 신들의 성물이란 말이지…’
아스텔라와 주신의 성물만 없는 것 같다. 마를레네는 전시대를 손가락으로 훑다가 한쪽에 잘 정리된 서가를 발견했다. 안에는 손때가 묻은 경전이 가득했다.
“신화의 길이라.”
안젤라의 말에 의하면 이 경전은 아크가 갑자기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교단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장식하고 신도들을 교육할 내용이 없자 그가 어디에선가 가져왔다는데 꽤 재미도 있고 교훈도 많이 담겨 있어서 요즘은 여러 교단에서 구입해 간다고 한다.
아크가 마법공학 인쇄술을 보급해서 그런지 요즘은 책을 복사하는 비용도 상당히 저렴해졌다. 하여간 제국은 아크가 아니었더라면 결코 이 정도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대가 날 떠나지만 않았다면…’
그를 가슴에 묻고 경전을 집어 들어 페이지를 넘긴다.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 있지만 필체는 꽤 정갈하다. 인쇄를 한 게 아니라 누군가가 손으로 쓴 것 같다. 마를레네는 라이트 구체의 빛에 의지에 책을 읽었다.
그녀가 여기로 온 까닭은 아크가 진짜 신인지 파악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에키드나의 농담은 비록 응접실을 썰렁하게 하는 데에는 충분했으나 마를레네는 속지 않는다.
“…재미있군.”
확실히 안젤라의 말마따나 재미있다. 신화의 길은 가상의 인물, 아마도 주신으로 추측되는 인물의 일대기를 담고 있다. 어떤 눈 덮인 산맥에서 헤매었다는 대목에서는 흠칫했으나 그 위의 내용이 제법 흥미진진했다.
‘한낱 장사꾼에서 병사…기사…장군…왕까지 올라가다니.’
지명과 연도가 쓰여 있지 않아서 어느 시대인지 파악하기가 불가능했다. 마를레네는 무심하게 페이지를 사르륵 넘겼다. 안젤라가 말한 바 있었던 대륙의 도량형 대목이 나왔다.
“자기 키와 몸무게를 기준으로 해서 도량형을 만들었다고?”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자세한 방법은 나와 있지 않았지만 이 일화에 의하면 200년 전 미터법과 리블 금화의 규격이 정해졌다는 소리가 된다. 이 경전의 주인공이 주신이라는 걸 감안하면 이상한 결론이 나온다. 주신이 200년 전에 등장했었던가?
“주신의 이름도 모르는데…”
그렇다. 아무도 주신의 이름을 모른다. 심지어 안젤라도, 마를레네도 주신의 이름을 모를 뿐더러 그가 실제로 존재하는지조차 모른다. 즉 주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진 게 없었다.
그래도 헤일로가 나타나고 챔피언인 마를레네에게 여러 혜택이 주어진 걸 보면 주신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마를레네는 아직까지 자신의 젊음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한 번 챔피언으로 지정하면 취소가 불가능한 건가? 만약 그게 아니라면.’
아크는 그녀를 챔피언으로 지정하고 취소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가 떠난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크…”
마를레네는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떨림이 시작되었다. 그때 마리앤과 설전을 벌이느라 날이 곤두서 있었다. 조금만 아크를 따듯하게 대했더라면, 어쩌면 그는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뒤늦게 후회하기에 마를레네는 너무 멀리 왔다. 아크를 재상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그가 직접 국정을 돌보았을 때부터 오늘은 예견되었다.
‘후회하지 않아.’
하지만 마를레네의 손가락은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애써 그것을 모른 체 하며 페이지를 넘겼다. 주신이 바바리안들을 새로운 땅으로 인도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바바리안? 잠깐만, 얼마 전에 분명히…’
리치몬드 상단이 전해온 정보가 있었다. 바르마 제국 북벽 너머에 살고 있던 바바리안들이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말이다. 경전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마를레네는 황급히 페이지를 훑었다.
“13일의 여정…빙하…몬스터가 없는 낙원…산맥…”
마를레네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뚫고 지도를 그린다. 바바리안들이 사라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어디를 갔을까. 바르마 제국에서 흔하게 쓰고 있는 바우선의 속도와 대륙 북부의 지리를 비교해본다. 움푹 파인 거대한 만을 통과해 피레네 산맥 북쪽으로 온다면 시간은 딱 들어맞는다.
“설마.”
소름이 쫙 끼친다. 이 경전은 주신의 신화에 대해 적은 것이다. 그런데 왜 최근에 일어난 바바리안의 이동이 적혀 있단 말인가? 그 이야기는 주신이 최근까지 지상을 살피고 있었다는 소리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마를레네는 한 가지 가정을 했다. 에키드나의 농담대로, 아크가 만약 주신이라면? 그가 이 경전을 써서 안젤라에게 주었다면? 미터법과 리블 금화 규격을 만들었다면? 400년 전부터 발리노어 대륙에 간섭해왔다면? 이 추측에 어떤 구멍이 있을 수 있을까?
‘…’
마를레네는 잠시 입을 벌리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라이트 구체에서 흐릿한 아크의 얼굴이 비추어졌다. 그는 언제나 저런 얼굴이었다.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표정.
‘만약에…그가 진짜 신이라면.’
그녀가 벌떡 일어섰다. 확인해야 한다. 피레네 산맥 북쪽에 진짜 바바리안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몇 척의 바우선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인도한 자가 누구인지 알아내야 한다.
“에밀, 다훈트! 루카스!”
“옛!”
그녀의 호위기사가 우르르 뛰어왔다. 마를레네는 황급히 그들에게 명령했다. 트라움 제국 성도에서 몇 명의 기사가 급히 피레네 산맥으로 말을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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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이게 수정한 내용인데 원본을 그대로 올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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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대댓글을 달려고 했는데 무서운 댓글이 너무 많아서...궁금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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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추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