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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을 살아온 남자-91화 (91/217)

00091 고대의 악 =========================

고대의 악 - 1

제국을 떠난 뒤, 아크는 아무런 불빛도 없는 숲에 천막을 쳤다. 밤짐승들이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리고 뭔가가 으르렁거렸지만 아크에게 접근하지는 못했다. 그는 이불을 정돈하고 무한의 서고로 들어갔다.

트라움 제국에서의 일은 다 정리했다고 생각했지만 한 가지 짐이 남았다. 바로 챔피언에 관한 것이다. 그는 마를레네를 챔피언으로 만들었다. 덕분에 그녀는 많은 혜택을 얻었다. 엄청난 체력과 육체적인 힘, 찬란한 외모까지…

여황제 마를레네가 그토록 아름다운 외모가 아니었던들 주변 국가의 찬양과 복종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크는 챔피언을 취소해서 그녀에게 절망을 안겨주고 싶진 않았다.

‘마리는 모르지.’

다른 누구보다 아크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니다. 그녀는 아크가 주신의 그랜드 챔피언인 줄 알고 있다. 9클래스 마법도, 극한에 달한 마법공학 숙련도도, 아크가 얼버무렸기에 대충 넘어갔을 뿐이다.

만약 마를레네가 진실을 알았다고 해도 아크를 이렇게 대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녀는 아크에 대해 몰랐기에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아크는 그녀를 이해한다.

게다가 마를레네를 당장 챔피언에서 해제하게 되면 그동안 모았던 추종자가 변심할지도 모른다. 주신의 챔피언이 갑자기 확 늙어버리면 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다만 이것은 그녀에게 고통과 절망을 안겨주고 싶지 않은 아크의 핑계에 불과했다.

‘어차피 지금은 챔피언이 필요하지도 않으니까.’

아크는 이런 일을 많이 겪었고 별로 마음이 상하지도 않았다. 메마른 사막같이 되어버려 상할 마음이 없다는 게 정답이랄까. 세상에는 나르실 같은 사람도 있고 마를레네 같은 사람도 있다. 이런 사건에 일일이 마음을 쓰다 보면 버틸 수가 없다.

‘마를레네는 그렇다 치더라도 마리앤은 엄마한테서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마리앤을 올바로 교육시켰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마를레네에게서 더 깊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용사 후보생들을 규합해서 대체 뭘 하려는지 모르지만 이제 신경을 꺼야 할 때가 왔다. 마리앤은 이제 아크의 품에서 떠났으니까.

아크는 오랜만에 김치와 찌개 등으로 식사를 하고 서고에서 나와 깊은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 하품을 하며 16년 동안 모은 성과를 점검해본다.

「영향력 포인트 : 464,210보유 자금 : 88,382,364,920리블」

「초월 시스템 작동 : 추종자 95,387/100,000」

「초월 2단계 달성까지 94%(10만 명의 추종자와 영향력 포인트 50만이 필요합니다)」

‘거의 다 모았네.’

추종자를 모으는 게 쉽지 않았다. 아무리 주신의 챔피언이 있다 해도 신앙을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결정적으로 주신의 이름이 없다는 것이 걸림돌로 작용했다. 아크의 이름을 내걸 수는 없어서 다른 이름을 내걸자 추종자수가 카운트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영향력 포인트를 카운트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인 것 같았다.

그래도 16년 동안 94%를 확보했으니 이제 조금만 더 고생하면 된다. 아크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이 시스템이 자신에게 이득인가 생각해보았다.

‘초월 2단계를 달성하면…반신? 준신? 그 쯤 되겠지. 특수스킬을 얻을 수 있을 거고…어쩌면 신들을 다시 만날지도 모르지.’

아크가 스스로를 판단하기에, 현재 위치는 주신 후보생쯤 된다고 여긴다. 초월 2단계, 3단계를 거쳐가면서 마지막 4단계를 클리어하면 진정한 발리노어 대륙의 주신이 되는 것이다.

전대 주신은 그 과정에서 실패했다. 왜 실패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소멸되었고 그 육체가 지상과 어비스를 나누는 차원이 되었다. 지금은 아크에게 상당수 흡수되어 경계가 희미해졌지만.

‘나는 다른 사람과 달라…’

그는 인간으로서 살 수 없는 초월자다. 하지만 그게 아크 자신에게 있어서 반드시 이득인가는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어쩌면 초월 시스템을 포기하고 그냥 한평생을 살다 죽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괜찮아.’

감정은 닳아 없어졌지만 의지는 남아 있다. 전대 주신의 말로를 느끼고 나니 끝을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주신이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아크는 일단 주신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은 그 다음에 결정할 일이다.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세 갈래 길이 있다.

하늘정원으로 가서 실버드들과 만나는 것, 엘프랑데에 들리는 것, 그리고 클라칸 사막으로 가서 10클래스 마법의 단서를 찾는 것이다. 거리상으로는 엘프랑데가 가장 가깝지만 다루사가 기다리고 있기에 일단 하늘정원으로 가기로 한다.

‘당분간은 아랫도리 좀 가라앉히고.’

굳이 디보라가 계획한 대로 어울려줄 필요는 없다. 미와 사랑의 여신이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지만 아크는 실버드 하렘에 파묻히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 마를레네가 그렇게 변해버린 것의 반동일까?

단지 하늘정원에서 즐겁게 지냈던 그 시절을 되새기고 싶을 뿐이다. 그리운 사람들, 다루사. 라크러스…어쩌면 텔루리안까지.

‘싫으면 말고.’

싫다는 사람 굳이 품에 끌어당기지 않는다. 아크는 천막을 정리하고 길을 나섰다. 오늘만큼은 걷지 않고 하늘을 날고 싶었다. 이사 드래곤 노릇을 멈추고 집을 얻게 된 에트라곤의 둥지로 향한다.

.

.

.

달그락.

잔이 부딪친다.

마를레네는 모처럼 오랜 친구들과 함께 술잔을 나눴다. 안젤라와 에키드나다. 50대와 30대, 20대의 얼굴이 한 자리에 모여 있고 거리낌 없이 상대방을 부르지만 어색하지 않다. 마를레네는 오랜만에 약간 취해 있었다.

“그렇게 떠나버릴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아…나쁜 자식…”

“아니 뭐…마리가 떠나라고 등 떠민 거나 다름없잖아. 애들 다 키우면 떠나도 괜찮다고 했다면서? 그렇게 뒷방 늙은이 취급하면 나 같아도 떠나버리겠다. 잠자리도 안 해줬다면서.”

에키드나가 술잔을 입에 대며 마를레네를 가볍게 힐난했다. 십 수 년 동안 같이 지낸 사이라 어떤 말을 해도 부드럽게 흘려 넘길 정도가 되었다. 노인의 모습에 가까워진 안젤라는 씁쓸하게 웃었다.

“마리 너는 황제로서 입지를 굳혀 마리앤에게 넘겨준 대신 아크님을 잃었구나.”

“아니야.”

고개를 숙이고 있던 마를레네가 자세를 바로 했다. 그녀는 잔에 와인을 꼴꼴꼴 따르더니 쭉쭉 마셨다. 이 와인도 아크가 만든 술인데 별도의 브랜드화 되어 제국 내수는 물론 수십 개 왕국으로 팔려나가고 있었다.

상당히 비싼 값인데도 재고가 남아나지 않는 걸 보면 얼마나 향과 맛이 뛰어난지 알 수 있다.

“뭐가 아니야? 맞는 말인데.”

에키드나의 일침에 마를레네는 고개를 거하게 저었다. 셋만 있을 때에는 종족과 나이를 초월한다. 그리고 무슨 말이 오가건 철저히 비밀을 지킨다. 그게 이 작은 모임이 십 수 년 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다.

“그게 아니야…난…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아크가 뜬금없이 나보고 황제가 되라고 했던 날…내가 뭐라고 생각했었는지 알아? 이 남자가 미쳤나 생각했다고. 백작이라지만 일개 귀족에게 황제라니…그것도 황녀가 엄연히 살아 있는데.”

“…”

안젤라는 입을 다물었다. 당시의 일은 분명 마를레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안젤라는 혈육의 사망을 핑계로 친구에게 일을 떠맡기고 주신의 교단으로 도망가 버린 나쁜 년에 불과했다. 마를레네는 안주로 나온 치즈를 얹은 크래커를 마구마구 집어먹었다. 주신의 챔피언이 된 후로는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다.

“그의 아이를 낳고…키우고…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귀족하며…국외에서 깔짝이는 소왕국들까지.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알아? 난 이런 거 아크에게 거의 말 안했어. 마지막에 그냥…조금 얘기했을 뿐이야.”

“알아, 마리. 네가 힘들었던 거 알아.”

안젤라는 마를레네를 다독이며 응원했다. 하지만 에키드나는 제 3자의 시선에서 트라움 제국을 바라볼 수 있다. 그녀가 인간이 아닌 골드 드래곤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모두 죽고 난 뒤에도 에키드나는 여전히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관점은 둘과 다를 수밖에 없다.

이야기가 길어진다. 라이트 구체가 세 여성의 얼굴을 비춘다. 안젤라는 문득 마를레네가 부러워졌다. 50세를 넘은 나이에도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다.

완전히 20대의 얼굴을 하고 있는 에키드나만큼은 아니지만 피부는 팽팽하고 입술은 붉다. 주신의 챔피언이니 아마 죽을 때까지 저 외모로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수명도 길고…

‘나도…그 분에게…어쩌면…’

안젤라는 망측한 생각을 한 자신을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이제 할머니가 된 마당에 무슨 망상이란 말인가. 게다가 그는 안젤라의 머나먼 선조에 해당한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지만.

“에키드나, 그와 처음 만났을 때 어땠어? 우리 중에 그와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이 누구지?”

에키드나가 턱짓으로 마를레네를 가리켰다.

“너희 둘이 먼저 만났을 거야. 난 16년 전에 황궁 앞에서 처음 만났으니까.”

마를레네가 입술에 침을 발랐다.

“피레네 산맥에서 그를 처음 봤지. 그때는 그냥 근처의 지리에 밝은 사냥꾼인 줄 알았는데…어비스 게이트가 두 개나 열리고 우리가 양동에 당한 사이 그가 어떤 마법을 써서 전장 전체를 정리해버렸어. 아직까지 그 마법이 뭔지도 모르겠네.”

“어떤 마법이었어?”

“대지가 불타오르고 있었지…나중에 마법사들이 평가하기로는 6클래스의 헬 블레이즈라고 했다만 기사들은 안 믿었지. 그 드넓은 대지를 몽땅 불태울 정도였으니까.”

“…어비스 게이트에서 나온 케테르를 일거에 정리했다면 진짜 9클래스 마법인지도 모르겠네. 믿기지는 않지만.”

“그가 도망친 후에 여러모로 찾았지만 흔적을 찾지 못했지. 브레톤에서 만날 뻔 했지만 그가 나를 외면했고…그 다음에는 무지개 해안에서였나? 게티스와 사피네를 보냈는데 거기서 아크를 만난 것 같다고 했었다. 그가 부정하긴 했지만.”

“무지개 해안이라면 지금 포르투 말하는 거지?”

안젤라가 물었다. 트라움 제국은 16년 동안 엄청나게 발전했다. 과거 마을과 조선소 하나만 덜렁 있던 무지개 해안은 이제 번듯한 도시가 들어서고 성도까지 일직선으로 도로가 깔렸다.

이제 포르투에서는 대형 바우선도 아니고 신형 범선, 갤리온을 건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를레네의 장기적인 계획에 의해 동해와 북해의 탐사에 나서고자 하는 것이다.

“맞아. 예전과 비교해보면 꽤 많이 발전된 동네지. 하여튼 신기한 남자야…향신료 제도에서도 뭔가를 발견했다고 하긴 했는데 말은 안 해주고…여러모로 비밀이 많았지.”

“향신료 제도? 아아…거기 에트라곤이 있었거든.”

“에트라곤?”

안젤라와 마를레네는 처음 듣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했다. 에키드나는 자신이 알고 있는 최대한의 형용사로 에트라곤의 멍청함을 일러바쳤다. 같은 드래곤인데 이래도 되나 하고 죄책감이 들었지만 에트라곤은 욕을 좀 먹어도 된다.

아니나 다를까, 둘은 그렇게나 바보 같은 드래곤이 있다는 것에 경악했다. 아크에게 얻어맞고 징징 울었다고?

“아니, 잠깐만, 드래곤인 상태에서 아크에게 얻어맞았다고?”

“설마, 그게 있을 수 있는 일이야?”

아차. 에키드나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요 방정맞은 입이 아크의 비밀에 대해서 얘기해버리고 말았다. 에트라곤은 워낙 따돌림을 당하는 탓에 그나마 마음이 통하는 드래곤을 만나면 자신의 이야기를 한탄하듯 털어놓곤 한다. 그게 바로 알루시안과 에키드나다.

두 아낙의 협박 아닌 협박에 에키드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제 아크도 떠나고 없는데 어쩌랴.

“먼저, 에트라곤이 드래곤 중 최약체…화이트 드래곤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건 생각해줘.”

“아무리 그래도 덩치 차이가 너무 나지 않아? 에키드나 신장이 30m에 가깝다고 그랬지? 그럼 에트라곤도 비슷하다는 소리잖아.”

안젤라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마를레네도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아크가 주신의 그랜드 챔피언이라 한들, 챔피언인 자신과 육체적인 스탯이 크게 차이나지는 않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이건 뭔가.

“수십 톤은 될 드래곤을 패대기치고 두들겨 팬다고? 아크는 마법사잖아.”

“그리고 마법공학자이기도 하지. 마리, 애들은 뭐래? 아크님의 스탯 말이야.”

“…아크의 스탯은 보이지 않아. 마리앤, 루아크, 그 외의 용사 후보생들 전부 다 아크의 스탯창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랬어. 그 외는 전부 다 보이고. 심지어 에키드나까지.”

에키드나는 두 아낙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들었다. 가만 생각하면 이상하다. 주신의 그랜드 챔피언이란 게 이렇게 강한 존재였었나 하는 의심이 든다. 드래곤을 육탄전에서 압도하고, 9클래스 마법을 펑펑 써대며 골드 드래곤의 수준을 압도하는 마법공학 기술이라. 신이 아니고서야 이런 위업을 달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혹시 신 아니야?”

“뭐?”

“…”

에키드나의 농담에 응접실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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