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8 용사 탄생 =========================
용사 탄생 - 2
쌍둥이는 무럭무럭 컸다.
아크와 마를레네의 아이답게 또래를 압도할 정도로 키가 부쩍부쩍 커졌고 힘도 세었다. 겉으로 보기엔 가냘픈 10살짜리 어린애가 어지간한 시녀들보다 힘이 세니 말 다한 것이다.
어린 시절의 성향은 어디로 가지 않아서 괄괄한 여장부인 마리앤은 검술을, 루아크는 마법공학을 배우게 되었다. 마리앤은 그렇다 치고 루아크는 마법사로서의 재능도 엄청났으나 아빠인 아크가 한 말에 홀라당 넘어가고 말았다.
―지금은 마법사가 한 끗발 하는지 모르지만, 앞으로 10년, 20년만 지나도 마법공학의 시대가 올 거야. 이 아빠가 장담한다. 그때가 되면 마법공학을 권했던 아빠에게 고맙다고 생각하게 될 걸?
루아크의 아빠인 아크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라고 한다. 맨 손으로 오우거를 두들겨 팰 정도로 힘이 세었고 골드 드래곤과 마법대결을 벌여 이길 정도로 마법실력도 출중했다. 거기에 제국에서 제일가는 마법공학의 권위자이기까지 하니 루아크의 롤모델은 아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마를레네의 배에서 먼저 나온 덕분에 누나가 되어버린 마리앤은 그런 동생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했다.
―어차피 넌 나를 도와줘야 하니까, 뭘 하던 상관없어. 도망치면 죽으니까 알아서 해.
그렇다. 루아크는 마리앤에게 꽉 잡혀 사는 처지였다. 사내 녀석이 어찌 여자아이에게 붙잡혀 사느냐고 한심하게 볼 수도 있겠지만 마리앤은 루아크보다 힘이 세다. 레슬링으로 들어가면 그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처지인데 감히 반기를 들 수 없었던 것이다.
주신의 챔피언들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이가 평범할 리 없다. 육체적으로도 그렇지만 둘은 매우 특이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바로 세상을 문자와 숫자로 볼 수 있는 능력이다.
생명체를 보면 그 생명체가 갖고 있는 능력치가 왼쪽 시야에 좌르륵 나타난다. 특수한 효능을 갖고 있는 작물도 물론이다. 행동을 하면 스킬이 되고, 반복하면 경험치가 오른다.
두 아이는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이런 능력을 갖고 있었지만 아기 때에는 워낙 어려서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했다. 그저 스탯창이 신기해서 보고 있으면 어른들이 울지도 않는 착한 아이라고 껴안아줬을 뿐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두 아이들은 제대로 자신의 능력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마리앤과 루아크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둘이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희한하다. 엄마이자 황제인 마를레네의 엄청난 스탯은 보이는데 반해 아빠의 것은 아예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하네. 아빠꺼는 왜 안 보이지? 다른 사람 거는 다 보이는데.
둘은 몇 주일 동안 아빠의 뒤를 쫓아다닌 끝에 이 현상이 일시적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리고 마리앤은 마를레네와 검술 연습을 하면서 용사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마왕이란 게 있어. 우리가 가진 용사 스킬은, 마왕과 그 부하들을 때려잡기 위해서 만들어진 거야!
용사가 둘밖에 없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루아크는 머리가 명석했고 아빠에게서 주신의 육체가 희미해져 마왕들이 지상에 간섭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주신의 육체가 가진 힘의 일부가 아이들에게 부여된 것이라면, 마리앤과 루아크 이외에도 시스템이란 것을 일부 이어받은 아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어린아이 둘만의 힘으로는 정보를 입수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남매는 일단 시스템에 대한 것을 숨기고 조용히 생활하기로 했다. 루아크는 마법공학 대학에, 마리앤은 검술학교에 입학했다.
루아크는 10살짜리 어린애지만 키는 150cm에 가깝고 제법 의젓하다. 그를 처음 본 사람은 엄청난 외모에 놀라고 나이가 10살에 불과하다는 것에 두 번 놀라고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마법공학 대학에 입학했다는 것에 세 번 놀랐다.
자그마치 황제의 아들이다. 하지만 마법공학 대학을 세운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황제의 남편이자 루아크의 아빠였다. 그는 귀족이건 평민이건 공평하게 대했다. 실력이 없는 자, 마법공학 대학에 들어올 수 없다는 이 간단한 법칙은 루아크에게도 어김없이 통용되었다.
그러나 루아크는 금수저다. 어릴 때부터 마법공학의 달인인 아빠에게서 배웠고 에키드나와 같이 놀았다. 마리앤이 공을 들고 와서 같이 놀자고 소리쳤을 때에도 루아크는 에키드나와 여러 기계를 만지작거리는 걸 좋아했다.
그런 그가 10살의 나이에 대학에 입학한 것은 어쩌면 예정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제국 황자라는 높은 신분, 가냘픈 소녀를 연상케 하는 빼어난 외모, 거기에 좋은 두뇌까지…어떻게 보면 루아크의 앞날은 시원하게 뚫렸다고 할 수 있다. 원한다면 귀족가의 여식들과 얼마든지 사귈 수 있지만 그의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흥흥흥…오늘은 왠지 실험이 잘 될 것 같네.”
골드 드래곤 에키드나.
그녀는 짧은 치마에 블라우스 비슷한 옷을 입고 있다. 허리까지 한 갈래로 땋아 내린 황금빛 머리카락은 루아크의 시선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콧잔등에 얹은 동그란 안경은 그녀의 매력을 한껏 올려준다. 루아크는 그녀의 옆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예쁘다…’
황궁의 수호룡이었던 에키드나. 처음 약속했던 기간은 50년이었고 그녀도 거기에 약간 불만이 있는 듯했다. 드래곤에게도 50년이란 세월은 그렇게 짧은 시간이 아니었던 탓이다. 하지만 마법공학 대학에서의 생활이 꽤나 만족스러웠는지 요즘에는 아예 눌러앉아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다.
골드 드래곤은 원래 마법공학에 빠져 사는 종족, 마나석이 무한으로 공급되고 관련 인프라가 빵빵한 트라움에 처박힌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런 것은 루아크와는 별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그는 에키드나의 제자이고, 가족이며 친구이기도 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늘 생각한다. 언젠가 에키드나에게 고백하겠다고. 키만 큰 10살짜리 어린애가 낼 수 있는 용기의 최대한이다.
“루아크, 이것 좀 도와줄래?”
“네? 아, 넵!”
루아크는 황급히 테이블로 다가가 금속 부품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오늘 실험은 부유석을 이용해 비공정을 띄울 수 있는가 확인하는 것이다. 비공정이란 단어는 아크가 처음 만들어냈는데 하늘에 띄운 배라고 한다.
에키드나나 루아크나 배가 어떻게 하늘에 뜰 수 있는지 궁금해 했지만 부유석의 존재로 인해 의혹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부유석은 다루기도 어렵고 파편화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최근 에키드나는 부유석을 균일하게 파편화하는데 성공했다. 엄청난 스케일로 소형화시킨 비공정을 조립해 부유석을 장착, 허공에 뜨는지 실험하는 게 오늘의 목적이다.
“이게 잘 안 들어가네. 어디가 꼈나?”
‘누나 예쁘다…’
엄마 마를레네와 누이 마리앤, 기타 어여쁜 시녀들에 둘러싸여 사는 루아크에게도 에키드나의 외모는 독보적이었다. 마를레네는 엄마고, 마리앤은 맨날 자기를 때리는 폭력배이자 한 배에서 태어난 혈육이다 보니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시녀들은 아무래도 외모가 좀 딸리는데다가 교육을 엄격하게 받아서인지 그를 남자로 보지 않았다. 자연스레 루아크가 자주 접하게 되는 진짜 여성은 에키드나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에키드나가 그를 귀엽게 봐준다는 점이다. 루아크는 금속 부품의 조립을 끝내놓고 조심조심 부유석 파편을 연결했다. 오늘 작업 중에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으로 수많은 부품과 마기 로직을 물리적 마법적으로 연결해야 한다.
달칵.
루아크는 성공적으로 부유석 파편을 연결하는데 성공했다. 마법현미경으로 머리카락보다 가느다란 마기 로직을 눈알이 빠져라 쳐다본 결과다. 에키드나는 훌륭하게 작업을 끝낸 제자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다됐네. 그럼 실제로 띄워봐야지? 잠깐만…”
둘이 테이블에서 물러선다. 에키드나가 스위치를 켜자 사람 허벅지만한 비공정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무척이나 신기하기만 하다. 에키드나가 다른 스위치를 켜자 놀랍게도 뒤에 연결된 팬이 회전하더니 비공정이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루아크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든다.
“와아…”
“신기하지? 이거 너네 아빠가 만든 거야. 난 그냥 재현했을 뿐이고.”
“지, 진짜 신기하네요…”
“나도 이거 처음 봤을 때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니깐. 하여튼 너네 아빠는 대륙 최고야.”
“…”
인간은 물론 플라이 마법의 도움을 받아 하늘을 날 수 있다. 루아크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종족이지만 실버드도 하늘을 난다고 한다. 그러니까 발리노어 대륙에서 하늘을 난다는 것은 그렇게 희귀한 현상은 아니다. 무엇보다 눈앞에 있는 에키드나도 하늘을 날지 않는가.
‘그래도 이런 건 처음 보는걸.’
물건이 사람의 통제를 받아 하늘을 난다는 것은 지금까지 상상해 본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크는 그걸 몇 년 전에 해냈고 지금 에키드나가 재현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아크가 몇 백 년 전에 그걸 완성하고 처박아뒀다는 걸 알면 에키드나나 루아크나 놀라서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이걸 대형화시키면 인간도 태울 수 있겠지?”
“지, 진짜요? 크기를 키울 수 있어요?”
에키드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너네 아빠는 그게 가능하다고 하네. 다만 우리 사회가 그걸 받아들일 수준이 되지 않았다는 말만 하고 말이야.”
“응…그게 무슨 말일까요.”
“나도 몰라, 아직은. 그래도 연구를 하다 보면 깨닫게 될 거라고 하니까 믿어볼 수밖에.”
“그렇군요.”
에키드나는 갑자기 루아크의 눈높이를 맞췄다. 웃으며 작은 꼬맹이의 눈을 들여다본다. 루아크는 당황했다.
“너 누나 때문에 여기로 온 거지.”
“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다 알아, 이 꼬맹아. 너 날 좋아하는 거지?”
이런, 들키고 말았다. 루아크는 대답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술에서는 말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연하다. 에키드나는 좋은 장난감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루아크를 툭툭 건드렸다.
“요 꼬맹이가. 이래 뵈도 나는 200살을 넘었다고.”
“…”
“삐졌니? 삐졌어? 요게 누나 앞에서 삐지고.”
에키드나가 루아크를 번쩍 들어올려 품에 안았다. 그는 좋아하는 누나의 품에 안기게 된 것이 기쁘기는 했지만 그래도 토라진 모습을 끝까지 풀지 않았다. 이건 남자의 자존심이다.
둘이 그렇게 놀고 있을 무렵, 아크는 재상 집무실에서 한 남자와 아이를 보고 있었다.
‘역시, 용사 스킬을 가지게 된 아이가 한 둘이 아니었어.’
남자의 손을 꼭 잡고 있는 10살 남짓한 남자아이. 아크는 녀석의 스탯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리앤과 루아크에게서 볼 수 있는 용사 스킬을 비롯한 여러 스킬이 목록화되어 있다. 나이에 비해 체격이 크고 스탯이 뛰어나다.
이른바 용사 후보생이다. 전대 주신의 육체가 흩어지면서 이들에게 전해졌다. 대부분의 힘은 아크에게 흡수되었지만 그의 그릇이 초월자에 불과했기에 남은 여력이 대륙 전체로 흩어졌다. 그리고 얼마 후 태어난 아이들이 힘을 물려받아 아크처럼 시스템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아크의 추측이었는데 지금까지는 잘 들어맞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하나 확인해 볼 게 있다.
“얘야, 이 아저씨를 보렴. 다른 사람처럼 숫자와 문자가 보이니?”
“아니요…”
아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아크는 둘을 내보내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이로서 명확해졌군.’
시스템의 힘을 얻게 된 용사 후보생들은 자신과 다른 존재의 스탯을 볼 수 있지만 유독 아크의 스탯만큼은 보지 못했다. 아크가 초월자이기 때문이다.
반면 아크는 용사 후보생들의 스탯을 볼 수 있다. 우월이 명확하기 때문에 아크는 그들을 경쟁자로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애초에 스탯 차이가 너무 심하게 난다.
‘이대로 자라서 성인이 되어도 최대치가 마를레네 정도겠지.’
그 정도면 몬스터들을 때려잡고 힘을 모아 마왕의 의사체와 결전을 치러볼만 하지만 아크에게는 턱없이 부족하다.
지금까지 용사 후보생은 트라움 제국 전역에서 발견된 50여 명 정도다. 대륙 전역을 따진다면 더 많긴 하겠지만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아크는 그들을 이용해 마왕과 케테르를 처리할 계획을 세웠다. 그가 이렇게 나서는 까닭은 지금까지 잠잠했던 마왕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단서를 포착했기 때문이다.
‘슬슬 일선에서 물러나서 용사들에게 마왕을 맡기는 것도 좋지.’
그간 아크는 많은 일들을 해왔다. 죽여도 죽여도 되살아나는 마왕들을 상대하는 것도 솔직히 귀찮았다. 이쯤에서 은퇴해 용사들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마침 그의 두 아이도 용사 후보생이지 않은가? 트라움 제국 황가의 자손이 멋진 용사로 커 준다면 많은 용사 후보생들의 귀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리앤은 다리몽둥이가 부러져도 용사가 될 거라고 하니 역시 루아크 녀석을 황제로 즉위시켜야 하나.’
그것 또한 고민이다. 아크는 리치몬드 상단에서 보내온 보고서를 펼쳤다. 신대륙을 발견해 상륙한 바르마 제국군이 내륙 깊숙이 들어갔다가 몰살당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던 희한한 몬스터를 발견했다고 하는데 정확한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다. 아크는 보고서를 접었다.
============================ 작품 후기 ============================
옙 신문 얘기는 약간 수정했습니다.
그리고 미터법은 지루해질까봐 이야기를 안 했는데 아크의 키와
몸무게를 잘게 나눠서 잰 겁니다. 그래서 지구의 단위와는 다릅니당
옥수수 지력 문제는 그런게...주인공은 무려 대지모신 아스텔라의 축복을
받았죠. 영향력 아래에 있는 작물들은 비정상적으로 쑥쑥 자라는데
지력 문제는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고요.
이제 트라움 제국에서 하고 싶은 얘기는 거의 다 했군요. 다른거 하러 가야 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