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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을 살아온 남자-79화 (79/217)

00079 재상으로 살아가는 법 =========================

재상으로 살아가는 법 - 1

케테르 군세와의 전투는 쉽게 끝났다. 슬러스의 의사체가 한 방에 소멸되었고 그녀의 영혼은 어비스로 사출되었다. 아크는 기간틱 쇼크웨이브 해머를 발동시켜 미궁으로 변한 황궁 전체를 무너뜨렸다. 제국군과 드래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보고 있는 상태에서였다.

“황궁이 무너진다…”

“이제 제국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이대로 끝인가?”

“모르지…확실한 게 있다면 이제 제국은 저 마법사의 손에 달렸다는 거야.”

전장의 정리가 끝나고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의논했으나 딱히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 트라움 제국의 통치는 전적으로 황제에게 달려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나서서 무언가 책임을 질 행동을 꺼려했던 탓이다.

이대로 가면 제국이 분열될 위험이 있다. 아크는 보통 정치에는 개입하지 않지만 이번만은 달리하기로 했다. 마를레네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서.

“귀족정을 잠깐 폐쇄하겠습니다. 며칠간, 애쉬포드 가문의 제레미아 자작과 의논하십시오. 나는 안젤라 황녀와 함께 황제 폐하의 흔적을 찾겠습니다.”

잊고 있었던 황제의 실종. 그 누구도 황제가 살아 있으리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추측은 사실로 드러났다. 이웃 왕국과의 접경지에서, 아크는 갈기갈기 찢겨진 황제의 의복과 보관, 호위기사들의 옷가지를 찾아내었다.

안젤라의 고운 얼굴에 눈물이 어렸다.

“슬러스의 악마들에 의해 잠식당한 모양입니다. 유감입니다, 안젤라.”

“으흑…흐으으윽…”

안젤라는 세상 다 잃은 아가씨처럼 서럽게 울었다. 아크는 그녀를 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이제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다. 아버지와, 오라버니와, 태어나고 자라온 집을 말이다. 그녀는 당분간 애쉬포드 저택에서 요양하기로 했지만 제국은 새로운 권력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지.’

제국은 우두머리를 잃었다. 새로운 우두머리를 내세우기 전 정중한 의식을 치러야 한다. 아크는 트라움 제국 전통 양식대로 장엄하고도 절도 있는 장례식을 주관했다. 주변 왕국의 저명인사들도 초청하고 규모가 대단해서 귀족들이 입을 떡 벌릴 정도였다.

황제의 장례식쯤 되면 하나의 문화현상이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트라움 제국의 국력을 평가할 수 있다. 여러 왕국의 대사, 귀족들은 황금사자기사단의 철통같은 경비와 격식 있는 행사 등에 혀를 내둘렀다. 설사 그란데 황가가 멀쩡했었더라도 이런 장례식을 치를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장례식이 끝나고 타국의 귀족들이 마차를 타고 돌아가며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 보니까 제국의 힘이 여전한 것 같던데…전하께서 다소 실망하시겠군.

―권력투쟁의 모습도 보이지 않던데요. 역시 장례식을 주관한 그 아크란 마법사가 향후 중심에 서겠죠?

―7클래스의 마법사라고 하던데 그건 과장이 심한 것 같고…마법대학의 마스터 급이라고 보면 되겠지. 아무튼 요주의 인물이오.

―아무리 슬러스의 군세가 튀어나왔다곤 해도 황궁이 저 지경이 되어서야…지금은 모르겠지만 귀족들이 슬슬 들고 일어나겠지. 볼만하겠어.

당연하지만 제국의 아픔을 함께 하는 국가는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트라움 제국이 어떤 선정을 펼쳤든 간에 주변 왕국들은 피지배자의 입장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내정간섭까지는 하지 않지만 병력의 이동이나 마법사의 육성 등에서 눈치를 봐야 한다. 아브사라스 2세가 죽고 그란데 황가가 무너진 것은 그들에게 있어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그 뒤를 이을 것으로 생각되는 아크는 천둥벌거숭이로 평가되었다. 장례식은 물론 제법 훌륭하게 치렀고 마스터급 마법사이니만큼 능력도 있을 테지만 힘을 비축하고 있는 귀족들과 싸우기 위해선 아주 죽어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비로소 자신들에게도 기회가 오리라. 젠트라 왕국의 비슈비 백작은 멀어져가는 제국의 성도를 바라보았다.

장례기간 동안 폐쇄되었던 귀족정이 다시 열렸다. 황가가 무너진 만큼 트라움 제국의 유일무의한 권력기관은 바로 이 귀족정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는 황가에 다양한 의견제시를 하도록 만들어진 일종의 귀족의회이지만 지금은 치열한 권력투쟁의 장으로 변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황제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제가 없다고 해서 권력의 중심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황가에는 안젤라라는 황제의 혈육이 있다. 귀족들은 그녀가 황위를 이어받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를 둘러싼 권력투쟁이 앞으로 심화되리라. 귀족정에 참가한 귀족들은 반원형의 의회에 들어서서 착석했다. 쿠트리스 백작은 연설대로 자리를 옮기는 안젤라 황녀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황제가 너무 오래 살았어.’

거의 40이 다 된 나이에 황녀라니. 아브사라스 2세도 참 너무한다 싶다. 황태자건 황녀건 빨리 권력을 이양해 황가의 중심을 잡는 것이 황제의 역할 중의 하나다. 그는 성군이었지만 너무 일 욕심이 많았다. 쿠트리스 백작의 눈에는 늙어버린 안젤라 황녀만이 보일 뿐이다.

웅성웅성하던 귀족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안젤라 황녀가 연설문을 낭독했다.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을 통감합니다. 황궁은 무너졌고 그란데 황가는 힘을 잃었습니다. 마왕 슬러스의 출현에서 황가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마를레네 백작과, 마스터급 마법사 아크 경. 두 분의 힘으로 우리는 케테르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매우,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안젤라 황녀는 잠시 숨을 멈추고 물을 마셨다. 귀족들은 입술을 깨무는 그녀가 어떤 결심을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살이 엄청나게 빠진 것 같아 보인다. 마음고생이 심했나보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엉망으로 무너져 내린 그란데 황가를 유지할 수 없다고…트라움 제국은 보다 엄정하고 강력한 힘을 가진 자에 의해 유지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마침 우리는 전장에서 보았습니다. 빛의 날개를 가진, 주신의 챔피언을.”

귀족들의 시선이 앞의 좌석에 앉아 있는 마를레네에게 쏠린다. 트라움 제국 귀족 특유의 예복을 입고 있는 그녀에게선 날개도 헤일로도 관찰되지 않았지만 모든 귀족들은 믿고 있다. 그녀가 주신의 챔피언임을 말이다.

“본인은, 황녀 안젤라는, 황가의 마지막 일원으로서 종언을 고하고자 합니다.”

폭탄이 떨어졌다. 귀족정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은 안젤라 황녀는 고개를 숙이고 연설대에서 내려와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녀가 사라지자 다들 황당해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제국의 머리가 그대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슬슬.’

그때 아크가 나섰다. 그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연설대에 나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제국의 귀족 여러분!”

‘맙소사.’

마를레네는 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뭔가 사고를 치리라는 것은 알았지만 대놓고 저지를 줄이야. 귀족들이 어이가 없어서 그를 쳐다보았다. 아크는 귀족들의 시선을 즐기며 입을 열었다.

“안젤라 황녀…아니지. 이제 황녀가 아니시군요. 어쨌든 그 분의 입장은 모두 들으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트라움 제국의 그란데 황가는 이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허나 거대한 제국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는 법, 우리는 이 참에 새로운 기둥을 세워야 합니다.”

“그게 누구요?”

사망한 타이번 후작 외에 가장 명망있는 귀족이라면 역시 쿠트리스 백작일 것이다. 그가 묻자 아크는 마를레네를 불렀다. 그녀가 주저하면서도 앞으로 나서자 다들 웅성거렸다.

“젊고, 유능하며, 주신의 챔피언이기까지 하죠. 슬러스와의 전투에서 그녀의 무용을 잘 보셨을 겁니다. 황금사자기사단이 그녀를 지지하고 있고, 마법사까지 응원하죠. 마를레네 백작보다 더 적임자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거부하겠소.”

누군가 일어섰다. 다들 그를 주목했다. 통통한 체격을 가진 드사르 백작이다. 그는 한참동안 귀족정이 장식이 아니며, 황제 붕어라는 상황에서는 제국을 지휘할 최고권력기관이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아크는 귀를 후볐다.

“드사르 백작께는 미안하지만, 이건 권고사항이 아닙니다. 안젤라 황녀와는 이미 합의가 된 부분이기도 하죠. 제국은 애쉬포드 황가를 중심으로 새로이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건 폭거요!”

또 다른 누군가가 벌떡 일어섰다. 일어나면서도 쿠트리스 백작을 흘깃 쳐다보는 것을 보면 발언내용에 별 자신이 없는 모양이다.

“마를레네 백작이 공훈을 세웠다고는 하나! 그녀는 어디까지나 그란데 황가의 신하요! 신하가 황위를 이어받는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드사르 백작의 말대로 귀족정을 중심으로 해서…”

쿵!

그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귀족정 전체가 흔들렸다. 그가 움찔해서는 목을 움츠렸고, 귀족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크가 타이탄 해머를 꺼낸 것이다. 그 거대한 망치의 등장에는 제 아무리 강심장이라고 해도 간담이 서늘해질 수밖에 없다.

‘황궁을 일거에 무너뜨린 게 저 무긴가…’

쿠트리스 백작은 아크가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란 걸 잘 안다. 어떻게든 신격과 관계되어 있는 남자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마법사 주제에 저런 망치를 휘둘러서 황궁을 박살내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아크는 타이탄 해머의 자루를 어깨에 턱 걸쳐메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건 요청이 아니라 통보입니다. 황궁은 2개월 안에 재건될 것이며, 여러분들은 애쉬포드 황가의 신하가 될 겁니다. 그때까지 얌전히 있어주길 바랍니다. 반역자가 되기 싫다면.”

“…”

이건 협박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기세도 등등하게 부당함을 역설했던 소귀족의 얼굴에 땀이 흘러내렸다. 저 망치가 전장에서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는 모두가 안다. 스치기만 하더라도 인간의 육체 따위는 산산이 흩어질 것이다.

“모든 것을 전대 황제 이전으로 돌리겠습니다. 귀족 여러분께서는 안심하시고 업무에 전념해주시기 바랍니다. 황가에 대해선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내가 알아서 다 할 테니까.”

다들 쿠트리스 백작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섰다간 무슨 욕을 얻어먹을지 모르고 해서 제국 내에서 가장 연륜 있는 그가 한마디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저 아크라는 깡패도 쿠트리스 백작의 말이라면 조금쯤 귀담아 들을지도 모른다.

쿠트리스 백작이 마침내 아크에게 물었다.

“아크 경, 경은 제국의 무엇이오?”

“마를레네 황제를 보좌하는 재상.”

“경험은 있소이까? 마스터급 마법사이긴 하나 젊은 나이에 경험은 부족할 법한데.”

“나를 당신들의 기준으로 보지 마십시오, 쿠트리스 백작. 나는 주신의 챔피언입니다.”

주신의 챔피언이라는 게 재상의 업무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만약 마를레네 백작을 황제로 추대하고 도망가려는 심산이었다면 결사적으로 반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크는 재상을 맡겠다고 했다.

‘리치몬드 상단…그들의 안목이 옳기를 바라는 수밖에.’

대륙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럽다는 리치몬드 상단에서 아크에 대한 모든 것을 신뢰한다고 했다. 만약 그가 상단을 쓰길 원한다면, 전 재산을 투자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했다. 그런 일을 저질러도 손해 보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기에 가능하다.

쿠트리스 백작이 조용하자 다른 귀족도 입을 다물었다. 아크는 괜히 타이탄 해머로 바닥을 내려찍었다. 귀족정 건물이 흔들리다 못해 벽에 금이 갔다.

.

.

.

실버 드래곤 알루시안의 둥지. 오늘도 에트라곤은 주인이 외출나간 틈을 타 D링크에 접속하고 있다. 정신을 집중해서 통신구를 통해 의사를 전달하면, D링크에 접속해 있는 다른 드래곤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워낙 많은 마나가 드는 만큼 드래곤으로서도 장시간 대화는 불가능하지만 엄청난 중독성이 있다. 괜히 알루시안이 둥지에만 처박혀 있는 게 아니다.

“흐흐, 흐흐…”

블루 드래곤 에트라곤은 최근 기분이 좋았다. 슬러스의 의사체와의 전투에서 그가 큰 활약을 했기 때문이다. 그가 형님으로 모시고 있는 아크는 그의 활약에 만족했는지 선물을 하나 주었다.

갤러트의 망원경을 분석해 만든 아이템인데 먼 곳의 풍경을 가까이 확대할 수 있는 녀석이었다. 에트라곤은 이것으로 인간들을 관찰하곤 했다.

―슬러스의 의사체 뭐, 별거 아니던데요? 제가 참교육 시켜줬음.

―참교육? 참교육이 뭐지?

다들 에트라곤은 멍청하다고 생각해서 제대로 상대해주지 않지만 이 골드 드래곤 에키드나는 다르다. 그녀는 드래곤들 사이에서 출중한 마법공학자로 이름나 있었다.

에트라곤이 아크에게서 받은 망원경을 자랑하자 그녀가 관심을 보였다. 아크라는 마법공학자를 무지하게 만나고 싶어 했지만 에트라곤은 거드름을 피워댔다.

―어…누군가에게 주제를 가르쳐 준다는 뜻이죠.

에트라곤은 아크에게 두들겨 맞을 때를 회상했다. 분명 그는 참교육이라는 단어를 썼다. 에트라곤은 그것을 선배가 후배에게 가르쳐 준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폭력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하여튼 네가 슬러스의 의사체를 두들겼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릴. 의사체란 본체만큼은 못하지만 그래도 마왕의 분신이라고. 너한테는 무리일 걸?

―아, 했다는데 또 뭔 의심입니까. 정 뭣하면 트라움에 가서 직접 확인해 보던가요. 참고로 말하자면 아크라는 인간은 아주 성질이 더러워요. 에키드나라고 해도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뭔 소리야. 마법공학자라며? 한낱 인간일 뿐인데 왜 그렇게 쫄아?

―그게…그런 게 있다니깐 그러시네.

에트라곤의 타이핑이 느려졌다. 뭔가 자기가 큰 실수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정신을 집중한 채 마법책을 노려보자 에키드나가 쓴 글자가 도르륵 나타났다.

―하여튼 겁쟁이. 좋아. 그가 얼마나 강한지 직접 확인하겠어. 이런 걸 참교육 시킨다고 그러지?

‘어? 이게 아닌데?’

에트라곤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에키드나의 자존심을 긁었나보다. 그리고 그녀는 참교육이라는 말을 잘못 해석했다!

에키드나가 기세 등등 타이핑을 하는 동안 에트라곤은 마법책을 덮고 통신구의 스위치를 내렸다. 이불 안에서 곤히 자고 있는 알루시안을 잠시 보다가 후다닥 둥지 밖으로 튀었다.

============================ 작품 후기 ============================

추천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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