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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을 살아온 남자-71화 (71/217)

00071 다시, 그녀를 =========================

다시, 그녀를 - 3

마를레네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아크와 챔피언의 계약을 맺은 이후부터 하루하루 모습이 달라져간다. 회춘한다고 해야 할까? 옆구리와 아랫배, 허벅지 등에 달라붙었던 살들이 차츰 흔적을 감추고 있었다. 피부에는 윤기가 돌았고 20대의 날카로운 턱선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아크는 반색했다.

‘드디어 챔피언의 효과가…!’

놀랍게도 가슴은 그대로다. 그러니까 몸은 날씬해졌는데 가슴은 살찐 상태 그대로란 것이다. 그 때문에 마를레네는 가슴을 내보이는 것이 부끄러워 꽁꽁 싸매게 되었다. 아크로서는 안타까운 일이다.

“어째…살이 빠져가는 느낌이 드는데.”

“그게 챔피언의 효과야. 외모를 전성기로 되돌려주지. 힘도 엄청나게 강화됐고…지금 마리에게 평범한 마법은 아예 듣지도 않을 걸?”

아크는 마를레네에게 거울을 보여주며 달라진 점을 꼬치꼬치 알려주었다. 팔뚝만한 나무토막을 가볍게 찌부러트리고 돌멩이를 으깨는 악력은 분명히 평범한 인간의 수준을 벗어난 것이다. 마를레네는 자신의 달라진 모습에 만족해했다.

둘은 제국의 성도로 돌아왔다. 미케로 황태자는 실권도 없는 그녀가 별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인지 딱히 검문을 하지는 않았다. 아크는 삼엄한 경비를 뚫고 애쉬포드 백작가의 저택에 발을 디뎠다. 점잖은 예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청년이 반색하며 그를 반겼다.

“누님에게서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제레미아 애쉬포드라고 합니다.”

왠지 다 안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게 아크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제레미아는 아크가 저택에 들어오자마자 옆에 찰싹 붙어서는 수다를 떨어댔다. 그의 말에 의하면 누나인 마를레네가 워낙 강단이 있고 능력 면에서 먼치킨이라 일찌감치 영주의 자리를 양보하고 잡무를 맡고 있다고 한다.

“잡무는 아니고 휘하 귀족과 영지의 전반적인 행정을 맡아보고 있다. 물론 작위도 따로 있고.”

마를레네의 설명이 이어진다. 트라움 제국의 귀족들은 중앙귀족과 변방귀족으로 나눠지는데 애쉬포드 가문은 중앙귀족이면서도 특이하게 영지를 가졌다. 봉건영주처럼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고, 넓은 영지를 소작농들에게 빌려주어 소출을 받고 있다고 한다.

전대 영주는 사망한지 몇 년이 지났다. 아크는 가문의 저택에 모신 그들의 신위에 예의를 표했다. 마를레네와 제레미아는 그런 아크의 모습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애쉬포드 가문처럼 전대 영주의 신위를 모시는 가문은 거의 없고 다들 해괴한 풍습 취급하기 일쑤인데 아크는 다르다. 그는 신위를 모신 방에 들어서자마자 예의를 갖추고 허리를 숙였다. 마를레네는 새삼 가슴 벅찬 기분이 들어 시녀들을 불렀다.

“이 분을 나와 같이 대하거라. 좋은 침실을 내어드리고 두 명이 항상 붙어서 모시도록 해라. 당분간은 어떤 손님도 받지 않겠다. 올 손님도 없겠지만.”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녀 두 명이 아크에게 고개를 숙이고 졸졸 따라왔다. 아크도 나름 한 국가의 왕으로서 지낸 적이 있었기에 이런 상황이 어색하지는 않지만 오랜만이라서 미묘한 기분이 든다.

“아크님, 여기를 쓰시면 됩니다.”

시녀들이 안내한 곳은 애쉬포드 가문 저택 중에서도 두 번째로 좋은 방이었다. 그런데 위치가 요상하다. 마를레네 침실의 바로 옆이다. 게다가 두 방이 문과 복도로 이어져 있어서 아크는 그녀의 꿍꿍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언제든지 나를 덮치겠다는 거군.’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저희를 불러주세요, 감사합니다.”

시녀들은 방을 깔끔하게 정돈해준 뒤 나갔다. 아크는 오랜만에 포근한 침대에 눕게 되어 감개무량했다. 차원주머니를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누우니 천국이 따로 없다.

“허이구…좋구나…”

영감 같은 소리를 내며 잠시 눈을 감는다. 마를레네는 오늘 하루 동안은 푹 쉬라고 말했다. 아크는 마음속으로 여기에서 해야 할 일들을 점검해본다.

‘우선은 추종자 98,000명과 영향력 포인트 49만을 채워야지.’

두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선 인구가 많은 국가가 유리하다. 허허벌판에서 마법 떨어트리고 놀아봐야 포인트는 얼마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러니 당분간은 트라움 제국에서 지내야 한다.

‘마리를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교단을…’

그동안 잊혀졌던 주신의 챔피언이 나타났다는 걸 중점적으로 홍보하면 상당한 추종자를 모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선결조건이 하나 있다. 정신이 나간 것으로 추측되는 미케로 황태자를 어떻게 해야 한다. 곰곰히 생각하던 아크는 에스테뷰른 영지에서 반드시 하겠다고 마음먹은 무엇을 빼먹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 배추!’

무한의 서고에 있는 김치가 다 떨어져간다. 배추를 재배해야 하는데 이런저런 일도 있었고 너무 추워서 배추를 기를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흠흠, 애쉬포드 가문의 영지가 조금 있다고 하니 거기에서 배추를 길러야겠어.’

이것저것 할 것이 많다. 아크는 마법책을 꺼내 새로운 페이지를 열고 트라움 제국에서 할 일을 기록했다. 미케로 황태자를 족치고 아브사라스 2세를 찾는다?

‘일단 내 후손이긴 하지만 뭐랄까.’

친근감이 하나도 없다. 크리오네 그란데의 자손이 계속 이어져왔으니 아크의 핏줄이 엷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거기에 황가 특성상 방계의 핏줄이 끼어들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어쨌거나 아크는 현 그란데 황가에 별다른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차라리 애쉬포드 가문이라면 모를까.

‘안젤라 황녀는 살아있긴 하겠지?’

미케로 황태자가 얼마나 미쳐있냐에 따라 달렸다. 오늘 저녁 그에 대해 논의를 할 모양이다. 아크는 마법책을 집어넣고 정신을 집중해 무한의 서고에 들어갔다. 스탯창에서 스킬창을 따로 떼어 펼친다.

「채집 19/25lv, 재배 20/25lv, 동물지배 20/25lv, 탐색 20/25lv, 채굴 20/25lv, 수영 17/25lv 질주 18/25lv, 도약 14/25lv, 낚시 20/25lv, 목재가공 20/25lv, 조리 20/25lv, 무두질 18/25lv 거래 19/25lv, 금속가공 20/25lv, 공예 19/25lv, 봉제 20/25lv 석재가공 19/25lv, 주조 17/25lv, 야금술 20/25lv, 그림 20/25lv, 지리 20/25lv, 천문 18/25lv, 항해 16/25lv, 포격 16/25lv, 검술 20/25lv, 격투 20/25lv 궁술 19/25lv, 투척 17/25lv, 방패술 16/25lv, 도끼기술 14/25lv, 창술 15/25lv, 마법공학 20/25lv, 기계공학 19/25lv, 연금술 20/25lv, 마법 20/25lv, 마법부여 20/25lv 정령소환 18/25l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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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등 수많은 스킬 목록이 시야 빼곡히 정렬된다. 평범한 사람이 평생을 정진해도 10레벨을 오르기 어려운데 아크는 상당수의 스킬을 한계까지 올렸다. 가만,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이상한데. 20이 한계가 아니었어?’

지금까지 스킬 시스템은 20이 한계였다. 그러니까 채집을 예로 들면 19/20lv 이렇게 나타났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모든 스킬이 25로 한계가 넓어져 있었다. 초월 1단계를 달성하면서 얻은 보상일까?

‘그럼 더 올릴 수 있다는 얘기잖아?’

이제야 한계가 열렸다. 아크는 기뻐하면서도 스킬을 어떻게 올릴까 한탄했다. 1레벨에서 2레벨로 올리는 것은 비교적 간단하다. 검술을 예로 들면 2-3시간 정도 허수아비를 상대로 검을 휘두르면 올라가는 식이다.

그러나 10레벨 정도만 되어도 이건 몇 달 단위가 걸린다. 아크는 검술 스킬 19에서 20을 만드느라 피똥을 싼 적이 있었다. 거의 20년은 걸렸던 것 같다.

‘뭐 천천히 올리면 되지.’

넘쳐나는 게 시간이다. 수명도 없어졌고 여분의 생명도 사라졌다. 아크는 말 그대로의 불로불사이니만큼 시간은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 그리고 또 25레벨을 달성하지 못하면 어떤가? 아크는 강박증 환자가 아니다. 이것저것 하다 보면 한계까지 올라가는 스킬이 있을 것이다. 시간은 아크의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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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아크는 저녁 식사에 초대되었다. 원래 마를레네는 아크를 가문에서 일하는 귀족들에게 인사시키려 했지만 요즘 시절이 수상하여 그렇게는 못하고 조촐하게 동생인 제레미아만 불렀다.

꽤 신경을 썼는지 산해진미가 가득하다. 내륙에 위치한 성도에서 생선요리를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돈을 썼다는 걸 의미한다.

“아크님, 그 얘기를 좀 듣고 싶은데요. 보드게임이라고 합니까? 판자 하나 놓고 여럿이서 즐기는 놀이 말입니다만.”

“아, 그거. 마를레네가 참 좋아했었지. 실력은 영 별로여서 꿀밤을 좀 맞긴 했지만.”

마를레네가 아크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다. 그는 사실이잖아? 하고 눈을 물었다. 반박하지 못하고 사슴고기를 포크에 찍어 입가에 가져간다. 후추가 잔뜩 뿌려져 있어 풍미가 좀 이상하다.

마를레네의 동생인 제레미아는 활기찬 청년이었다. 나이는 20대 중반쯤 되었는데 남자인 자신이 백작가를 이어받지 못하는 것을 별로 괘념치 않는 것 같았다.

누이가 능력이 되고, 자신은 얽매이는 걸 싫어해서 그렇다고 한다. 원래 저택에도 들어오지 않고 다른 곳에 가 있었지만 이번에 마를레네가 요청해서 들어왔다고.

두 사람은 아크를 배려해서인지 무거운 주제를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셋 다 알고 있다. 아크가 여기로 온 이상 트라움 제국에서 벌어진 사건에 개입하리라는 걸 말이다. 마를레네도, 아크도 각각의 목적을 갖고 있다. 서로의 목적이 상충되지 않으니 잘 협력해서 일을 추진하는 게 우선이다.

식사시간이 끝나고 차와 과자가 나왔다. 제레미아가 먼저 그 이야기를 꺼냈다.

“제국의 분위기가 요즘 수상한 걸 형님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수상한 정도가 아니라 엉망이지요. 황궁은 침묵에 빠져 있고, 귀족들은 우왕좌왕 어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동생의 뒤를 이어 마를레네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그녀의 외모는 이미 20대의 그것으로 돌아가 있었다. 제레미아는 대체 아크가 무슨 짓을 했기에 누나를 이렇게 변화시켰는지 궁금해 죽겠는 얼굴이었다.

“황궁 몰래 소규모 수색대를 보낸 곳도 있다고 하더라만…폐하를 찾진 못했다. 그 분께서 실종된지도 이제 두 달이나 지났으니 슬슬 체념할 시기지.”

마를레네는 아크의 후손이 현재 황족이라는 걸 말하지 않았다. 아크의 정체는 마법도시 헤이본에서 교수를 하다 온 6클래스의 마스터면 족하다.

“안젤라 황녀는 아직까지 붙잡혀 있고?”

“2주 전까지는 그녀의 거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은 황궁이 폐쇄되다시피 해서 잘 모르겠군. 귀족정도 폐회된지 오래라서 정보가 오가지 않는다. 황태자는 모든 정보를 차단하고 있다.”

“이상한걸.”

아크의 말에 둘이 시선을 집중했다. 마를레네가 물었다.

“뭐가 이상한가?”

“미케로 황태자 말이야. 애초에 심약한 성격이었다면서?”

“심약…까지는 아니었다. 다소 내성적이라고 할까. 안젤라 황녀님에 비해 그렇다는 말이지 딱히 과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능력 면에서는 아무래도 황녀님에 비해서 뒤떨어졌었습니다.”

제레미아의 부연설명에 아크는 머릿속에서 사건을 재구성했다. 뭔가가 이상하다. 치명적인 것 하나를 놓쳤거나, 시작부터 어긋나 있다. 능력도 뒤떨어지고 성격도 내성적인 황태자가 황궁을 장악하고 황금사자기사단을 회유했다고?

“군은 어때?”

“군권은 황제 폐하의 명령에 절대적인 복종을 하게 되어 있다. 총사령관 타이번 후작은 일단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입장이지만…”

“타이번 후작이 황태자와 만나고 있다는 소문이 성도에 파다합니다. 황태자의 수완이 예상보다 좋은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능력도 뒤떨어지고 내성적인 청년이 황금사자기사단을 끌어들이고 총사령관을 회유한다고? 그건 말이 안 되는 거야.”

마를레네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잖은가.”

“두 가지 가정을 해봐야겠지. 어느날 갑자기 각성했거나, 아니면 뒤에 뭐가 있거나.”

“뒤에 뭐가 있다고? 다른 왕국들 말인가?”

트라움 제국 주위에는 여러 왕국이 있다. 거의 대부분 트라움 제국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신하를 자처하는 국가들이다. 끝내 트라움 제국을 거부하는 국가도 둘쯤 있지만 성도에서 무슨 짓을 저질러 황태자를 유혹할 정도는 아니다.

“아니, 나는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를 의심하고 있어.”

“설마, 어비스의 케테르를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 불길한 단어에 제레미아나 마를레네의 인상이 굳어졌다.

“그 악마들이 황태자께 무슨 수를 썼다고?”

“현재로선 가능성이 가장 높지…마리, 황태자의 시녀 얘기를 해줄래? 가능하면 자세히.”

“…그건 너무 참혹한 얘기라…”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아크 형님.”

제레미아가 주위를 둘러본 다음 말했다. 황궁에서 일어난 시녀 학살 사건은 성도의 호사가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황태자의 시녀가 실종되고, 어느 골방에서 단체로 죽은 채 발견되었다.

범인은 황태자인 것이 뻔하지만 누구도 그를 추궁하지 못했다. 황제가 사라진 이상 트라움 제국의 서열 1위는 황태자이기 때문이다.

“시신의 모습은 어땠지?”

“그건…”

제레미아는 한참동안 주저하다가 아크의 시선을 받고는 결국 입을 열었다. 마를레네가 한숨을 내쉬며 그릇을 정리하고 일어섰다.

“사지와…머리가 잘려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십여 명의 몸뚱아리만 남아 있었다는 말이지요. 옷은 갈기갈기 찢겨 있었고 차마 표현하지 못할 만행의 흔적이 가득했습니다. 그건 정말…아주 끔찍한…”

‘어느 놈인지 대충 알겠군.’

아크는 확신했다. 이건 색욕의 마왕 슬러스의 소행이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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