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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을 살아온 남자-62화 (62/217)

00062 에스테뷰른 백작령 =========================

에스테뷰른 백작령 - 7

아크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

속사정이야 어떻든 절대 다른 나라의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 예외는 오직 하나, 어비스의 마왕과 관련되어 있을 때뿐이다.

전쟁도 마찬가지다. 우연찮게 근처를 지나다가 포로학살 등의 현장을 발견하면 슬쩍 도움을 주는 식으로 개입하긴 하지만 전쟁의 승패에 관해서는 일절 개입하지 않는다. 물론 어비스 게이트가 열렸을 때는 제외다.

따라서 트라움 제국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크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대륙의 정 반대편에 있으니 가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말이다. 하지만 아크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이 있었으니 마를레네의 존재와 황실 그 자체다. 현 트라움 제국의 황실은 아크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모르겠다.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지 뭐.’

이미 200년이나 시간이 흘러 그들끼리 황실을 유지해 왔다. 이제 와서 아크가 개입해본들 혼란만 크게 일어날 뿐이다.

‘마를레네는…그러다가 포기하겠지.’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크를 찾고 있다지만 소득이 없으면 곧 물러갈 것이다. 닐스에게 부탁해 바르마 제국에서 아크의 존재를 지워달라고 했으므로 그녀에게 들어가는 정보는 이미 차단되었다.

시간은 흘러 겨울이 다 지났다. 리치몬드 상단에서 투자받은 돈과 떡갈나무 자재를 판매하는 돈으로 에스테뷰른 백작령에 돈이 돌기 시작했다.

큰돈은 아니지만 영지가 활기를 띠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여기저기 상인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병사들도 큰소리를 내었다. 에스테뷰른 백작령은 더 이상 죽어가고 있는 영지가 아니다.

그리고 백색성의 시녀들이 재배한 감자가 본격적으로 보급되었다. 처음에는 이 괴이한 작물을 미심쩍은 눈으로 의심했던 영지민들도 요리법을 가르치고 스테피나 휘하 백색성의 인물들이 감자를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서는 앞을 다투어 먹기 시작했다.

옆에서 누군가가 뭘 맛있게 먹으면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지 않겠는가? 영지민들은 영주가 맛있게 먹는 감자를 먹고 싶었던 것이다.

감자는 그 강인한 생명력에 걸맞게 무시무시한 속도로 퍼져나갔다. 심는 것도, 기르는 것도, 재배하는 것도 아주 손쉽다. 아주 혹독한 지역에서도 거침없이 자라는 이 작물을 영지민들은 대지모신 아스텔라의 축복이라며 기뻐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앞으로 영지민들은 감자를 주식으로 하게 될 것이다.

에스테뷰른 백작령에 문제가 하나 있다면 이 모든 것들을 아크가 해냈다는 점이다. 이런 성과에 스테피나 백작은 손 끝 하나 도운 게 없었고 그래서 아크의 존재만이 부각되었다. 스테피나의 존재는 희미해져갔고 영지민들은 아크만 찾게 되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아크님, 영주의 결재가 필요한 부분에도 아크를 찾는다. 이대로라면 끝이 없을 것 같아 아크는 스테피나를 교육시키기 시작했다. 그녀도 나름 영지민들의 태도에 충격을 받았는지 지루해하면서도 강의를 잘 듣는다.

“그런데 있잖아, 아크. 꼭 내가 이런 거 알아야 해? 아크도 있고…밑의 행정관들도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며? 알아서 하게 하고 난 그냥 도장만 찍으면 안 돼?”

백색성에도 돈이 좀 굴러오다 보니 스테피나는 슬슬 놀고 싶은 모양이다. 하긴 그게 보통 부유한 여자들의 삶이긴 하다. 바르마 제국에서 여자란 권리가 없는 대신 책임도 없다. 그래서 스테피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여자들이 대부분이고 아크는 그걸 나무라고 싶진 않았다.

“스테피나님은 백작님이시죠.”

“응.”

“즉 에스테뷰른 백작령의 주인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그런데? 라고 응답한다. 아크는 다시 그녀의 치마를 뒤집을까 하다가 참았다. 그런 충격요법은 한 번이면 족하다.

“주인이 일을 모르면 밑의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우리가 잘 모셔야지! 이러겠습니까, 백작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뜯어먹자! 이렇게 생각하겠습니까?”

“음…”

한참 고민을 하는 걸 보면 한 대 쥐어박고 싶어진다. 대체 전대 영주는 이런 것도 안 가르치고 뭐했단 말인가. 아크는 눈물을 글썽거리는 스테피나를 붙들고 한참이나 귀족의 마음가짐과 행동, 책임 등에 대해서 설교를 해야 했다.

바르마 제국에서 준귀족에 불과한 아크가 진짜 귀족인 스테피나를 윽박지르는 것도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아크는 온갖 당근과 채찍을 동원해 그녀를 교육시켰다. 마치 땡깡부리는 미운 5살 딸내미를 키우는 것 같아 속이 탄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아가씨를 사귀고 도망갔던 죗값을 이제야 치루는 것일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끔찍하다. 아크는 하루 빨리 하고자 했던 일을 하고 튀기로 마음먹는다. 스테피나는 물론 예쁘긴 하지만 별로 아크의 취향은 아니었다. 그는 좀 더 육덕지고…늘씬한 허리와 큰 가슴에다 엉덩이는 펑퍼짐해야 한다.

‘매력적인 백금발에다 눈은 에메랄드빛이 좋겠군.’

그렇게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마를레네다. 아크는 그 사실을 알아채고 굳어버렸다. 하필 여기에서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다니.

‘…제기랄.’

아크는 뒤늦게 편지를 썼다. 리치몬드 상단에 편지와 함께 마기스태프를 하나 보내 마를레네에게 전하기로 했다. 그가 만든 것들 중 상위의 성능을 자랑하는 것으로 저 멍청이 블루 드래곤 에트라곤에게 준 것보다 월등하다.

이것이 있다면 마를레네는 적어도 죽을 걱정은 하지 않을 것이다. 6클래스 마법사가 곁에 붙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

.

.

‘드디어 완성되었군.’

아크는 감개무량한 얼굴로 지도책을 살폈다. 북쪽으로 보낸 미니언들이 하나둘씩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절반은 돌아오지 못했고, 돌아온 녀석들도 상처투성이이다. 하지만 미니언들은 얼마든지 찍어낼 수 있기 때문에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바르마 제국 북방의 지형지도가 완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몬스터들의 대략적인 분포, 스노우 엘프의 위치, 바바리안들의 현황까지 기록되어 있다. 아크가 직접 갈수도 있지만 여러 일로 인해 못 가게 되어 미니언들을 보낸 것이다. 50기를 잃은 결과가 여기에 있다.

‘오, 화염계 마나석 광맥이 있군.’

뿐만 아니라 몇 개의 광맥을 찾았다. 이것들은 에스테뷰른 백작령의 귀중한 자금원이 되어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다. 아크의 관심사는 오로지 글로리어스의 성물 글램이 어디 갔나 하는 것이다.

리치몬드 상단에 정보를 요청했으나 그들도 모른다고 한다. 스노우 엘프와도 교류하는 그들이 바바리안 만큼은 손사래를 치는 걸 보면 진짜 말이 안 통하는 것 같다. 아크는 그들과 직접적으료 교류한 적이 없었기에 약간의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호기심은 바로 행동으로 이어진다. 아크는 스테피나에게 휴가를 받아 북벽으로 향하고자 했다. 그녀는 절대 말없이 혼자 떠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서야 바지자락을 놓아주었다. 얼마나 세게 잡아당겼는지 하마터면 내려갈 뻔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크님.”

아크는 북벽을 관리하는 병사들로부터 정중한 대접을 받았다. 영지에 도는 활기는 북벽에도 어김없이 전해져 그간 받지 못했던 보너스까지 두둑하게 탔다고 한다.

게다가 감자의 보급으로 인해 가족들이 토실토실하게 살찌니 병사들의 마음은 절로 훈훈해질 수밖에. 아크는 새삼 돈이라는 괴물의 위력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몇 푼이지만 이들에게는 매우 소중하다.

대접이 바뀐 것은 기사 돌로든도 마찬가지였다. 사령관실은 예전과 달리 따뜻했으며 차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그는 아크에게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사정이 좀 좋아지다보니.”

“이해합니다. 사령관, 저는 영주님의 명을 받고 북벽 너머의 바바리안들을 살펴보러 왔습니다. 그들과 접촉할 수 있습니까?”

“접촉…? 지금 바바리안들과 접촉하겠다고 하셨소?”

“그렇습니다. 제가 찾는 것을 그들이 갖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게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야 합니다.”

“그게 뭐인지는 모르겠지만 포기하는 게 좋을 거요. 물론 수석행정관께선 수완이 좋지. 5클래스의 마법사이기도 하니 전투에서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기도 할 거고. 그러나 그치들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마시오. 그들은…”

그때 큰 소리가 들렸다. 병사들이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댔고 벽에 뭐가 와서 부딪쳤는지 들썩거렸다. 돌로든은 아크에게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놈들이 만든 공성추요. 북벽을 부수겠다고 저러고 있소. 저래봐야 제대로 뚫지도 못하지만.”

“가봐야겠군요.”

“안 보는 게 좋을 텐데.”

돌로든은 일어서서 아크를 안내했다. 북벽 위에서 아크는 활을 겨누고 있는 병사들과 함께 서서 밑을 내려다보았다. 수십 명의 바바리안들이 큰 나무기둥을 북벽에 때려 박고 있었다. 아주 원시적인 공성추다.

“개량이 좀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

아크의 혼잣말에 돌로든이 거들었다.

“공성추에 대해 좀 아시나보군. 바퀴를 달아야 파괴력이 증대될 텐데 저렇게 어깨에 메는 수준이어서야…”

바퀴를 못 다는 이유야 간단하다. 북벽 너머의 땅은 평탄하지가 않아 도저히 바퀴를 달아서 운용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완충장치가 나름 중요한데 바바리안의 기술 수준으로는 그걸 만들기가 어렵고 덕분에 저렇게 인력으로 운반할 수밖에 없다. 있는 힘껏 부딪쳐 봐야 벽돌 몇 장 부수는 선에서 끝난다.

“그런데 저렇게 농성하는 이유는 뭐랍니까?”

“겨울이 곧 끝나가지 않소? 가을까지 비축한 식량이 바닥나는 시기지. 조금 있으면 또 식량을 비축할 시기가 오지만 그 인구를 부양하려면 먹을 것이 부족하오. 한두 달, 그 사이에 바바리안 인구의 5%는 줄어들지.”

그러니까 저들은 비축한 식량을 모두 소모한 것이다. 북벽에도 나름 사냥감들이 많지만 저들은 몬스터와도 경쟁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매우 치열한 삶을 살고 있다. 돌로든은 제국의 누군가가 바바리안에 대해 기록한 것을 읊어주었다.

“평균 수명은 35세가 채 안된다고 하지. 아이는 많이 낳지만 몇 달도 되지 않아 죽는 경우가 부지기수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식량 수급에 투자하는데도 생존이 어렵소. 저 위쪽은 여기보다 더 춥기 때문에.”

피레네 산맥보다 더 혹독한 추위를 자랑하는 곳이 바로 바바리안과 스노우 엘프가 살고 있는 곳이다. 아크의 지식에 의하면 저기는 갈란테 행성의 북극에 가깝다.

“아무튼 식량을 내놓으라는 소리군요.”

아크의 말에 돌로든은 픽 웃었다. 당연히 아크를 비웃는 건 아니고, 저 멀리 어딘가의 바바리안 족장을 향한 것이다.

“내부단결을 위한 거요. 저렇게 농성한다 해서 우리가 북벽을 여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이오? 저들로서도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우리가 어렵지만 북벽을 뚫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니 조금만 참아 달라…휘하 족장들에게 이렇게 말할 꺼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소이까.”

만약 아크가 대족장이었더라도 이러한 행동을 했을 것이다. 그들은 주어진 환경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추위, 몬스터, 기아, 질병 등과 끊임없이 투쟁해 나간다. 그러면서도 인구가 줄지 않는 것을 보면 생각보다 종족 보존에 애쓰는 사람들인 것 같다.

아크는 매의 눈 스킬을 사용해 바바리안들을 훑어보았다. 바바리안, 즉 야만인이라고 하면 보통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전사를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의 생김새는 거한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몸은 식량을 많이 요구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도태된다.

따라서 바바리안의 대다수는 비교적 작은 체격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온 몸에 근육이 가득하다. 짐승의 가죽옷을 입고 허리에는 도끼를 찼다. 입으로는 연신 가쁨 숨을 퍼올리며 공성추를 움직이고 있었다. 아크는 그들에게서 작은 감동을 받았다. 정말이지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자들이 아닌가.

‘괜찮군.’

아크는 북벽에서 뛰어내렸다. 돌로든과 병사들이 미처 말리기도 전에 몸이 바닥에 내려앉았다. 위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지만 아크는 허벅지까지 쌓인 눈 위를 걸었다. 워터 워크 주문이다.

“마, 마법사다!”

“마법사! 피해라! 피해라!”

바바리안들이 공성추를 내던지고 좌우로 피했다. 날이 잘 선 도끼를 양손에 쥐어 순식간에 포위했다. 아크는 그들의 눈에서 뜻밖의 감정을 읽었다. 분노가 아니라 두려움이다.

‘왜지? 아…스노우 엘프와 많이 싸운다고 했었지.’

빙결마법에 일가견이 있는 스노우 엘프와 자주 부딪친다면 마법에는 아주 치가 떨릴 것이다. 저 높은 북벽 위에서 떨어진 것과 호위병도 없이 나선 것으로 마법사라고 판단한 것 같다. 아크는 두 팔을 벌리며 그들에게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표현했다.

“제 이름은 아크라고 합니다. 여러분께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마법사! 마법사의 말을 믿으라고?”

“간교한 혀에 현혹되지 마라! 모두 귀를 막아!”

‘이런 제기랄. 대체 어떻게 당한거야?’

보아하니 스노우 엘프에게 호되게 당한 모양이다. 눈을 부릅뜨고 아크의 손짓 하나하나를 감시하고 있었다. 정작 마법을 발현하는 것은 의지 그 자체인데도.

아크는 하는 수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저는 글로리어스의 성물 글램을 찾고 있습니다. 그게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그걸 네놈에게 알려줄 것 같으냐!”

“네놈이 우릴 죽인다 해도 그걸 찾진 못할 것이다!”

‘아하, 저들이 갖고 있었군.’

만약 아크였다면 그게 뭐냐는 식으로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바리안들은 아크에 대한 적개심을 표현하느라 본심을 말하고 말았다. 글램이 없다면 저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아크는 지도책을 꺼내 살폈다. 바바리안들이 어이없어하는 찰나, 그가 책을 차원주머니에 넣었다.

“푸른 늑대 부족이군요. 위치는…잘 알았습니다.”

“뭐, 뭐라고?”

바바리안들은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푸른 늑대 부족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그들은 작은 골렘들이 영역을 살피고 지나갔다는 건 꿈에도 알지 못할 것이다.

‘글램의 위치를 찾았다.’

초월 시스템 작동을 위한 마지막 퍼즐이 맞춰지기 직전이었다. 아크는 플라이 주문으로 날아올랐다.

============================ 작품 후기 ============================

실은 토일동안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그래서 비축문을 소모했죠 음하하!

제길 이제 꿈도 희망도 없어 ㅜㅜ

참 마를레네는 스쳐 지나가는 히로인 1이 아니라 꽤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봐야 이 글의 방향성에 큰 지장은 주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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