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5 날개를 가진 종족 =========================
날개를 가진 종족 - 11
다시 장로회의가 열렸다. 초월기사들이 참석했고 텔루리안은 샅샅이 계시받은 것을 고했다.
그러나 장로들이 어찌 그녀를 추궁할 수 있을까. 미와 사랑의 여신 디보라. 네 장의 날개를 가진 그녀가 텔루리안에게 헤일로로서 역사했다. 몇 명의 증인이 있는 만큼 장로들은 거짓이라고 외칠 수 없었다.
창조신의 계시는 받아들여졌다. 아크는 늙수그레한 한 노인의 부탁에 그냥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아크보다 젊은 사람이지만 여기서 그걸 티낼 수는 없다.
“언젠가 귀인께서 다시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꼭 돌아오겠습니다.”
신격을 얻는다는 것은 아마도 아크가 성물을 다 모으고 영향력 포인트 10만을 모으는 초월 시스템을 얻는다는 말과 동일한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는 모르는 거니까.’
실버드의 수명은 앨프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100-150세 정도는 된다. 그들은 아크가 돌아올 때까지 살아 있을 것이다.
“귀인께 마냥 부탁하는 것도 좀 그러니 저희 나름대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아크는 장로들의 손에 이끌려 북쪽 지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밑으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우우웅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것은 하늘정원을 통째로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부유석이었다. 거의 산만한 부유석이 푸른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 주위에는 부유석 조각들이 많지요. 귀인께서 혹시 필요하다면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아크는 미니언들을 동원해 주위의 부유석을 싹싹 쓸어 담았다. 어차피 실버드들은 마법공학을 모르기 때문에 쓸모가 없고 팔수도 없다. 마법공학자라고 해서 이걸 이용하진 못한다. 대신 나중에 돌아왔을 때 그들에게 괜찮은 아이템들을 선물해 주기로 마음먹는다.
‘부유석 조각들이라, 쓸만하겠군.’
특히 마법공학 분야에서 부유석이 쓰일 구석이 제법 있다. 다른 사람들은 부유석을 알기는 하지만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를 모른다. 아크가 부유석을 퍼트리지 않았기에 모르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현시대 마법사와 마법공학자, 기타 기술자들은 아크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 530년이 넘는 세월동안 대륙을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면서 기술을 전수해 주었으니까.
아크는 장로들과 헤어져 지상으로 나왔다. 디보라의 성물도 얻었고, 그녀의 계시도 알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신변을 정리하고 바르마 제국으로 떠나는 것이다.
‘그 전에…’
여기에 와서 그에게 안긴 귀여운 여인, 다루사와 할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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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렇게 포즈를 취하면 되는 건가요?”
“예. 좋습니다, 다루사, 아주 예쁩니다.”
벌거벗은 다루사가 호수에 앉아 있다. 그녀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빙결의 최하급정령이다. 아크가 불러낸 그들은 불쌍하게도 다루사의 엉덩이와 다리를 받치고 있었다. 모델이 가라앉으면 그림이 안 되니까.
은색 단발머리에 가느다란 목선, 쇄골이 살짝 드러나 보이는 얇은 어깨선이 아크의 시선을 자극한다. 적당한 크기의 가슴에 예쁜 유두, 그리고 허리선까지. 다루사는 아크의 요청에 의해 호수에 길게 드러누웠다. 누우면서도 차가운 물의 감촉이 익숙해지지 않는지 깜짝 놀라는 모습이 귀엽다.
아크는 수많은 여인의 누드화를 그려왔다. 당연히 모두 허락을 받고 그린 것이고, 무한의 서고에 있는 한 창고를 잘 뒤져보면 수백 장 정도는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우울한 것도 있고 해서 잘 그리지 않았지만 날개를 가진 다루사를 보니 갑자기 그리고 싶었다. 일단 모델이 되니까.
“다루사, 이번에는 저에게 등을 돌리고요.”
“…엉덩이 너무 크게 그리면 안 돼요?”
다루사가 새침하게 돌아앉는다. 얌전하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린다. 아크의 시선에는 그녀의 작은 발바닥과 엉덩이, 허리와 상체가 보인다. 무엇보다 그녀의 키보다 더 큰 하얀 날개가 쫙 펼쳐진 것이 화려하다.
‘멋지군.’
다루사가 살짝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린 것이 포인트다. 아크는 그런 식으로 세 장의 누드화를 그렸다. 다 됐다고 말하자 그녀가 호수 위를 종종걸음으로 걸어와 그림을 들여다본다.
“가슴 너무 큰 거 아녜요?”
“이 정도면 딱 맞죠.”
“엉덩이 너무 펑퍼짐해요…”
“원래 종아리 깔고 앉으면 그렇게 보입니다.”
“흐으음…”
다루사는 부끄러움도 없는지 알몸으로 아크의 옆에서 조잘거리다가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좋다. 그의 곁에 계속 있고 싶다. 그리고 아이를 낳고…가정을 꾸려…
‘아니야.’
이 모든 바람이 부질없다는 걸 알고 있다. 다루사도 눈과 귀가 있어서 장로회의에서 나온 결과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실버드의 창조주 디보라의 계시. 거기에 의하면 아크는 특별한 기준으로 선별된 실버드와 동침해 아이를 낳아야 한다.
‘그 말은 아크가 특별하다는 거지! 응응.’
다루사는 아크와 만나고부터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더 이상 하늘정원에서 사는 것이 두렵지 않다. 그녀는 초월기사로 복권되었고 다른 실버드와의 관계도 점차 나아질 것이다.
다만 다루사에게 두려운 것이 있다면 아크가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것이다. 때가 되면 이라고 했는데 그게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아크조차도 모른다고 하니 다루사의 여린 가슴이 탈 수밖에.
다루사는 별안간 아크의 품에 덥석 안겼다. 의자에 앉은 아크에게 올라타 목을 감쌌다. 아크는 그녀의 허리를 안고 엉덩이를 토닥여 주었다.
“아크, 갈 거죠?”
“가야죠.”
“어디로 가요?”
“아마 바르마 제국…클레드에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저도 따라가고 싶지만…참을게요. 따라가면 안 된다는 거 아니까.”
“다루사.”
아크는 그녀를 꼭 끌어안고 입을 맞춰주었다. 이제 헤어지기라도 하는 듯 그녀가 안에 파고들며 키스에 호응했다. 혀와 혀가 뒤엉키며 농밀한 입맞춤을 이어나간다. 마침내 긴 키스가 끝내고 다루사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하나는 약속해줘야 되요, 언제고 꼭 돌아온다는 거.”
“약속합니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 안기 전에…제가 먼저라는 거.”
“물론이죠.”
아크가 싱긋 웃었다. 다루사는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가슴에 볼을 기대었다.
“아크가 실버드였다면 좋았을 걸.”
그녀도 알고 있다. 아크는 계속해서 하늘정원에 머물 수 없다는 걸 말이다. 디보라의 계시도 아이를 얻으라는 거였지 눌러앉게 하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아크를 따라나서는 것은 너무 무섭다. 그녀에게 있어 세상은 하늘정원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실버드에게 있어 하늘정원이란 태어난 요람, 살아갈 터전, 마침내 생을 다해 묻히는 관이나 다름없다. 아크는 그게 안타까웠지만 그것이 그들의 삶의 방식이므로 간섭할 권리는 전혀 없다.
‘모르지, 언젠가 바뀔 수도.’
발리노어 대륙도 지구처럼 문명이 발달할 것이다. 언제고 실버드들도 덩치가 커져 둥지에서 나와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거기에 아크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걸로 좋다.
두 연인은 한동안 행복하게 껴안고 있었다. 다루사의 얼굴에서 이별을 슬퍼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이해하고 있었다. 아크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며 신과 관련된 어떤 존재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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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한 달 동안 아크는 거의 실버드와 동일한 대우를 받았다. 검술을 가르쳤고, 훈련도 했으며 밥도 같이 먹었다. 밥을 먹는다는 것은 비단 실버드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아인종에게 있어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같은 울타리 안에 들여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크는 날개 없는 실버드로 대우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대한 답례랄까, 아크는 여러 요리를 그들에게 전수했다. 쉽게 구하는 재료로 간단하게 요리할 수 있는 것들로.
작은 시계탑도 세워주었다. 마나석을 장착해 반영구적으로 움직이는 시계를 나무틀 위에 장착했다.
“아, 저 이거 테펠린에서 봤어요!”
실버드들이 모여들어 시계를 구경했다. 발리노어 대륙에서도 지구와 마찬가지로 시간을 나타내는 데 24시간 주기를 쓴다. 다만 정확히 측정하는 방법이 없어 동이 트면 아침 6시이고 노을이 지면 저녁 6시라고 구분하는 식이었다. 당연하게도 시간이 들쭉날쭉하다. 여름은 낮이 길기 때문이다.
그러던 시간관념이 완전히 바뀌었다. 아크는 마법공학을 연구해 마나석이 전기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알아내었다. 수많은 기계적인 장치와 태엽, 나사 등을 동원해 시계를 만들었고 이를 전 대륙에 퍼트렸다. 실버드들이 바르마 제국에서 본 시계탑도 아크가 전수해 준 기술로 만든 것이다.
‘제국도 아직 발전이 요원하지만.’
오히려 후퇴한 분야도 있다. 아크는 실버드들에게서 바르마 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상세한 것은 그들도 모르니까 대략적으로 전해 듣는 식이다.
‘봉건제, 영주, 통제, 북벽…’
트라움 제국과 비교했을 때 바르마 제국은 사회문화적으로 50년 정도는 뒤떨어져 있다. 아크가 기술을 전수했음에도 그걸 제대로 이용할 생각은 않고 자기들끼리 아웅다웅하다가 폐기해 버렸을 가능성이 높다.
아직까지 봉건제가 유지되고 있다는 게 그 증거다. 트라움 제국은 진즉 절대왕정제로 이행한지 오래인데 바르마 제국에는 봉토를 가진 귀족이 꽤 많이 발견된다. 최근에는 가보지 않아서 정확하지만 않지만 들려오는 소문을 종합하면 그렇다.
말하자면 바르마 제국은 봉건제와 절대왕정제를 섞은 국가라고 할 수 있다. 황제라는 자리와 국명은 트라움 제국을 따라했을 확률이 높다.
‘일단 가보긴 해야지.’
아크는 한 달이라는 시간을 충실히 보냈다. 실버드들이 어떻게 식량을 조달하는지 배웠고 평일에는 무엇을 하는지, 또 어떻게 아기를 키우는지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그의 미르위키에 기록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별의 날이 왔다. 아크는 다루사를 안아주며 언젠가 돌아오겠다고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그녀는 조금 훌쩍거리긴 했지만 아크를 붙잡지 않았다. 그의 운명을 알아차린 것처럼.
“잘 가요!”
“또 오세요!”
“갑니다!”
플라이 주문으로 하늘정원에서 떠난다. 수많은 실버드들이 그를 배웅했다. 텔루리안은 서운한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계시를 받은 그날 이후, 언제나 몸을 청결히 하고 얌전히 지냈건만 그는 결국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갔어야 했을까.’
다루사에게 눈치가 보여서 차마 그러진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계시를 받은 이상 텔루리안은 거칠 것이 없어졌다. 아크가 돌아오면 그는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다.
“꼭 와야 해요!”
아크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평온한 손짓이 왠지 괘씸해진 텔루리안은 우렁차게 고함을 질렀다.
“안 그러면 제가 당신 찾아갈 테니까!”
아크는 하마터면 하늘에서 떨어질 뻔했다. 다루사가 열심히 손을 흔드는 모습이 눈에 뜨인다.
‘제시카와는 다르구나.’
그녀는 아크를 만나기 전까지는 산골 아가씨였다. 하지만 다루사는 망가지긴 했지만 한 때 실버드의 초월기사였다. 이제 힘을 되찾고 나자 예전같이 우울한 구석은 거의 사라졌다. 아크를 보낼 때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린 걸로 끝이다.
그래서 아크의 마음이 한결 가벼운지도 모른다. 아마 그녀가 끝까지 아크의 바지자락을 늘고 붙들었다면 이렇듯 홀가분하게 떠나지는 못할 것이다. 아크는 실버드들에게 인사하고 하늘정원을 떠났다. 바르마 제국에 도착하려면 길을 재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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