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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을 살아온 남자-53화 (53/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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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를 가진 종족 - 9

이건 아무래도 이상하다.

방금의 일격을 피해선 안 되는 거였다. 실버드의 날개를 이용한 공격은 속도가 매우 변칙적이다. 정령의 도움을 끊고 공기저항을 최소화해 적에게 일적선으로 내딛는 일격은 바르마 제국의 기사가 할지라도 피하기 힘든 공격이다. 즉 마법사인 아크가 피해선 안 되는 거였다.

하지만 피했다.

그것도 너무나 간단히 공격을 피해버렸다. 사력을 다해서 피해 헉헉거리고 있나? 그건 아닌 것 같다. 그 증거도 아크는 텔루리안의 후속 공격을 쉽게 피하고 있었다. 손에 든 검이 무색하게도.

‘내 공격이 읽히고 있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텔루리안은 그런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방금의 도움닫기 공격, 아크의 허벅다리를 노리고 벤 공격을 그는 마치 물 흐르듯 연속된 동작으로 피해냈다. 아크의 움직임은 텔루리안에게 생생하게 잘 보이고 있었다. 마치 피하는 걸 보라고 움직이는 것 같다.

‘아니, 공격이 읽히는 것뿐만이 아니라.’

다시 돌진공격을 가해본다. 준비동작도 없이 팔이 쭉 뻗어지며 검이 앞으로 쏘아져나갔다. 아크의 몸이 있어야 할 곳에는 그의 잔상만이 남았다. 그녀가 여기로 공격을 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어찌 이리도 쉽게 피한단 말인가.

‘이게 아닌데.’

비록 텔루리안이 사력을 다하고 있지 않다고는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는 인간, 텔루리안은 실버드가 아닌가. 인간에 비해 실버드가 더 힘이 세고 민첩하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렇기에 저 바르마의 기사들도 초월기사를 경배하지 않는가.

너무 쉽게 피한다.

최소한의 스텝으로 그녀의 공격을 피하는 걸 보면 체력 소모도 없는 것 같다. 오죽하면 텔루리안이 압박감에 지쳐 가쁜 숨을 내뱉겠는가. 더 지치면 이제 텔루리안은 볼썽사납게도 검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건 지켜보고 있는 동료들에게 부끄러운 일이 된다.

그리하여 텔루리안은 약속을 깨고 전력을 다하게 되었다. 아크에게 미안한 마음이 살짝 들었지만 그가 상황을 이렇게 만든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그건 텔루리안이 아크에게 가진 복잡다단한 마음에 기인한다. 나를 이렇게 흔든 당신이 잘못한 거야, 라는 얼토당토 않은 생각.

쏴아아앗!

검끝이 공기를 가른다.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날카로운 기세. 텔루리안의 몸이 바람의 정령의 도움을 입어 살짝 떠오르더니 일직선으로 하강했다. 거리를 단숨에 좁히는 이 방법은 실전에서나 쓰는 위험한 기술이다.

‘핫.’

텔루리안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이걸 아크에게 쓰면 안 되는 거였다. 날개근육에 힘이 붙으며 어깻죽지로 의식이 전달되었다. 내뻗은 손을 회수하려 애썼지만 검끝은 이미 아크의 목을 향하고 있었다. 거기에 바람의 정령이 검을 날려 보낸다.

‘아, 안 돼!’

공중강습에 더해 검을 날리며 10m나 되는 거리를 1초도 지나지 않아 돌파했다. 평범한 인간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기사조차도 절대 피하지 못할 엄청난 속도다. 하지만 아크는 텔루리안이 공격을 하기 전부터 그걸 알고 있었다.

‘맞아줘도 괜찮지만 그건 너무 비참하지.’

검에 찔려도 아무렇지도 않은 신체란 걸 굳이 드러내서 그녀를 좌절시킬 필요는 없다.

아크는 상황을 좋게 끝낼 방법을 찾는다. 찾았다. 1초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에 판단을 끝내고 쏘아져 오는 검의 자루를 잡았다. 텔루리안의 눈이 점점 커지는 찰나, 아크는 그녀의 기세를 흡수하며 부드럽게 멈춰 세웠다. 그녀가 다칠 것을 우려하여 충격을 몸으로 받아낸다.

“아!”

텔루리안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그녀가 쏜 검은 아크의 오른손에 붙잡혀 있고 자신은 아크에게 반쯤 안겨 있다. 그가 허리를 안은 채로 물었다.

“괜찮습니까?”

“아…그, 그게.”

대체 무슨 말을 할까. 텔루리안은 쪽팔려 죽을 것 같았다. 아크를 이렇게 올려다보는 것도 그녀를 좌절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의 공격이 완전히 파훼되었고 무력하게 잡혔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력을 다한 검까지 그의 손에 잡혀 있다! 이건 아크의 실력이 텔루리안의 그것을 압도적으로 상회한다는 증거다.

이런 결과가 나와버리자 근처에서 대련을 구경하던 실버드들이 웅성거렸다.

“봐준 거 아냐?”

“마지막 공격을 봐주고 한 거라고? 텔루리안의 장기인데?”

“그게 뭐였던지 확실한 건 아크가 텔루리안을 완전히 갖고 놀았다는 사실이야.”

“마법사 아니었어? 마법사가 어떻게 저런…”

“아니, 난 이제 아크가 인간인지조차 진지하게 의심이 되기 시작하는데.”

웅엉웅성 믿기지 않는다는 듯 얘기를 나눈다. 그러나 실버드들이 하는 얘기가 외부로 빠져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그런 종족이니까. 아크는 텔루리안을 일으켜 준 다음 검을 쥐어주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아기 취급받고 있다고 생각하곤 얼굴을 붉혔다.

‘안 되는구나.’

그녀는 바보가 아니다. 아크가 어떤 의미에서건 자신을 봐줬다는 걸 알아차릴 정도의 지능은 되었다. 왜? 라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텔루리안이 아크에게 가진 감정 속에서 열등감은 사라지고 새로운 무엇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원형 경기장 바깥에서 소란이 들렸다. 몇 명의 실버드가 날아와 긴급소식을 전했다.

“드, 드레이크! 드레이크가!”

“뭐? 드레이크? 어디에? 여기로 접근하고 있습니까?”

“빠르게 접근하고 있어요! 저쪽!”

비상이 걸렸다. 드레이크는 날개 달린 몬스터 중에서 사실상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한다. 드래곤과 비슷하지만 몸집이 약간 작고 마법을 쓸 줄 모른다. 지능도 낮아 아인종과 소통하기는 글렀다.

카테고리 6의 몬스터답게 큰 몹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육탄전과 파이어 브레스는 대단한 위력을 자랑한다.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100살도 채 먹지 않은 녀석들은 드레이크에게 덤벼들지 못한다. 워낙 맷집이 두껍기 때문이다.

하늘정원을 공격해오는 몬스터 중에서도 드레이크는 최악이다. 그리고 놈들의 공격은 대부분 피를 부른다. 드레이크를 피해 없이 막아낸다는 건 좀처럼 상상하기 어렵다.

“아, 아크! 염치 없지만…우리를…!”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는 텔루리안. 방금 전 전력을 다해 공격했다는 죄책감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아크는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레이크라. 오랜만에 보는군요. 가봅시다.”

“아, 네!”

다행히 그는 텔루리안의 공격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둘을 따라 실버드들이 일제

히 날개를 펼쳤다. 카테고리 6 몬스터 드레이크의 접근은 초월기사들이 모두 달려들어야 할 정도로 위협적이다.

아니나 다를까, 드래곤의 형상과 매우 닮은 몬스터가 하늘정원의 근처를 비행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드래곤과는 약간 다르다. 앞발이 매우 길고 몸통은 날렵하다. 드래곤의 특징인 뿔은 거의 나 있지 않고 돌기 비슷한 것만 이마에 솟아 있다.

길이 20m에 육박하는 비행형 몬스터가 바로 드레이크다. 지상에서 녀석을 상대할만한 녀석들은 좀 있지만 하늘에서는 드래곤을 제외하면 존재하지 않는다. 녀석의 노란 눈이 실버드들을 훑었다.

‘드레이크라…’

아크의 시선이 드레이크의 스탯창을 살핀다. 체력과 물리내성, 마법내성이 인상적이다. 화염의 드레이크답게 화염저항이 70에 달하고 있었다. 녀석에게 파이어볼을 던져봐야 제대로 데미지를 입히지 못한다는 뜻이다.

거기에 지상의 대형급 몬스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힘과 체력이 높다. 마나는 낮아서 화염 브레스를 오래 쏘지 못한다는 게 유일한 단점이랄까.

아크는 일단 실버드들이 드레이크를 어떻게 상대하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멀리에서 개인 배리어를 펼쳐주면 죽지는 않을 테니까.

“놈이 공격해온다! 화염 브레스에 주의해서 접근!”

텔루리안이 지휘권을 발동했다. 그녀의 지시에 따라 수십의 초월기사가 일제히 하늘정원에서 떠올랐다. 드레이크가 멀리서 그걸 보곤 눈알을 굴렸다. 브레스를 뿜을지 더 접근할지 판단하는 듯하다.

“실피드!”

바람의 중급 정령 실피드 여러 개체가 소환되어 날개를 휘젓고 있는 드레이크에게 육박했다. 돌개바람이 일어 놈의 균형을 어지럽혔지만 그것뿐이다. 드레이크에게 실질적인 위협을 가하려면 상급 정령 정도는 되어야 한다. 놈이 콧김을 내뿜으며 머리를 뒤로 물렸다. 긴 주둥이가 벌어지며 촘촘한 이빨이 드러난다.

“화염 브레스 주의! 산개!”

콰아아아―

텔루리안의 말이 끝나자마자 녀석이 화염 브레스를 뿜었다. 마치 불의 폭포같은 그것은 길게 뻗어 한 무리의 실버드들을 덮쳤다. 한 초월기사가 날개를 접고 급강하했지만 그게 실수였다. 드레이크가 갑자기 화염 브레스의 방향을 틀어버린 것이다.

“아, 아!”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그는 자신에게 닥쳐오는 화염 폭포를 바라보며 전의를 상실했다. 이제 피하기엔 너무 늦었다.

“헨시드!”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가 화염 브레스에 직격당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영롱한 빛깔의 불투명한 배리어가 화염 브레스를 가로막은 것이다. 어찌나 튼튼했던지 드레이크가 쏜 브레스가 털끝도 그을리지 못하고 옆으로 분사되었다. 그걸 지켜보던 실버드들이 감탄을 터트렸고 드레이크를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크게 포효했다.

“아크!”

텔루리안이 아크를 보았다. 분명 그가 도와준 것이다. 그가 손짓했다. 나를 믿고 공격하라고. 텔루리안의 검이 앞으로 뻗어진다. 그녀의 지시에 초월기사들이 공중강습을 시도했다.

캬아아앗!

하지만 드레이크는 결코 녹록한 몬스터가 아니었다. 민첩성에 있어서는 실버드에게 뒤쳐지지만 그걸 커버하고도 남는 무식한 힘과 체력이 있다. 실버드 한 명이 드레이크의 등을 공격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녀석의 갑피가 너무 단단해서 검을 꽂아 넣는 것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바위도 자르는 오러도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면 미끄러진다.

“정령을 내보내! 놈의 균형을 어지럽혀라! 절대 정면에서 공격하지 마!”

텔루리안의 어지러운 지휘가 이어진다. 아크는 플라이 주문으로 하늘에 뜬 채 실버드와 드레이크간의 공방전을 지켜보았다.

‘확실히 버겁군.’

오러를 실은 검이 녀석의 껍질을 확실히 관통하지 못한다는 게 크다. 실버드가 꿀벌이라면 드레이크는 말벌이다. 이대로 놔두면 분명 수십 이상의 사상자가 생길 것이다.

‘안 되겠다.’

조금 지켜보면서 실버드가 어떻게 드레이크를 상대하는지 기록하려 했었다. 하지만 실버드를 희생시키면서까지 해야 할 일은 아니다. 아크가 마법을 캐스팅했다.

구름이 갑자기 모여들더니 하늘이 어두워졌다. 실버드는 물론이고 드레이크까지 저게 뭔가 하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시커먼 구멍이 뚫렸다.

번쩍!

섬광이 드레이크의 등판을 강타했다. 썬더 스트라이크. 6 클래스 마법의 위력에 드레이크의 원소저항이 일격에 뚫렸다.

크게야아악!

놀랍게도 썬더 스트라이크는 드레이크의 갑피를 관통한 것도 모자라 살을 파헤쳤다. 대량의 혈액이 뜨거운 온도에 부글부글 끓어올라 증발했다. 드레이크는 고통스런 포효를 토해내었다.

“역시 한 발로는 안 죽는구만.”

그냥 해 본 말이다. 체력이 1만을 넘는 카레고리 6의 몬스터가 6클래스 마법 한 방에 죽을 리는 없다. 아크는 입맛을 다시며 텔루리안을 비롯한 실버드에게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모두 피하세요!”

실버드들이 피하자 멀티 캐스팅이 활성화되었다. 수천의 마나가 빠져나가 대기에 흩뿌려져 복잡한 연산을 통해 형상을 만들어내었다.

마법사들이 흔히 마기 로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법마다, 마법사 개개인마다 형상은 모두 다르다. 그러나 어떤 마법사도 아크보다 복잡한 마기 로직을 만들어 내지는 못할 것이다.

7 클래스 마법 썬더 크래시.

수십 줄기의 벼락이 한 점에 집중되어 드레이크의 등을 강타했다. 벼락은 어두워진 하늘을 온통 새하얗게 물들이곤 모든 종류의 저항을 뚫고 마침내 드레이크의 몸을 관통해버렸다. 드레이크가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실버드들은 눈부신 섬광이 사라진 뒤 검은 연기를 흩뿌리며 추락하고 있는 드레이크를 보곤 말을 잊었다.

“디보라여.”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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