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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을 살아온 남자-34화 (34/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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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딕 - 5

‘4개째군.’

아크는 갤러트의 망원경 파시어를 거치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가 500년 넘게 수집한 각양각색의 보물들이 여기에 있다. 지금은 사라진 어떤 왕국의 왕이 쓰던 보관, 사파이어가 장식된 지휘봉, 세련된 금세공 장식 등 수천 개의 보물로 가득한 방이다.

아마 여기에 있는 보물이 몇 개만 풀려도 대륙은 난리가 날 것이다. 특히 정통성을 찾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바르마 제국 같은 경우는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크가 눈 하나 깜짝하지는 않겠지만.

망원경 파시어와 전투낫 그림리퍼는 여기에 있지만 성검 게르마크는 자이언트의 영역에 있다. 그러나 아크가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서 성물 획득 메세지가 바뀌지는 않았다.

「초월 시스템 작동 : 성물 4/8」

「초월 1단계 달성까지 22%(8개의 성물과 영향력 포인트 10만이 필요합니다)」

「영향력 포인트 : 15,240보유 자금 : 88,328,242,480리블」

“흐음.”

앞으로 남은 성물은 4개. 최단루트로 가려면 마법도시 헤이본에 들러 수정지팡이를 획득한 후 바르마 제국으로 떠나야 한다. 거기에 2개의 성물이 존재한다. 그리고 영향력 포인트를 10만까지 모으려면 역시 큰 도시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크는 자신이 해야 할 것을 책에 정리했다.

‘에트라곤…철없는 드래곤…나이는 186세…’

이런 식으로 새로 만난 존재에 대해 갱신하는 것도 아크의 취미 중 하나다. 이사를 자주 하는 드래곤답게 신출귀몰하다. 그나마 눈치가 없지는 않은 편이라 아크에게 덤벼들지 않은 게 다행이다. 그랬다간 용생을 마감했을 테니까.

‘세이렌들이 말한 바르마 제국의 동향도 챙겨볼 필요가 있어.’

분명 뭐가 있으니까 바르마 제국이 바다로 나오는 것이리라. 거기까지 기록한 아크는 마법책을 덮고 무한의 서고에서 나왔다. 그는 지금 무지개 해안으로 복귀하는 첫걸음 호를 타고 있었다.

마치 바우선을 호위하듯 거대한 향유고래 모비딕이 근처에서 헤엄친다. 선원들은 물론이고 선장이나 게티스, 사피네까지 고래의 덩치에 감탄할 따름이다.

가끔 녀석이 퍼포먼스로 꼬리를 수면에 내리쳐 물보라가 튀어 오르면 탄성을 올리기 바쁘다. 저토록 거대한 생명체가 배를 위협하지 않고 헤엄친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웠다.

“사, 살아있길 잘했어…”

“그런데 고래치고는 너무 큰 것 같은데…혹시 몬스터 아닙니까?”

빡!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한 선원의 머리통을 선장이 갈긴다.

“몬스터면 우리를 가만 놔두겠냐! 멍청아!”

“그, 그렇죠? 저도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크는 갑판으로 나와 선원들과 눈인사를 하고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에메랄드빛 바다 아래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모비딕 이 녀석은 거대한 덩치를 가진 고래 주제에 제법 애교를 부릴 줄 안다. 아크가 나온 것을 알고는 물을 크게 뿜어 그를 적셔버린다.

‘이 녀석이.’

차마 뭐라고 할 수가 없다. 빨리 밑으로 내려오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크가 일어서려는데 게티스와 사피네가 다가왔다. 둘은 향신료 제도에서 아크의 도움을 많이 받은 탓에 반 빠돌이화 되어 있다.

“드디어 돌아가는군요. 섬에는 며칠 머무르지 않았지만 감사했습니다, 아크님.”

“감사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도 나름 소득이 있었으니까요.”

아크도 그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로서 트라움 제국은 향신료 제도를 가지게 되었다. 거기에서 후추를 비롯한 숱한 향신료를 공급받아 대륙에 퍼트리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아크가 그걸 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취향은 아니다. 한 때는 작은 나라의 국왕까지 해본 적이 있었지만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대소사를 처리한다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아크는 오늘도 여행을 떠난다. 배가 도착하면 슬슬 짐을 정리해 여기를 떠야 할 것 같다.

“저…”

얌전하게 팔을 앞으로 모으고 있던 사피네가 말을 걸어왔다. 게티스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예?”

“아크님은 혹시, 피레네 산맥에서 사셨던 그 아크님인가요?”

잠깐 동안의 침묵. 파란 눈동자가 아크를 주시하고 있었다. 천천히 그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글쎄요.”

“세이버투스를 기르셨다고.”

“기억이 잘 안 납니다.”

“혹시 마를레네 애쉬포드를 아시나요? 제 스승님이자 일주일동안…”

사피네는 거기서 말을 멈추었다. 그 다음 말을 이었다간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눈 내리는 피레네 산맥의 오두막에서 일주일 동안 둘이 같이 뒹굴었다는 소리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녀는 단지 마를레네처럼 아크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올 것이 왔군.’

하지만 여기서 긍정해서는 안 된다. 긍정하면? 긍정하고 뭘 어떡하란 말인가. 아크는 아크의 삶이 있고 마를레네에겐 그녀의 삶이 있다. 한 순간 교차될 수는 있어도 쭉 같이 갈 수는 없다. 애초에 길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르실의 죽음을 겪었다. 아크는 마를레네의 곁에 있으면서 그녀의 죽음을 겪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남자는 매정하게 고개를 젓는다.

“모르겠군요.”

“…이름은 모르겠지만 외모는 정말 비슷한데…그래도 모르시나요?”

“모르겠습니다. 사피네님.”

“…”

대화는 거기에서 끊어졌다. 귀족인 사피네는 아크에게 강압적으로 말해서 답변을 얻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대한 향유고래를 친구로 삼고 뛰어난 항해술을 가진 남자를 적으로 돌려서 뭐하잔 말인가.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사피네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의 스승, 마를레네가 아크에 대해 말하면서 얼마나 즐거운 얼굴이 되는지 알고 있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를 사랑했던 것 같다. 비록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 같이 지냈을 뿐이지만 그녀의 생애 중 최고라고 말해왔었다. 어지간히 즐거운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그 즐거움을 주었던 남자가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마를레네는 아직도 아름답다. 아크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라면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크가 마를레네의 곁에 서 있어도 부족함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피네는 결국 아무 말도 못했다. 아크는 모든 것을 부정했다. 그의 얼굴에서 공허함과 우울함을 읽었다.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그가 일어서서 바다로 뛰어들었다. 조용히 헤엄치던 향유고래가 배를 뒤집었다. 남자는 고래 배 위에 올라가 따개비나 기타 해양생물을 떼 주었다. 둘은 그렇게 대양을 유유히 만끽했다. 무지개 해안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아크에게 미르위키가 있듯 드래곤들에게도 나름의 커뮤니티가 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정신적 연결망, 그것을 D링크라고 부른다. 처음부터 드래곤이 D링크를 구축한 것은 아니었다. 인간 측에서 마법공학 혁명이 일어났을 때 골드 드래곤 하나가 배워 와선 이 시스템을 구축했다.

D링크를 구성하는 장비는 수정을 깎아 만든 통신구와 마법책, 그리고 마나의 흐름을 길게 잇는 통신탑으로 구성된다. 꽤나 많은 돈이 들고 높은 수준의 마법공학 기술과 마법이 필요하기에 오랜 세월을 사는 드래곤들 정도가 간신히 구축 가능하다.

다른 아인종들은 말 할 필요도 없고 마법공학 혁명의 시초인 인간조차 어렵다. 마법사와 마법공학자가 동시에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는데 그게 어렵기 때문이다.

정체불명의 드래곤에게 갤러트의 성물을 강탈당한 에트라곤은 울면서 실버 드래곤 알루시안의 둥지를 찾았다. 그녀는 곤히 자고 있다가 갑자기 에트라곤의 방문을 받곤 깜짝 놀랐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억울합니다! 억울하다고요! 알루시안!”

“갑자기 뭐가 억울하다는 거야. 얘기를 좀 해봐.”

알루시안은 동생을 다독이는 누나처럼 에트라곤을 토닥였다. 그는 찡찡거리며 사정을 설명했다. 정체불명의 드래곤이 힘으로 자신을 협박해서 갤러트의 성물을 빼앗아갔다는 말에 알루시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드래곤이었다고?”

“확실해요, 확실합니다! 내 별명을 알고 있었단 말입니다! 이사 드래곤이라고 놀렸고요!”

“풉.”

알루시안은 웃음을 참았다. 에트라곤은 드래곤 중 가장 젊고 가장 멍청한 개체로 악명이 높다. 이제 슬슬 둥지를 만들어 자리를 잡을 만도 하건만 정신을 못 차리고 돌아다니면서 사고를 친다.

어느 드래곤의 영역에 들어갔다가 흠씬 얻어맞고 징징거린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이번에도 그런 경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트라곤의 말에 알루시안은 묘한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

“갤러트의 챔피언이라고 조금 과장해서 말했더니 헤일로 어디 갔냐고 나를 모욕했어요! 알루시안! 그 놈은 분명히 블랙 드래곤입니다!”

“블랙 드래곤이 거기까지 갈 일이 있겠니?”

“그래도! 그 검은 머리를 보면 알잖습니까?”

“검은머리라고…그래서, 네가 자랑하던 갤러트의 성물을 빼앗긴 거야? 그냥 가져갔어? 섬에 있었다며? 다른 인간들도 있었다며?”

“그, 그건…”

쫄았구나. 알루시안은 한심한 시선으로 에트라곤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 덜 떨어진 드래곤은 자신의 것을 빼앗기고 인간들에게 보복도 하지 못하고 여기까지 징징거리러 온 것이다!

최소한 그 인간들이 블랙 드래곤과 관계가 있는지 알아봐야 할 게 아닌가? 모든 게 한심하고 또 유치하다. 알루시안은 에트라곤에게 툭 쏘아붙였다.

“이, 이걸 주는 바람에…그때는 기분이 좋았었거든요.”

블루 드래곤이 슬그머니 마기스태프를 내민다. 알루시안은 그걸 보고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대륙에 몇 개 없는 아이템이다.

“마기스태프네. 이걸 누가 줬다고?”

“그 블랙 드래곤이요.”

“블랙 드래곤이 마기스태프를 줬다고? 너, 마법공학에 능통한 종족은 인간과 골드 드래곤 정도라는 걸 알고 있지 않아?”

“어? 그랬던가요?”

이쯤 되면 한대 때리고 싶은 것이 용지상정일 것이다.

“블랙 드래고온? 그 험악한 둘 사이에 뭔가 교류가 있다는 것도 이상해. 너 도대체 뭘 받아온 거야.”

“이, 이게 아닌데? 이상하다…”

엉거주춤 뒷다리로 서서 머리를 긁적이는 걸 보면 푼수가 따로 없다. 알루시안은 절로 한심함을 느꼈지만 그 블랙 드래곤의 정체에 대해서는 궁금함을 느끼게 되었다. 대체 어떤 자이기에?

“외모가 어때? 상세히 설명 좀 해봐.”

“대, 대강 이렇게 생겼는데요.”

에트라곤이 앞다리로 열심히 설명했다. 장황하긴 했지만 대충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검은머리에 이목구비가 흐릿한 인간형의 존재. 바지와 셔츠, 조끼를 입은 전형적인 젊은 청년이라.

‘어?’

묘한 위화감이 그녀를 감쌌다. 몇 년 전 목장을 운영하다 브레톤 수도로 사라진 그와 매우 비슷한 외모가 아닌가. 측정할 수 없는 마나의 흐름이 느껴져 블랙 드래곤이라고 착각한 것도 똑같았다. 물론 그는 블랙 드래곤이 아니었다.

“이 주변의 블랙 드래곤이 누가 있었지?”

혹시나 해서 주변의 드래곤들을 검색해 본다. 알루시안은 한참 검색하다가 옆에 에트라곤의 머리가 다가온 것을 깨달았다. 어깨로 팍 밀어내자 그는 풀이 죽어선 동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하트마, 켈타스…아니고. 그라마톤…이 아저씨는 대체 언제적 드래곤이야. 아니고…”

소거법으로 대상을 좁혀나간다. 그러고 나니 아무도 남지 않았다. 즉 에트라곤을 협박해 공물을 뺏어갈 만한 블랙 드래곤이 없는 것이다. 둘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묘하게 멍청한 얼굴이 짜증난다.

“없는데?”

“없다고요?”

“블랙 드래곤이 아니겠지.”

“농담도 잘 하시네. 그럼 누구란 말입니까. D링크 좀 봅시다.”

허락도 없이 D링크를 켜고 주변 드래곤들에게 신호를 보낸다. 물론 둥지에 접속해 있지 않

은 드래곤들은 신호를 받을 리 없지만 대륙에는 심심해 죽을 것 같은 드래곤이 꽤 많이 존재한다.

에트라곤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갤러트의 성물을 가져간 블랙 드래곤을 찾는다. 그러나 누가 바다를 건너 그 섬까지 가겠느냐며 비웃는다.

―애초에 갤러트의 성물 그거 얻어서 뭐하게? 무려 700년 전 고물인데.

―에트라곤 정도나 애지중지하는 거지. 요즘 나오는 마법공학 아이템에 비하면 영 별로야.

―그건 그렇고 블랙 드래곤이 아니면 인간한테 두들겨 맞은 모양인데?

―인간한테 두들겨 맞은 드래곤이라…한심! 또 한심!

―아 진짜, 맞지는 않았다고요!

하도 욕을 먹어 너덜너덜하게 된 에트라곤은 투덜거리면서 D링크를 껐다. 블랙 드래곤도 아니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가 고민하는데 알루시안이 프로젝트 이미지 마법을 사용해 어떤 얼굴을 그렸다. 그녀는 아크와 제법 오래 지냈기에 얼굴을 잘 안다.

“이 개자식! 맞아요! 이 놈입니다!”

“얘 인간인데?”

“예?”

멍청해진 에트라곤이 반문했다. 알루시안은 힘주어 말했다.

“인간이라고. 잠시지만 나하고 알고 지낸 적도 있었거든. 확실히 인간이야.”

“에이, 설마…인간이 어떻게 나한테 갤러트의 성물이 있는 줄 안단 말입니까. 말도 안 되죠.”

“글쎄…분명 말이 안 되기는 하지만 내가 본 그 인간이라면 가능하고도 남을 것 같네. 혹시 다음에 만나거든 물어봐. 이름이 아크였거든.”

“아크요?”

“그래. 그 인간도 마법공학에 꽤나 능통했었지. 그라면 이런 마기스태프를 만들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아. 대단히 정교하고…멋지네.”

알루시안은 마기스태프를 보고는 감탄을 거듭했다. 그녀는 골드 드래곤들과 다소 친분이 있기에 그들이 만들어내는 마법공학의 기술수준을 알고 있다. 이 정도 마기스태프는 골드 드래곤 중에서도 마스터급에 이른 존재만이 만들 수 있다.

알루시안이 이렇듯 증거를 들이밀자 에트라곤도 꽤나 진지해졌다. 그는 진짜 인간인가? 블루 드래곤을 상대로 감히 배짱을 튕기는 인간이라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다음에 만나면 혼쭐을 내주리라고 그는 다짐했다.

‘일단 안티 매직 쉘부터 쓰는 거야…그 다음에는 다리 하나를 부러뜨려주마!’

============================ 작품 후기 ============================

모비딕 챕터가 끝나고 이제 마법도시 헤이본이 이어집니다!

이 소설의 메인스토리는....없습니다!

놀랍게도 없습니다.

이쯤 되면 짐작하셨겠지만 주인공은 앞으로 수백 년 동안 살아있을거고

마법공학과 마법이 극한으로 발달할 때까지 살아있을 겁니다.

그때까지 살아있으면서 이리저리 간섭하고 쥐어박고 갑질하는게

이 소설의 줄거리입니다. 안정이 되면 떡도 좀 치고 그런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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