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1 모비딕 =========================
모비딕 - 2
아크가 무지개 해안에 온 것은 쉬기 위해서였다. 535년 동안 살아오면서 수없이 많은 감정의 소모를 겪었음에도 아직까지 멀쩡한 까닭은 삶을 무덤덤하게 사는 방법을 깨우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은 견딜 수 없는 공허함이 밀려올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아크는 항상 정신적 고향인 피레네 고향이나 바다에 가곤 한다. 무지개 해안에 온 것도 나름의 선택이었다. 그의 오래된 친구가 아직까지 있을까 해서였다.
“친구를 만나려면 준비를 해야지.”
안타깝게도 그 친구를 만나기 위해선 준비가 꽤 필요하다. 수줍어서 육지로 나오지 않기에 먼 바다로 나가야 한다. 그러려면 큰 배가 필요하고 아크 혼자서 배를 만들기에는 무리가 있다.
처음에는 나무배를 좀 크게 만들까 했지만 무지개 마을이 생기면서 이야기가 좀 달라졌다. 마을이 융성하면서 조선소가 생긴 것이다. 비록 거기서 만드는 것이라 해봐야 50-100톤 규모의 소형 바우선이지만 조금만 규모를 키우면 가능하다.
아크는 조선소에 2마스트 바우선 1척을 주문해 놓은 상태였다. 다 완성하려면 2달 남았다.
제국에서 온 두 사람의 제안은 일단 유보하기로 했다. 생각해 본다고 말하자 게티스의 안색이 눈에 띠게 안 좋아졌다. 아마 마를레네에게서 단단히 지시를 받고 온 것 같다.
‘마리라도 데리고 오면 큰일인데.’
30대가 되었을 마를레네가 만약 여기로 온다면 아크는 꽁지가 빠져라 달아나야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황금사자기사단의 수장 자리가 그렇게 만만한 자리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서류작업만 해도 반나절이고 개인수련도 빼먹지 말아야 하니 수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아크는 여유자적 생활해도 괜찮다. 당분간은.
아크가 오후 낚시를 하러 가는 곳에는 매일 오는 존재들이 있다. 아인종은 분명한데 대륙인들이 사람으로는 쳐주지 않는 묘한 입장에 있는 존재들이다.
세이렌.
바다에서 사는 인어들이다. 묘하게도 여성 인어는 세이렌으로 부르며 반쯤은 아인종으로 대접을 해주지만 남성 인어는 나가라고 부르며 완전히 몬스터 취급이다. 거주지나 생활패턴도 많이 달라서 몇 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짝짓기 시즌을 제외하고는 거의 만나지 않는다고 한다. 대신 세이렌들은 바다로 나오는 남성들을 유혹함으로써 그 악명을 톡톡히 날리고 있었다.
“아―크!”
절벽 아래에서 세이렌들이 꺅꺅거리며 소리를 질러댔다. 아크의 목적지는 절벽에서 밑으로 떨어져야 겨우 도달할 수 있는 곳으로, 만 형식으로 움푹 들어가 있다.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아니면 배로 접근하거나 둘 중 택일해야 하기에 접근성이 대단히 까다로운 곳이다. 그래서 근처의 어부들도 여기로는 오지 않아서 아크만의 낚시터라고 할 수 있다.
“웃차.”
평범한 사람이라면 발을 잘못 디뎌 떨어져 죽을 정도의 높이. 아크는 낚싯대를 들고 폴짝폴짝 바위를 뛰어내린다. 세이렌 세 명이 활짝 웃으며 헤엄치고 있었다.
바닥이 완전히 비치는 투명한 바다와 여신처럼 아름다운 세이렌 셋이면 충분히 낙원이라 할 만하지만 방심하는 것은 위험하다. 세이렌은 남자를 바다로 끌고 가는 못된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들 딴에는 같이 즐겨보자고 하는 행동이지만 인간은 물고기가 아니라서 십중팔구는 익사한다.
이 세이렌들의 이름은 아크가 지어주었다. 자기들끼리 부르는 이름은 따로 있지만 그건 인간이 발음하기 상당히 어렵다. 그래서 세이렌들은 안나, 베나, 세나로 불러도 괜찮다고 허락했다.
“안녕, 안나, 베나, 세나.”
“안녕! 오늘도 왔네!”
자기들끼리 꺄르르 웃으면서 꼬리로 바닷물을 튕긴다. 아크는 덤덤히 웃으며 물벼락을 맞았다. 이런 장난도 세이렌들이 좋아하는 것이다. 겉모습은 예쁜 아가씨인데 속은 악동이다.
“낚시하러 온 거 아니지? 우리한테 물어보러 온 거지?”
“어! 맞아! 좀 가르쳐 줘!”
“아크는 솔직해서 좋다니까!”
또 자기들끼리 웃는다. 아크는 세이렌들에게 부탁한 바가 있었다. 덩치 큰 친구를 찾아달라고 말이다. 정확한 생김새를 전해들은 세이렌들은 꺄꺄거리며 찾아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친구는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워낙 덩치가 큰 만큼 바다라 할지라도 쉽게 모습을 보일 텐데, 특이한 일이다.
“흔적은 좀 있어?”
“있어! 그러니까 우리가 아직도 찾아다니고 있지! 해저에 작살오징어 뼈가 가득하다니까!”
“먹고 남긴 거네.”
작살오징어는 길이 5m에 달하는 초대형 오징어이다. 갑오징어와 비슷하게 납작한 뼈가 있는 게 특징이다. 크기가 크기이니만큼 뼈 길이도 3m가 넘고 흰색이라 해저에서도 발견하기가 쉽다.
바다 몬스터들은 작살오징어가 무리지어 사는 해저로 잘 내려가지 않는다. 하지만 아크의 친구는 해저에 사는 작살오징어를 잡아먹는다. 그래서 아크는 녀석이 아직 살아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 녀석은 영역의식이 아주 유별나서 조금이라도 덩치 큰 녀석이 접근하면 다 쫓아낸다. 머리박치기 한 방이면 크라켄도 버텨내지 못하니 카테고리 6급의 몬스터가 아니면 녀석에게 대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아크! 그거 알아?”
“어떤 거?”
“요즘 대륙 서쪽에서 배들이 밖으로 나오고 있어! 인간들의 배인 모양이던데!”
“대륙 서쪽이라고 하면 내가 모르지.”
아크의 투덜거림에 가슴이 유달리 큰 세이렌 안나가 두 팔을 들어보였다. 덕분에 아크의 눈이 행복해졌다.
“항아리! 이런 항아리 모양이 깃발에 그려져 있었어!”
“바르마 제국인데. 그 배들이 어디로 나온다는 거야?”
“먼 바다로 나오는 거 같아! 나가들하고 자주 싸우나봐!”
“그래?”
바르마 제국이 왜 바다로 나올까. 나가들과 싸우는 것을 각오하면서도 작은 배를 끌고 나온다는 것은 그만한 이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크는 대륙의 많은 곳을 돌아다녔지만 먼 바다로 나가본 적은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남쪽에 있는 제도 정도다.
‘서쪽에도 땅이 있나?’
확인해 볼 가치가 있지만 당장은 아니다. 여기에서 할 일도 있고 거리가 너무 멀다. 2달 후에 배가 완성되면 그때 슬슬 움직이면 된다. 아크는 정보를 준 보답으로 열대과일을 한보따리 꺼내 주었다. 예전에 재배하고 저장해 두었던 망고다.
“고마워! 잘 먹을게!”
세이렌들이 망고껍질을 깨물며 아크에게 인사했다. 안에 커다란 씨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조심조심 껍질을 벗기고 씨앗을 분리해낸다. 아크는 낚싯대를 드리우며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서 귀한 생선을 잡아갈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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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마을은 무지개 해안에 위치한 유일한 인간 거주지다. 인구는 대략 300명 정도이며 대다수가 연안해서 어업을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남해안에 관심을 가지는 제국 성도에서 관료와 기술자들을 보내 행정구역으로 편입하려 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무지개 마을에서 유일하게 2층으로 올라가 있는 곳이 제국에서 파견한 행정관료의 숙소다. 황금사자기사단에서 온 게티스와 사피네도 여기에 머물고 있었다. 오늘 아크는 이들에게 초대를 받았다. 아크가 명확한 답을 주지 않자 조금 답답해진 모양이다.
‘두 달 동안 이들을 안내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는걸.’
지난 며칠 동안 아크가 게티스와 사피네를 보고 한 생각이다. 만약 싸가지를 치즈에 말아먹은 놈이 왔다면 바다에 던져버리고 나 몰라라 했을 테지만 이들은 꽤나 정중하게 나왔다.
기사단장인 마를레네가 꽤나 교육을 잘 시킨 것인지 바닷가 무지렁이로 행세하고 있는 아크를 깍듯하게 대했다. 은거한 현자를 대하는 자세에 가깝다.
제국에서 파견된 행정관은 미리 얘기를 들었는지 한낱 어부에 불과한 아크를 잘 대해주었다. 그는 검붉은 피부에 사각턱을 가진 노인이었는데 젊었을 때는 해안가에서 살다가 성도로 상경했다고 한다. 이름은 루시안으로 꽤나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아크는 손질해 온 생선을 주방장에게 건네고 루시안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들어갔다. 게티스와 사피네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제가 이렇게 여러분들을 초대한 이유는 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황제 폐하께서 정식으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이것은 폐하의 명령서입니다.”
황금직인이 찍한 두툼한 서류가 내밀어진다. 아크는 그걸 유심이 관찰했다.
‘아브사라스 2세…내 후손.’
그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안젤라 황녀의 얼굴에서 유추할 수는 있다. 젊었을 때에는 꽤 미남이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아크는 후손들이 자기 얼굴보다는 크리오네를 닮았음을 깨닫고 자괴감에 빠졌다.
“황금사자기사단의 두 분께서 이번 일을 책임지고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두 분의 후원자입니다.”
루시안이 거기까지 말하자 게티스와 사피네가 일어나 꾸벅 인사를 했다.
“부족하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합니다.”
‘애송이 둘에 후원자라. 무슨 생각이지, 황제.’
황제가 정말로 관심을 쏟았다면 황금사자기사단이 아니라 바다에 잔뼈가 굵은 사람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게티스와 사피네는 그들의 말을 들어볼 것 같으면 태어나서 지금까지 바다에 들어가 본 적도 없다고 한다.
그 말인즉슨 수영도 할 줄 모르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이다. 100톤짜리 바우선에 탄다? 최소 며칠간은 시체가 될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온다.
루시안이 손깍지를 끼며 말했다.
“인원구성이 다소 단촐하다는 인식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실은 두 분은 선발대입니다. 가능성이 확인되면 성도에서 곧장 인원을 보낼 것입니다. 만약 아크님이 이번 일을 허락하신다면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두둑한 보상금을 드릴 것입니다.”
“그걸 대가로 해서 섬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 달라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마을 주민들에게 듣자 하니 아크님은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제도에 가본 적이 있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사실이다. 아크는 아직도 그때의 추억을 기억한다. 녀석의 지느러미를 붙잡고 바다를 미끄러지는 그 경험은 500년 평생 다시 겪기 힘든 짜릿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게티스가 물었다.
“혹시 섬에 뭐가 있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다지 별 건 없었습니다. 열대과일과…향신료…그리고 대륙에는 볼 수 없는 진귀한 동물들이 좀 있지요. 육지에 몬스터는 없었습니다. 바다에는 많지만.”
“향신료라면 바르마 제국에서 오는 로즈마리나 베르가못 같은 것인가요?”
뜻밖에도 사피네가 관심을 나타내었다. 아크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맞습니다. 그것보다 좀 더 알싸하고, 매콤한 풍미가 있는 향신료가 꽤 많습니다. 대륙에 가져가면 비싸게 팔리겠죠. 고기와 잘 어울립니다.”
아크가 여기까지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어떻게 섬에 갔는지 묻지 않는다. 그걸 묻지 않기로 미리 말을 맞추고 그를 초대한 것 같았다. 하기야 그걸 곧이곧대로 말한다고 한들 믿을 수 있을까. 미친놈 취급할 것이 분명하다.
“향신료라. 정확히 어떤 향신료인지는 모르겠으나…”
아크가 테이블에 작은 주머니를 하나 내려놓았다. 입구를 열자 알싸한 향이 풍겨 나왔다.
“이건 처음 보는 열매군요? 향이 대단한데…”
“제가 처음 발견한 것이니 후추라고 불러도 되겠죠. 이걸 곱게 갈아서 요리에 쓰면 풍미가 아주 좋습니다. 뭐랄까요, 요리의 품격을 끌어올려준다고나 할까요? 로즈마리와 바질 따위를 고기에 문지르는 것보다는 훨씬 좋습니다.”
“흐음, 흐음…”
사피네는 후추가 마음에 드는지 코에 대고 향을 맡았다. 킁킁거리며 향에 취하는 모습이 제법 매력적이다. 루시안과 게티스는 얼이 빠져 있다가 아크에게 말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저희가 섬에 가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생긴 셈이군요. 어떻습니까, 아크님. 저희에게 힘을 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아크는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배가 완성되려면 2달 정도 남았는데 그 사이에 천천히 녀석을 찾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 셋을 섬에 내려주고 세이렌과 함께 바다를 돌아다니면서 녀석을 찾는다. 괜찮은 생각이다.
“좋습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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