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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을 살아온 남자-24화 (24/217)

00024 오래된 연인 =========================

오래된 연인 - 1

아크는 과거에 대해 모든 것을 기억하진 못한다. 마법책을 꺼내 미르위키 시스템을 이용해야 그땐 그랬었지 하고 떠올리는 수준이다.

그가 직접 만든 롱소드 풀크럼과 방패 이지스는 200년 전에 만든 물건이다. 트라움 제국의 남부에 붙어 있는 작은 소왕국 아인세타에 머물 때에 만든 것이다.

당시 아인세타에 초빙되어 검술교관 역할을 하던 아크는 검술에는 서툴지만 모든 일에 진지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하던 여기사와 가까이 지냈다. 아크가 야금술과 마법부여 스킬을 완성하고 풀크럼을 만들었을 때 생각난 게 바로 그녀였다.

그녀의 가문은 너무 가난해서 오러를 버틸 수 있는 검 하나 제대로 마련해 줄 수 없었던 것이다. 소왕국 아인세타에 청을 넣으면 마련해주긴 하겠지만 그것도 결국 제대로 된 검은 아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더욱 돈이 없는 자는 기사가 될 수 없었다.

풀크럼 정도의 에픽 등급 아이템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아크는 친하게 지내던 그녀가 돈이 없어 무기하나 장만하지 못하고 궁상을 떠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에게 풀크럼과 이지스를 선물했다.

여기사는 자신의 오러를 문제없이 버티고 증폭까지 시켜주는 아이템을 받고 놀라움과 감사를 표했다.

시간은 흘러 아인세타는 트라움 제국에 병합되었다. 전쟁 한번 없는 부드러운 병합이라서 일어나 보니 갑자기 제국 소속이 되었다는 말이 농담이 아닐 정도였다.

좋은 아이템을 가져 실력을 펼칠 수 있게 된 여기사는 마침내 노력에서도 빛을 발해 제국의 기사단에 들어갔다. 그녀는 아크와 만나고자 했으나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그때는 내가 좀 그랬었지.’

당시의 아크는 우드 엘프와 만나느라 여기사를 그저 제자로 대했다. 그녀를 귀여워했으나 여자로는 보지 않았다. 몇 번 구애를 받은 적도 있었으나 웃으면서 거절했다. 너는 여자로 안 보인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때 걔가 너무 충격을 먹었었나. 아, 정말 그랬군.’

미르위키에 이름이 적혀 있다. 아크는 한동안 그녀의 항목을 살펴보다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그녀와는 연락이 끊어졌다. 제국에 들어가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아크도 나름 바빴기에 연락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인연의 실이 끊어졌다.

아크는 지금 엘프랑데와 오만의 남부 경계선에 와 있다. 풀크럼과 이지스는 좋은 무구이긴 하지만 무한의 서고에 수백 벌이나 널려있는 데다가 솔직히 귀찮았다. 찾으려면 찾을 수 있긴 하겠지만 지금은 할 일이 있다. 우선은 엘프랑데를 벗어나야 한다.

‘보자…엘프랑데의 영역이…’

지도책을 찾아 무한의 서고에서 나왔다. 엘프 두 명이 활을 내리고 다가오고 있었다.

‘남자 하나, 여자 하나…아직 어리군.’

이제 서른 정도다.

엘프족들은 대개 인간에 비해 긴 삶을 살아간다. 평균적인 수명이 150년 정도인데 가끔 200살이 넘게 살아가는 엘프도 있다고 한다. 그들의 성격은 차분하고, 외부인들에게 배타적이다. 그러나 한번 신뢰를 준 자는 끝까지 믿어준다.

다만 우드 엘프라는 종족명 답게 숲에서만 생활할 수 있다. 그들은 고기를 혐오하여 채식에 과일을 곁들이는 선에서 식사를 끝낸다. 인간에게서 나는 노린내는 엘프에게 있어 고역이므로 두 종족 사이에는 어지간해선 사랑이 싹트지 않는다.

아크는 아주 차분하고 조심스럽게 천막을 걷고 밖으로 나갔다. 새벽 이슬이 가득한 풀을 밟고 기지개를 켰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행동에 접근하던 두 엘프가 멈칫했다.

“어? 엘프들이시군요. 안심하셔도 됩니다. 저는 여행객이니까요. 엘프랑데를 침범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아크가 이렇듯 정중하게 나오자 두 엘프도 머쓱해졌다. 원래 인간은 여기에서 내가 무슨 잘못을 했냐며 적반하장으로 나오고 소리 지르다가 쫓겨나는 게 보통이었다. 이 과정에서 실전을 겪는 일도 있어 항상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던 엘프들이 은근히 기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엘프들의 영역은 대개 고요하고 평화롭다. 그래서 가끔 별종 엘프들이 태어나면 마을의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사고를 치곤 한다.

200년 전 마을을 떠났다가 인간의 남자와 사랑에 빠져 아이를 배고 돌아온 나르실도 그 중 하나다. 지금은 마을의 대장로라는 고귀한 신분이지만.

“언제 떠날 계획입니까? 아침이 되면 우리가 아니라 정예 순찰대가 돌아다닐 겁니다. 빨리 떠나는 게 서로에게 좋습니다.”

“예예, 금방 갑니다.”

“…”

엘프 둘은 한동안 아크를 관찰하다가 물러났다. 엘프랑데의 숲은 주변에 비해서 평화롭기는 하지만 몬스터가 전혀 없는 곳은 아니었다. 그런데 일행도 없이 혼자 천막을 치고 있다는 것은 제법 실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엘프 둘이 떠나자 아크는 한가하게 불을 지피고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식사는 산뜻하게 초콜릿 음료와 버터 바른 빵으로 시작하는 게 괜찮을 것 같다.

“흠흠, 괜찮군.”

강하게 끓인 초콜릿 음료가 아크의 배를 채워준다. 이미 인간이 아니게 된 아크지만 오랫동안 먹지 못하면 죽는 것은 같다. 숨을 못 쉬어도 죽고, 잠을 오래 못자면 의식이 끊어진다. 다만 남들보다 오래 견딜 수 있을 뿐이다. 아크는 최장 두 달 동안 먹지 않고 버틴 적이 있다.

호밀빵에 버터를 잔뜩 바르고 먹는다. 시큼한 맛과 까드득 씹히는 식감이 나름 먹을 만하다. 다 먹을 때쯤 되자 숲의 풍경이 바뀌었다. 태양빛이 안개를 뚫고 들어와 사방을 비춘다.

“…”

아크는 잠시 평화로운 숲에서의 식사를 즐겼다. 숲에서 지낸다는 것은 이런 장점도 있다. 어차피 그에게 위험이란 존재할 수 없으니 좋은 풍경을 즐기고 맛있는 식사를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 일행은 별로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다. 한 무리의 용병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워워!”

십여 명의 용병들이 아크와 천막을 발견하고는 말을 멈췄다. 투레질을 하는 말 위에서 용병들이 아크를 주의 깊게 관찰한다. 엘프랑데에서 혼자 천막을 치고 지내는 이 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유해한가? 무해한가? 혹시 오만 왕가의 초청을 받고 온 마법사인가? 무언의 논의가 이루어진다. 용병들 중 한 명이 말에서 내렸다.

“반갑소이다.”

“반갑습니다.”

아크가 인사를 받자 갈색의 털수염을 가진 용병으로 보이는 자가 작게 웃었다.

“이 위험한 곳에서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 누구인가 싶었는데…혹시 오만에서 초청한 분이시오?”

마법사라면 이 정중한 분위기를 유지해야 한다. 안 그러면 죽는다.

“아닌 것 같군요. 저는 다른 쪽으로 갑니다.”

마법사는 아니고 무해하다. 용병대장 라르크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의 목적은 엘프랑데를 통과하는 최단의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래서 무리하게 숲에서 자란 말을 빌려왔

다. 엘프라고 해도 말보다 빠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헌데 저건 무엇일까. 라르크는 아크 옆에 놓인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겉으로 보면 지도책 같다.

“저건 뭐요?”

“지도지요. 이 근방의.”

“지도?”

용병들이 반색했다. 엘프랑데 주위는 워낙 정보가 없어 지도도 형편없는 수준이 대부분이었다. 오만에서 파는 지도도 봐줄만한 것이 못되어 스스로 길을 찾아보는 게 나은 수준이다. 그런 와중에 정체불명의 청년이 가진 지도라니.

“잠시 볼 수 있겠소? 만약 유용한 정보가 있다면 사겠소이다.”

“지금 작성하는 중이라서 별로 볼 건 없습니다.”

아크가 지도책을 탁 덮었다. 라르크는 지도책이 꽤나 두툼한 것과 낡은 것에서 무언가를 알아낼 수 있었다. 이 자는 엘프랑데의 지형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러니까 몬스터가 출몰하지 않는 여기에서 야영을 할 생각을 품은 것이 아니겠는가?

사고가 그런 식으로 연결되다 보니 반드시 저 지도책의 정보를 얻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숲에서 말을 타고 돌아다닌다는 것은 중노동이다. 엘프들의 싸늘한 눈초리를 달고 다닌다면 더더욱 그렇다.

“정보를 사겠소. 설마 안 팔겠다고 하진 않겠지.”

아크는 한숨을 내쉬었다. 용병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렇다. 이들은 언제든 이빨을 드러낼 수 있는 자들이다. 푼돈을 위해 목숨을 취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이익이 된다면 배신도 서슴지 않는다.

개중 신뢰를 쌓아 전쟁에 참가하는 수준의 용병단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눈앞의 이 자들은 아니다. 이놈들은 들개에 불과하다.

지도책은 아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다.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 기입하는 만큼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않는다. 마를레네와 머리를 맞대고 마나석 광맥이 어디에 있는지 이야기한 적은 있지만 그것뿐이다. 아크는 지도책을 차원주머니에 넣어버렸다.

“어허. 좀 보자니까. 우리가 꽁으로 먹으려는 것도 아니지 않소? 돈을 지불한다니까.”

“아뇨, 사양하겠습니다.”

“그것 참…”

이런 당나귀 같은 고집을 봤나. 라르크가 눈짓하자 동료 용병들이 말에서 내렸다. 누구는 헤실헤실 웃으며 검자루에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이런 깊은 숲에서 사람 하나 없어져도 아무도 모른다. 천막에는 괜찮은 것들이 좀 있을까?

“좀 봅시다. 값을 치러준다고 하지 않았소이까. 깔끔하게 물러갈 테니 좀 보자고.”

이건 마지막 경고다. 라르크의 뒤로 용병들이 섰다. 분위기가 팽팽하게 당겨지고 아크의 눈썹이 올라갈 때, 갑자기 화살 하나가 땅에 박혔다. 용병들이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습격이다!”

“머리 조심! 가슴 조심!”

“피해!”

역시 전투에 잔뼈가 굵은 용병들답게 빠르게 엄폐한다. 아크는 한가하게 남은 초콜릿 음료를 마셨다. 삐이익 거리는 소리가 나며 올빼미 몇 마리가 날아와 나뭇가지에 앉았다. 우드 엘프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경계태세에 들어간 우드 엘프는 신출귀몰하다.

“움직이지 마라. 발을 멈춰라.”

“그대로 있어라. 화살이 꿰뚫기 전에.”

고음의 목소리가 숲에 메아리쳤다. 용병들이 쭈뼛거렸고 아크는 천천히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의 발치에 화살 하나가 날아왔다.

“멈추라고 했을 텐데, 우리 경고가 안 들렸나보지?”

“아…저는 그냥 여행객입니다. 아까 순찰대와도 만났죠. 조용히 엘프랑데를 떠날 겁니다.”

“떠난다고? 지금 즉시 떠날 수 있나?”

“천막만 치우고 갈 겁니다.”

무덤덤한 태도에 엘프들의 목소리가 잠시 잦아들었다. 아크가 정말로 천막을 걷고 차원주머니 안에 넣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용병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저건 차원주머니 아닌가? 지도책을 넣을 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는데 접은 천막을 집어넣는 걸 보면 값비싼 차원주머니가 분명했다. 몇몇 용병들에게서 탐욕이 일었다.

“우, 우리도 나가겠소.”

“조용히 떠나겠소! 포위를 풀어주시오!”

한편 아크는 이 우스운 광경을 속으로 낄낄대면서 만끽하고 있었다. 정말 꼴같잖은 일 아닌가? 빨리 꺼지겠다는 뜻은 아크의 뒤통수를 치고 차원주머니와 지도책을 빼앗겠다는 말이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는데.

‘그냥 도망갈 걸 그랬나.’

섀도우 클록을 뒤집어쓰고 떠날 수는 있다. 다만 이 웃긴 놈들이 언제까지 광대짓을 하나 지켜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빨리 여기를 떠나라. 나르실님이 아신다면 너희는 성치 못할 것이다.”

나르실?

차원주머니를 어깨에 메던 아크의 움직임이 멈췄다. 200년 전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은색의 머리칼을 길게 기른 그녀의 이름도 나르실이라고 했다.

엘프 마을이 하도 답답해서 도망 나왔다는 그녀. 인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줘야 했던 그녀. 겨울에 익숙지 않아 벌벌 떨면서 초콜릿을 마시던 그녀.

유달리 하얀 피부가 생각난다. 그래서 아크는 그녀를 백설공주로 부르곤 했었다. 족장의 딸이니까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설마. 그 나르실이 아니겠지.’

엘프의 수명은 200년에 가깝긴 하지만 실제 그렇게 오래 살지는 못한다. 동명이인, 아니면 후계자일 것이 분명하지만 확인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았다. 아크의 시선이 나무기둥 뒤에 숨은 엘프에게 향했다.

“나르실님이 혹시 은색 머리카락을 가졌습니까?”

============================ 작품 후기 ============================

여기서 설문조사 하나 하겠슴다...

1. 난 떡신이 싫다. 그냥 스토리 전개만 했으면 좋겠다.

2. 떡신 상관없는데 너무 자주 나오는 건 싫다.

3. 더 많은 떡신이 필요하다.

하나만 골라주세요! 의견도 써주심 감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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