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6 치즈 순수령 =========================
치즈 순수령 - 5
아우라와 엔도라는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결국 퐁뒤를 주문했다. 미고랭 치즈를 쓰지 않았다는 말에 상당한 의구심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결국 아크의 말빨에 휘말려 퐁뒤를 시키고 말았다. 그의 말만 듣고 있노라면 무슨 천상의 음식인 것 같다.
아크가 치즈를 녹이기 시작하자 제시카가 와서 빵을 자르고 고기를 두툼하게 썰어 초벌구이를 한다. 감자가 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이 발리노어 대륙에는 감자 비슷한 작물은 있지만 구워서 먹을 수는 없다. 쓴맛이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크가 만든 치즈는 원본인 에멘탈 치즈와 마찬가지로 그냥 먹으면 상당히 쓰다. 그러나 가열하여 녹이면 고소한 맛이 엄청나게 올라와 입안을 장식한다.
거기에 다른 치즈를 최소 두 종류 이상 섞는다. 그럼 쓴맛이 완전히 사라지고 풍미 깊은 상아색의 퐁뒤가 완성된다. 부엌데기는 할 수 있다고 장담하던 제시카는 빵과 고기를 사각형으로 만드는 데에만 악전고투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래도 나중에는 칼에 익숙해졌는지 제법 반듯하게 썰어내는 데 성공했다. 제시카는 부들거리는 팔목을 부여잡고 퐁뒤를 서빙했다.
아우라와 엔도라는 자신들 앞에 놓인 희한한 그릇을 바라보았다. 녹인 치즈에서 따끈한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치즈 특유의 꼬랭내가 별로 나지 않는다.
“이건 햄이군요. 고기도 먼저 구워서 나왔고…으음 맛있겠어.”
엔도라는 이 요리가 상당히 마음에 드는 듯했다. 눈으로 한번 훑더니 식기로 준비된 손가락 두 배 길이의 꼬챙이를 집었다. 이 가게는 다른 곳과는 상당히 다르다. 화려하며, 엄숙하고, 또한 정중했다. 식기마저 고급감이 넘치고 심지어 빵을 꽂을 때 쓰는 꼬챙이마저 이렇게 멋지다.
“이거 어떻게 만든 거지? 광택이 있는데.”
“모르겠어요, 일단 먹어봐야 할 것 같은데.”
미리 구워져 나온 고깃덩어리를 꼬챙이에 찍어 치즈의 바다로 가져간다. 아우라는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단지 요리일 뿐이라고, 조금 독특한 경험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해도 이 자극적인 냄새에는 어쩔 수가 없다.
치즈를 듬뿍 찍어 입 안으로 가져간다. 덥석 고깃덩이를 깨물고 입 안에서 천천히 굴리며 씹었다. 엔도라가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어, 어때요?”
“…”
“맛이 없나요? 표정은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아우라는 조용히 꼬챙이를 내려놓았다. 그녀의 갈색피부는 홍조로 달아올라 있었다.
“…지금까지.”
“지금까지?”
“우리가 먹었던 치즈 요리는…다 쓰레기야.”
“네?”
“닥치고 먹어봐. 그럼 내 말을 이해하게 될 테니.”
거기까지 들은 엔도라는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은 그녀의 권유대로 직접 먹어보기로 한다. 빵을 조각낸 것을 치즈에 듬뿍 찍어 먹는다. 미고랭 치즈의 다소 쓴맛을 생각하던 그녀는 달작지근한 치즈의 농후한 맛에 깜짝 놀랐다.
“이거 치즈 맞아요? 쓴 맛이 안 나는데…”
“나도 그게 궁금해. 더 먹어봐야 알겠어.”
두 여성은 체통을 멀리 벗어던지고 허겁지겁 퐁뒤를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먹어도 먹어도 맛있다. 치즈를 많이 먹은 사람이라면 느끼할 법도 하겠지만 이 둘은 녹인 치즈를 처음 먹어본다. 게다가 여러 종류의 치즈를 섞어 보다 감칠맛을 끌어내는 이 요리법은 생전 느껴보지 못한 독특한 것이었다.
“으음…맛있어. 정말 맛있어…”
달고, 적당히 짜며, 형언치 못할 맛이 입안에서 맴돈다. 둘은 혀를 살살 간지르는 이 맛의 정체를 도저히 파악하지 못하고 아크를 불렀다.
“이 맛은 대체 뭔가요? 뭘 섞었기에 이런 맛이 나죠?”
“랍스터의 살을 조금 섞었습니다. 풍부한 감칠맛이 나죠.”
“랍스터?”
처음 듣는 재료의 이름이다. 아크는 작은 칠판 비슷한 나무판을 가지고 와서 즉석에서 펜으로 뭔가를 슥슥 그렸다. 그가 만든 매직펜인데, 일종의 마법공학 아이템이다.
집게를 그리고, 랍스터 특유의 몸통을 그린다. 수많은 다리까지 그리자 마침내 매직펜의 효과가 발동되기 시작했다. 아크의 머릿속에 있는 랍스터의 모습이 그림에 투영되는 것이다.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한 이 입체감! 아우라와 엔도라는 웬 괴물이 눈앞에 있지 기절할 듯한 표정이 되었다.
“꺄악!”
“치, 치워요!”
“어이쿠, 이 녀석은 그림일 뿐입니다. 해치지 않아요.”
“해, 해치지 않는다고요?”
아우라가 눈을 가린 손을 치우고 나무판을 노려보았다. 커다란 집게를 가진 시뻘건 괴물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단지 움직이고만 있을 뿐, 나무판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녀는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리고 엔도라의 팔을 끌었다.
“시, 신기한 녀석이군요. 어디에 살죠? 먹을 수 있는 건가요?”
“예. 이 녀석들은 주로 해저에 삽니다. 가끔 해안가로 올라오기도 하죠. 알을 낳아야 하니까요.”
“알? 몬스터는 아닌 것 같은데…”
엔도라는 목을 움츠렸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바다를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바다 몬스터도 몬스터지만 검푸른 수면 밑에 뭐가 있는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모습은 이렇게 흉칙하지만 맛있는 녀석입니다. 앞으로는 자주 대할 날이 올지도 모르죠.”
“설마요. 그것보다 퐁뒤 더 없나요?”
아크는 퐁뒤를 담은 그릇을 쳐다보았다. 치즈를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고 한 처절한 흔적이 보인다. 그릇 구석구석에 널린 빵가루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아크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메뉴판을 펼쳤다.
“이번에는 조금 색다른 요리를 선보일까 합니다. 크림과 치즈를 듬뿍 넣은 면요리입니다.”
“면요리에는 꽤 익숙한데, 치즈와 어울릴지 의문이네요.”
아우라가 아는 척하며 말했다. 트라움의 성도에서도 면요리는 그다지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다. 몇몇 귀족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퍼져가고 있는 추세인데 브레톤 왕국의 귀족이 익숙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아크는 그녀의 말에 반박하지 않는다. 해서 뭐하겠는가.
“익숙하시니 다행이군요. 하지만 이번 요리는 조금 독특합니다. 요리가 나올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아크가 주방으로 들어갔고 제시카가 입을 헹굴만한 음료를 가져다주었다. 둘은 새콤한 맛에 깜짝 놀랐다. 대체 무엇으로 만든 건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아우라와 엔도라는 배가 빵빵해서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그랑쉐에 처박혀 있었다. 둘의 손목에는 작은 밴드가 하나 채워졌다. 시선의 위치에 따라 색깔이 바뀌는 엄청난 녀석이었다. 아크가 두 아가씨를 정중히 배웅했다.
“또 올 거예요!”
“그때까지 문 닫지 마세요!”
“다시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
.
.
꼬리에 꼬리를 문다는 말이 있다.
치즈 전문점 그랑쉐를 찾은 두 명의 귀족 영애들은 확실하게 아크의 정성에 보답했다. 이 구역의 잘나가는 년은 나야, 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꼬리를 왕창 몰고 온 것이다.
몇 명도 아니고 10명이 넘게 왔다. 그것도 모자라 그녀의 인맥이 몽땅 동원되어 그랑쉐를 휩쓸고 지나갔다. 단지 인사치레라면 모를까, 아우라의 소개로 그랑쉐를 알게 된 사람들은 치즈 요리의 맛에 진심으로 충격을 먹은 얼굴을 하곤 돌아갔다.
―먹어보기 전에는 섣불리 짐작하지 마라. 그랑쉐의 치즈 요리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이게 세간의 주된 평가였다. 심지어 어느 귀족은 화를 내면서 지금까지 우리가 파티에서 즐겼던 미고랭 치즈는 죄다 쓰레기였다며, 치즈를 상전으로 모시는 문화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요리 하나로 이렇게 바뀔 수는 없다. 입맛이란 것은 꽤나 보수적이며, 사람들은 새로운 맛에 적응하길 꺼려하는 경향이 있다. 오랫동안 접해보면서 익숙해져야 비로소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아크는 그 시간을 대폭 줄이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동원했다.
먼저 그랑쉐의 출입권한이다.
아크는 그랑쉐의 문을 소수의 귀족에게만 열어주었다. 자기들만이 이 유행을 즐길 수 있다는 허영심을 심어주려 한 것이다. 거기에 요리를 즐기고 평을 남기면 손목에 밴드를 하나 채워준다. 그랑쉐에 다녀왔다는 증표이고 이걸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이다.
황동으로 된 밴드일 뿐이지만 가공을 잘해서 광택이 나는데다가 보는 위치에 따라서 색깔이 조금씩 바뀐다. 은색으로 보이기도 하고, 완전한 황금색으로 보이는 이 희한한 물건에 많은 사람들이 군침을 흘렸다.
별 쓸모도 없고 제작하는데 10초도 걸리지 않지만 귀족들은 남들과는 다른 뭔가를 얻기를 원했고, 그게 밴드로 충족되었다. 거기에 트라움 황가에서 쓰는 필기체로 그랑쉐의 이름이 음각되어 있으니 허영템으로는 더할 나위가 없다. 아크는 밴드를 팔아달라는 상인들의 요청을 거절했다.
두 번째는 아크가 직접 그려주는 그림이다.
사실 그랑쉐의 요리는 여러 조리기구에 숙련되기만 하면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부엌데기에 불과하던 제시카는 아크와 일하면서 여러 경험을 쌓았고, 마침내 주방장을 꿰차게 되었다.
그녀의 자리는 평민 여성들을 고용함으로써 채웠다. 아크는 대신 손님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려주기 시작했다.
아크의 그림은 길거리의 여느 화가가 그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가 그리는 것은 움직인다. 거기에 상당한 입체감이 있어서 실제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크는 이것을 프로젝트 이미지 마법의 응용이라고 설명했다.
만약 누군가가 대륙 반대편에 있는 마법공학의 총본산 삭사스 공국에 확인해봤다면 아크를 무척이나 수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아크가 가진 매직펜은 최근 개발되긴 했지만 마법적 소양을 필요로 했기에 다루기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마법사이자 마법공학자인 사람만이 매직펜을 다룰 수 있다. 거기에 펜이 그림까지 그려주는 것이 아니므로, 화가의 소양까지 갖춰야 한다. 한 사람이 갖추기엔 불가능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매직펜 따위가 아니다. 브레톤 왕국은 전통적인 전사들이 세운 나라라서 자잘한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들은 그림이 입체적으로 움직이는 것에 열광했다. 자신의 움직이는 초상화를 가지는 게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물론 아크도 상당량의 돈과 영향력 포인트를 얻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아크는 홀연히 가게를 지나가는 그녀를 보았다. 마를레네 애쉬포드. 백금발의 머리칼에 트라움 기사단 특유의 예복을 입은 그녀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저잣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마를레네는 아크를 발견하지 못했다. 아크는 그녀의 옆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얼굴이 꽤나 수척하다.
‘마리…’
그를 찾으러 여기까지 온 것이 분명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그녀의 모습에서 진한 아쉬움이 묻어난다. 하지만 아크는 그녀를 부를 수 없었다. 친족의 죽음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크는 마를레네의 얼굴을 외면하고 말았다.
‘다음에는 먼 곳으로 떠나야겠군.’
마를레네와 제시카가 관심을 두지 않을 먼 곳으로 떠나야한다. 아크는 속으로 그렇게 마음먹으며 주방에서 나왔다. 서빙하던 직원 한 명이 그를 발견하고는 멈춰 섰다.
“아저씨.”
“왜 그러지?”
“저기, 손님이 왔어요. 손님이긴 한데…”
“그런데?”
“키, 키가 엄청 커요. 너무 커서…”
‘자이언트 족이 왔나보군.’
자이언트 족은 그 희귀하다는 실버드 족보다 더 보기 힘든 종족이다. 성인 남성의 키가 2.7m에 달하며 여성도 2.3m에 육박한다. 키가 큰 만큼 덩치도 크고 힘도 세어서 전사로서는 천부적인 능력을 지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종족으로서의 자이언트는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주된 원인은 짧은 수명과 잦은 전투다.
그들은 끊임없이 주위의 언데드와 싸워야 하는 운명을 지녔다. 그건 질병의 마왕이 지상에 존재했을 무렵 자이언트 종족 전체에게 건 저주였다.
자이언트들은 묵묵히 자신들의 운명을 감내했다.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아인종들이 드나들지 않는 대륙 깊숙한 곳에 숨었다. 이게 발리노어 대륙에서 자이언트를 볼 수 없는 이유다.
아크가 홀로 나가보니 정말 커다란 아가씨가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으며 엉거주춤 서 있었다. 키가 너무 커서 머리가 천장에 닿으니 저런 자세일 수밖에. 그녀가 아크에게 난처한 웃음을 보내었다.
“아, 안녕하세요오…”
‘귀여운 아가씨군.’
몸무게가 170kg이나 나가는 귀여운 아가씨다.
============================ 작품 후기 ============================
허미 오늘 덥군요.
에어컨을 켰다간 전기료가 걱정되고 선풍기로 버티자니
반쯤 죽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