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3 피레네 산맥의 사냥꾼 =========================
피레네 산맥의 사냥꾼 - 3
“하아, 하아…”
지쳤다. 지쳐도 너무 지쳤다. 마를레네는 호기롭게 여기에 온 것을 후회했다. 너무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았다.
피레네 산맥의 악명이야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특히 겨울에는 근방의 사냥꾼들도 드나드는 것을 삼갈 정도로 위험한 곳이라고 한다. 단지 추위뿐만이 아니라 환경 자체가 사람을 죽도록 괴롭힌다. 발밑이 무너지고, 길이 갑자기 빙판길이 된다. 거기에 가끔 나타나는 몬스터까지.
하지만 마를레네는 자신이 있었다.
아메르 시에서 피레네 산맥에 빠삭한 안내자를 두 명 섭외했고, 거기에 살고 있다는 사냥꾼에게서 약도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피레네 산맥은 올라가는 것이 좀 힘들 뿐, 반대편 평원으로 내려가는 길은 비교적 수월하다. 그녀는 안내자 두 명의 말을 철썩 같이 믿었다.
‘그런데 이 꼴이 뭔가…’
산 중턱까지 올라가는 데에는 성공했다. 과연 그 사냥꾼은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것이 입증되었다. 두 명의 안내자와 세 명의 기사는 무사히 중턱에 올라 1박을 쉬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문제는 거기에서 터졌다.
눈보라.
겨울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눈보라가 닥쳤다. 하필 캠프를 접고 내려가던 즈음이었다. 급히 굴을 파고 안에 숨었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갑자기 눈사태가 일어나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제국에서 찬란한 위명을 떨치던 황금사자 기사단의 기사들이 다 무엇인가. 그들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거대한 눈사태에 휩쓸렸다. 안내자들은 그 꼴을 보고선 질려서 달아났다. 하지만 그들의 비명소리를 들었으니 오래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마를레네는 고립되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옷가지와 작은 주머니 하나뿐이다. 차원주머니를 부하가 가지고 있었기에 가죽주머니에 든 것은 식량 약간 뿐이다. 발을 접질렸는지 발목이 퉁퉁 부어올랐다.
“추워…”
추위란 게 이토록 무서운 줄은 처음 알았다. 아메르 시와 폴트 마을에서 제법 추위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대단한 착각이었다. 산기슭부터는 공기가 달라졌고, 산 중턱은 아예 목구멍이 얼어붙을 듯한 추위를 선사했다. 마를레네는 죽음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털옷은 이미 얼어붙어서 그녀의 체온을 지속적으로 빼앗고 있었다. 화염 마법로는 너무 추운 탓에 마나를 대부분 소모하고 꺼져가고 있었다. 마를레네는 잠깐 잠이 들었다가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두 발이 얼어붙고 있었다.
‘그냥 지름길만 파악했어야 했는데.’
이제 와선 너무 늦었다. 황금사자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으로서, 제국 황실에 커다란 선물을 안겨주어 기사단장의 콧대를 꺾고 싶어 무리를 한 게 화근이었다. 정말 피레네 산맥이란 게 이렇게 지독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마를레네는 그제야 아크라는 청년이 알려준 오르막길이 얼마나 안전한 곳인지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조금 미끄러지는 것을 제외하면 큰 위험은 없었던 길이다.
그는 숙소의 주인장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조금이라도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되돌아오라고 말이다. 그 건방 떨던 안내자들은 그의 충고를 무시하고 길을 재촉했다.
마침내 결과가 나왔다. 네 명은 거의 확실하게 죽었을 것이고, 나머지 한 명도 죽어가고 있다. 마를레네는 다리 쪽의 감각이 없어진 것을 느꼈다. 동상에 걸린 걸까?
‘귀찮아…’
이런 생각조차 귀찮아질 정도로 그녀는 지쳐 있었다. 이제 쉬고 싶다. 이 추운 곳에서 해방되고 싶다…그녀의 눈이 스르륵 감기고 얼마 후, 어떤 힘이 그녀를 눈으로 된 굴에서 끄집어내었다.
“여기 있었구만.”
크르르르―
아크는 플라이 마법으로 하늘에 떠서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마를레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딩고가 눈밭에 누운 그녀의 냄새를 킁킁거리며 맡는다.
“위험한데.”
체력이 거의 바닥까지 내려가 있다. 골절과 동상은 옵션이다. 지금 아크의 눈에는 마를레네의 상태가 낱낱이 드러나 있었다. 그녀가 실낱같은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일단은 살려야겠군.”
그는 마를레네를 하늘에 띄운 채 날아갔다. 딩고가 크게 짖으며 그의 뒤를 따른다.
.
.
.
타닥타닥.
장작이 불꽃에 휩싸여 열기를 뿜어낸다. 그리 크지 않은 오두막은 후끈후끈했다. 아크는 딩고를 내쫓고 마를레네를 털방석 위에 눕혔다. 그리고 가만히 상태를 관찰한다.
“일단은 옷을 벗기고…”
칼로 얼어붙은 털옷을 잘라내었다. 칼날에 약간의 마나가 어리더니 아주 손쉽게 얼음덩이를 제거해나갔다. 피레네 산맥에 오른다고 옷을 너무도 많이 껴입었다. 이래서야 제정신이라고 해도 벗기가 어려울 것이다.
“에라이, 모르겠다.”
귀찮아져서는 옷을 몽땅 찢어버렸다. 그 덕분에 마를레네의 아름다운 나신이 드러났다. 장작불의 빛에 그녀의 육체가 도드라져 보인다. 하지만 아크는 그녀에게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몸매가 훌륭하긴 하지만 그는 너무 많은 여자를 겪었다.
“우선은 물기부터 닦고.”
그녀의 몸을 뒤집어 가며 물기를 닦는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정말 몸매가 훌륭하다. 특히 가슴의 융기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흠흠.”
괜히 땀을 닦는 척하며 살짝 건드려본다. 허리를 거쳐 탱탱한 엉덩이와 육덕진 허벅지도 마음껏 감상한다. 무릎 아래에서부터 발목까지 이어지는 선이 대단하다. 기사임에도 불구하고 발은 또 왜 이렇게 예쁠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마를레네의 발은 동상에 걸려 있는 상태였다. 아크는 헝겊을 치우고 붕대와 특제 포션을 꺼냈다. 반 시체도 살려내는 절대적인 효과를 자랑한다.
아크의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을 비집었다. 동시에 머리를 뒤로 꺾어 숨이 막히지 않게 조치하고 포션을 흘려 넣었다. 꼴롱꼴롱 소리가 나며 맑은 액체가 목구멍 안으로 들어간다.
울컥.
먹다가 어디에 걸렸는지 그녀가 포션을 토해내었다. 하지만 대단한 양은 아니라 입술을 닦아주는 선에서 끝낸다. 이제 한결 따스해진 그녀의 몸을 깨끗한 털옷으로 둘둘 감아 장작불 옆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어느새 편안한 표정으로 잠들었다.
그와 동시에 아크의 시야에 메세지가 하나 떠올랐다.
「영향력 포인트 500획득!」
영향력 포인트란 아크가 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을 숫자로 환산한 것이다. 물건을 파는 등의 아주 자그마한 것도, 사람을 살리고 나라를 세우는 등의 모든 일이 포인트로 환산된다.
그 중요도에 따라서 포인트는 다르다. 특산품을 팔 때는 2 포인트가 올랐고 마를레네의 생명을 살린 후에는 500포인트가 올랐다. 아크는 과거 동방대륙 원정을 떠나는 선단을 구출한 적이 있었는데, 700명의 목숨을 구한 덕분에 7,000포인트를 한꺼번에 얻은 적도 있었다.
영향력 포인트는 여러 곳에 투자할 수 있다. 스탯에도, 원소저항에도, 스킬에도 투자할 수 있다. 심지어는 생명에도 투자가 가능해서 지금 아크는 무려 27개의 생명을 갖고 있는 상태였다.
사람을 데이터화하고 여분의 생명을 저장한다니. 정말 황당한 일이지만 아크는 이미 500년이나 겪었기에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시스템을 만든 것이 누구인지는 궁금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를레네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올렸다.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다. 낯선 천장이 그녀를 반겼다.
“여긴…쿨럭.”
“일어나셨군요.”
마를레네는 가까스로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아내었다. 식당에서 만났던 피레네 산맥의 사냥꾼, 아크다.
“나, 나는 어떻게 된 건가? 그대는…”
그녀가 몸을 일으킨다. 그 때문에 털옷이 스르륵 흘러내려 상반신을 노출하게 되었다. 마를레네의 몸이 멈추었고 아크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안 봤습니다. 옷 입으십시오.”
“…”
수치심이 그녀를 감싼다. 동시에 자신이 알몸이라는 것도 뒤늦게 자각했는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옷이 다 벗겨져 있다는 말은, 다 봤다는 말 아닌가.
‘잠깐, 나는 분명 눈 속에서…’
이제야 기억난다. 기분 좋게 잠에 취하려 했던 과거의 자신이 말이다. 발에서 감각이 느껴지지 않아 당황했던 것도 떠올랐다. 그대로 있었으면 분명 죽었을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 그대가 나를 구한 건가? 눈 속에서?”
“맞습니다.”
“어떻게…어떻게 나를 구했지? 난 눈 속에 파묻혀 있는 상태였는데.”
“딩고…제가 키우는 세이버투스는 무척 냄새를 잘 맡습니다. 마를레네님의 냄새를 추적하는 것쯤은 식은 스프 먹기죠.”
“내가 거기에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고.”
“눈사태가 일어난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비명소리를 듣기도 했고요.”
그랬던가. 마를레네는 그제야 긴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이 남자는 자신을 발견해 구해준 것이다. 그녀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고, 고맙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아무튼 고맙다. 고맙다는 말 밖에 할 수 없군…”
아크는 작게 웃음 지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어쩌죠? 발은 아직 안 나았습니다.”
“그, 그렇지. 분명 동상에 걸렸을 터인데…”
불안감과 초조함이 섞인 말투다. 아크는 그녀를 약간 곯려줄까 하다가 말았다. 저렇게 어깨와 윗가슴을 드러낸 체 발을 어루만지고 있는 걸 보면 불쌍하게 느껴진다.
“포션으로 치료했습니다. 내일쯤이면 완쾌될 겁니다.”
“포션으로? 그대는 연금술사인가?”
“아닙니다. 다만 인연이 조금 있어 포션을 몇 개 구비하고 있습니다. 피레네 산맥은 위험한 곳이니까요.”
마를레네는 납득했다. 여기처럼 혹독한 곳도 거의 없으리라. 눈앞의 사냥꾼이라면 준비도 철저할 테니 분명 어떤 통로를 이용해서 포션을 구비했으리라 하는 생각이 든다.
하여튼 살았다.
마음이 편해지자 몸도 좋은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거의 10시간을 굶은 그녀의 배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었고 마를레네는 얼굴을 붉혔다. 부끄럽게도 외간남자 앞에서 이리도 직설적인 신호를 보내다니.
“꽤 굶으셨겠군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얼마 지나지 않아 아크가 한 접시의 요리를 그녀에게 내어놓았다. 두툼한 살덩이에 걸쭉한 액체가 뿌려져 있는 이 요리는 대체 무얼까? 냄새를 맡아보니 매우 향긋하다. 마를레네는 군침이 절로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 이건 뭔가?”
“훈제 연어에 미고랭 치즈를 끼얹은 것입니다. 아주 진하고 고소할 겁니다.”
훈제 연어에 미고랭 치즈라니!
마를레네는 그 호화스러움에 감탄했다. 훈제 연어야 그렇다 치고, 미고랭 치즈는 이웃 브레톤 왕국의 특산품 아닌가. 생산량이 극히 적어서 제국의 귀족들도 제대로 맛보기 힘든 그 치즈가 한낱 사냥꾼의 요리에 쓰여졌다니 정말 놀랄 일이다.
마를레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접시와 포크를 받아 허겁지겁 해치웠다. 입 안에 풍미 가
득한 연어살을 가득 밀어 넣고 우물우물 씹는다. 미고랭 치즈와 훈제연어살의 이 환상적인 조화라니! 마를레네는 설움에 북받쳐서 하마터면 울 뻔했다.
여기사의 식성에 한 덩이의 훈제연어가 작살나는 것은 금방이다. 아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또 요리를 내어놓았다. 바닥에서 연어살을 꺼내고, 차원주머니에서 미고랭 치즈 덩어리를 꺼내는 것 같다. 마를레네는 그가 요리하는 과정을 진지하게 지켜보았다.
‘대, 대단하구나…’
그녀는 요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아크의 칼을 다루는 솜씨가 범상치 않다는 것은 분명히 알게 되었다. 솜씨가 충분히 숙련되면 아주 쉽게 일을 처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사도 그렇고, 요리사도 그렇다.
아크는 아주 쉽게 연어살을 발라내고 미고랭 치즈에 열을 가해 녹아내린 것을 긁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열을 가할 때 쓰는 것은 마법로였다. 그것도 마를레네가 갖고 있는 것보다 훨씬 작고 정교해 보이는 것이다. 그녀는 아크의 정체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이 사람…정체가 대체 뭐지?’
그런 의문도 잠시, 마를레네는 자신 앞에 놓인 접시를 보고 군침을 삼켜야 했다. 미고랭 치즈가 연어살 전체를 가득 덮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