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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을 살아온 남자-2화 (2/217)

00002 피레네 산맥의 사냥꾼 =========================

피레네 산맥의 사냥꾼 - 2

세이버투스를 데리고 사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다른 문제도 있지만 식비가 까다롭다. 녀석들은 몸집에 걸맞게 많은 양의 고기를 먹어치운다.

하지만 딩고는 스스로 식비를 해결해서 지하의 부담을 덜어주고 있었다. 녀석은 어느새 산돼지를 사냥해 와서는 통째로 씹어 먹고 있다. 그 진귀한 광경에 폴트 마을 유일한 식당에 들른 사람들은 입을 딱 벌리고 쳐다보고 있었다.

“잘 씹어 먹어. 나중에 뼈 빼달라고 하지 말고.”

크르렁

지하의 핀잔에 딩고가 작게 포효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움찔했다.

유지하, 아크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은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 상인들의 아귀다툼에서 겨우 벗어나 한가하게 빵을 스프에 적셔서 먹고 있으니 살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앞을 가로막는 그림자가 있었으니.

“잠깐 합석해도 되겠는가?”

다소 날카로운 목소리에 아크는 고개를 들었다. 백금빛 머리칼에 에메랄드 눈동자를 가진 묘령의 여인이 테이블 옆에 서 있었다. 그녀의 좌우에는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남자 두 명이 호위하듯 서 있다. 두툼한 털옷에 모자, 허리춤에는 검을 찼다.

‘제국의 기사들이군.’

트라움 제국. 발리노어 대륙에서 가장 강대한 국가 중 하나다. 대륙의 1/10이나 되는 넓은 땅덩이를 차지하고 있으며 비옥한 곡창지대를 소유하고 있다. 폴트 마을도 당연히 트라움 제국의 영향력에 포함된다. 워낙 척박하고 제국의 수도에서 먼 곳이라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긴 하지만.

“앉으십시오. 저를 찾아오신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 내 이름은 마를레네 애쉬포드. 애쉬포드 가문의 장녀이며 황금사자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이다.”

당연하다는 듯 남자 두 명의 소개는 생략한다. 아크는 그녀가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애쉬포드라. 무한의 서고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

“아크라고 불러주십시오.”

“성은 없는가?”

“화전민 출신이라서 없습니다.”

남자 두 명의 눈썹이 비웃듯 꿈틀거리는 게 느껴진다. 사실 화전민 출신이라는 건 거짓말이다. 신분을 속이기에 적합한 핑계였기에 자주 써먹고 있을 뿐.

“좋다. 아크. 그대에게 묻겠다. 그대는 피레네 산맥에서 사는 사냥꾼인가?”

“그렇습니다. 저 중턱에서 살지요.”

아크가 가리킨 곳은 구름에 가려져 있는 어딘가였다. 깎아지른 듯한 험준한 산세에 마를레네는 기가 죽은 듯했다.

“그러고 보니 그대는 이 추위에도 대비를 하지 않았는데…춥지 않은가? 셔츠에 조끼 하나가 고작이라니.”

아무래도 마를레네와 두 기사들은 아크의 옷차림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 산 위쪽에 비하면 한결 추위가 덜하긴 하지만 물을 뿌리면 그대로 얼음이 되어 얼어붙을 가공할 정도의 추위다.

마를레네의 목소리도 약간씩 떨리고 있었다. 허리춤이 불룩한 걸로 봐서는 화염 마법로를 쓰고 있음이 분명해 보이는데도.

“이 지방 사람들은 추위에 비교적 익숙합니다. 저 또한 그렇고…정 추우면 화염초를 복용하고 있습니다. 몸의 온도를 올려주지요.”

“화염초 그 비싼 것을? 하긴, 그대는 진귀한 특산품들을 많이 캐니 그럴 수도 있겠군.”

“저에게 어떤 용건이 있으십니까?”

아크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마를레네는 뒤의 기사에게 눈짓했다. 기사가 묵직한 주머니를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아크의 시야에는 얼마가 들었는지 보인다.

「9만 9900리블」

아크는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누군가 100리블을 빼먹었나보다.

“10만 리블을 주겠다. 피레네 산맥을 넘는 지름길을 가르쳐 다오.”

지름길? 지금 이 여자가 제정신으로 말하는 건가? 아크는 어이가 없어서 마를레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인형같이 예쁜 얼굴이다. 어지간히도 추운지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북쪽 빙하가 있는 해안가로 말입니까?”

“그래. 거기로 가는 지름길을 가르쳐 다오. 밑의 도시 아메르에서 그대라면 알고 있을거라고 말하더군.”

아메르는 트라움 제국 최북단에 있는 도시의 이름이다. 폴트는 가장 추운 마을이고, 아메르는 가장 추운 도시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둘 다 욕이 튀어나올 정도로 추운 곳이라는 점은 같다.

“있기는 합니다만, 쉽게 통과할 수는 없을 겁니다. 몬스터야 찾아보기 힘들겠지만 추위와 환경이 문제죠. 정말 위험합니다, 거기는.”

“그것은 그대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그대는 올라가는 지름길만 알려주면 된다. 우리도 나름의 안내자를 고용했다. 20년 이상 이 지방에서 모험을 해 온 사람들이지.”

거절할 이유가 없다. 아크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군요. 제가 약도를 그려드리겠습니다. 나무와 바위에 표시를 해 두었으므로 수월하게 올라갈 수 있을 겁니다.”

“잠깐, 나는 그대가 직접 안내를 해주길 원하는데…”

“어렵겠습니다. 저는 이 놈을 타고 올라갈 예정이라서.”

아크가 손을 내려 딩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녀석은 어느새 산돼지를 다 먹어치우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마를레네는 그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수긍하기로 했다.

그가 거절한다고 해서 반강제로 안내를 시킬 입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는 제국의 최북단이다. 그 말은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다는 말과 동일하다.

“좋다. 그렇다면 약도는 어떻게 받으면 되지?”

“내일 아침까지 이 숙소 주인 편으로 약도를 맡겨두겠습니다.”

“그대는 이 근방에서 신뢰가 대단하다고 들었는데…믿어보겠다.”

“예. 그럼.”

아크는 주머니를 쥐고 일어났다. 딩고가 그의 뒤를 따라 어슬렁거리며 걸어간다. 다들 익숙한지 커다란 세이버투스에도 놀라지 않는다. 마를레네는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특이한 사람이군…”

.

.

.

아크는 마을 한 구석에 자리 잡은 낡아빠진 판잣집에 짐을 풀었다. 여기는 그가 폴트 마을에 들를 때마다 머무는 곳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기 싫고, 혼자만의 공간이 있어야겠기에 만든 곳이다.

대륙 최북단은 해가 엄청나게 짧다. 겨울이기도 해서 낮이 끝나고 바로 해가 지는 것처럼 보인다. 마을 곳곳에 횃불이 켜졌고 순찰자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작은 판잣집에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간다.

딩고는 저녁 사냥을 하러 나갔고 아크는 불빛에 의지한 채 책을 펼쳤다.

“애쉬포드…애쉬포드…여기 있군.”

이 책은 발리노어 대륙에서 찾아볼 수 없는 진귀한 아이템이다. 아케인 라이브러리, 무한의 서고에 직접 연결되어 온갖 자료를 찾아볼 수 있는 책이다. 아크는 이 마법책을 미르위키라고 부르고 있었다.

미르위키에는 그가 작성한 수백 년 세월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애쉬포드라는 성은 분명히 그의 기억에 존재했다.

“보레이 애쉬포드…”

「보레이 애쉬포드 : 애쉬포드 가문의 시조. 리리아 도르안과 결혼하여 아들 후스트 애쉬포드와 딸 에트린느 애쉬포드를 낳았다. 제국의 7기사 중 한 명이며 개국공신이기도 하다. 굉장한 술고래이며 취하면 아내 자랑을 크게 외치는 공처가이기도 하다. 그는 돌리오네라는 공주와 염문을 뿌리기도 했는데 리리아에게 머리끄덩이를 잡혀…」

‘내가 이렇게 썼던가?’

500년을 살아오다 보니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아크는 쓴웃음을 지으며 책장을 넘겼다. 마법공학 시스템이 적용된 책장은 그가 찾는 페이지를 정확하게 찾아내어 표시한다. 이를테면 전자종이나 다름없다.

한참동안 자신이 쓴 글을 읽던 아크는 피식피식 웃었다. 보레이란 금발의 애송이가 얼마나 자신의 바지자락을 잡고 늘어졌는지 기억났기 때문이다. 제발, 제발 자신의 곁에 있어 달라고, 원하는 건 모두 주겠다고 그랬던 녀석이…

‘이제는 없지.‘

그는 제국의 개국공신으로서 장엄한 장례식을 거쳐 고이 안장되었다. 아크는 그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아는 사람의 죽음은 그에겐 너무나 익숙한 것이다.

‘그럼 그 아가씨는 대체 몇대손이야…’

미르위키에는 보레이가 대륙력 215년에 죽었다고 적혀 있다. 대륙력이 사라지고, 이제 트라움 제국력이 이 부근의 기준이 된다. 대륙력 221년에 트라움 제국력이 탄생했고, 지금은 172년이다. 보레이가 죽은 뒤 178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는 계산이 된다.

‘그럼 적당히 적어야지.’

새로운 기록은 아크가 좋아하는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기록한다. 그가 만난 사람들, 신기한 경험, 새로운 음식과 여러 지방의 독특한 풍습까지. 제법 이름이 있는 것이면 그의 기록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게 아크는 무한의 서고에 발리노어 대륙에서 500년 동안 겪은 일들을 기록해왔다. 6,000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언제 여기에 왔더라?’

아크, 유지하는 발리노어 대륙의 사람이 아니다. 500년 전 그는 지구인이었다. 도서관에서 집으로 귀가하다가 벼락에 맞고 이계로 소환된 것이다. 그야말로 환장할 일이었다.

‘그때는 정말 죽을 뻔 했었는데.’

그를 살린 것은 시스템의 힘이다. 체력과 힘, 민첩을 비롯한 각종 스탯은 물론이고 스킬까지 배울 수 있는 대단한 것이었다. 조리를 하면 조리 스킬 경험치가 올라 포인트를 얻는 식이다. 그렇게 얻은 포인트는 여러 곳에 투자할 수 있어서 능력을 향상시키기에 좋았다.

그 시스템이 없었다면 골백번 죽었을 것이다. 그가 처음 도착한 곳은 피레네 산맥의 중턱, 지금의 오두막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필 계절도 겨울이라 무시무시하게 추웠고, 그는 시스템의 안내에 따라 화염초를 채집해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아크는 그때 처음 알았다. 이계의 언어도 스킬화되어 쉽게 배울 수 있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리블 금화도 정확하게 셀 수 있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폴트 마을에서 일했었다.

그 후로 세월이 지났다. 아크는 100년마다 폴트 마을에 들렀다. 그의 마음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바뀌었고,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폴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갈수록 줄어 이제는 인구수가 100명 남짓하다. 앞으로 30년 정도만 더 있으면 마을 자체가 사라질 것 같다. 가장 젊은 사람이 40세에 가깝다.

‘그때가 되면 더 이상 오지 말아야지.’

아크는 500년 동안 살아 있다. 그는 세 번의 죽음을 맞이했으나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영향력 포인트를 쌓아 여분의 목숨을 만들어두었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이제는 죽을 일이 없다. 발리노어 대륙에서 그를 죽일만한 존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까. 아크는 마를레네에 대해 적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잠깐, 혹시 마나석 광맥을 찾아서 왔나?’

여기에 제국의 기사들이 찾아올 이유라곤 그것뿐이다. 아크는 혀를 쯧쯧 찼다. 왜냐하면 피레네 산맥의 북쪽에 있는 마나석 광맥은 얼마 전에 캐버렸기 때문이다. 혹시 그걸 찾아서 왔다면 분명 허탕을 칠 것이다.

“흐음. 어쩐다.”

자그마치 보레이 애쉬포드의 후손이다. 그 애송이와 얼마나 친교를 나누었던가. 비록 그의 후손과는 처음 만난 것이긴 하지만 곤경에 처하도록 내버려두고 싶지는 않았다. 아크는 휘파람을 불었다.

‘살펴봐줘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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