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12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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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한 답변에 백선우가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예전에 해가준의 눈에는 자신이 무섭게 비치지 않아서, 각성한 후에도 전과 같이 대했다는 이야기는 기억했다. 하지만 아예 처음부터 자신에게만 가까운 거리를 허용했다는 소리는 꽤 놀라웠다.

그사이 가준은 새삼스레 능력에 대해 생각하는지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 영향으로 너한테 약한 것도 있으려나.”

어쩐지 백선우는 심장이 선득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영장에서 빠져나온 가준의 모습에 두근거리고 있었는데, 불현듯 차오른 불안감에 손이 떨렸다.

백선우는 지금껏 착하다는 이야기를 수백, 수천 번도 넘게 들었다. 가준에게서도 그런 소리를 숱하게 들었지만…… 백선우가 머뭇머뭇 제 손을 뒤로 숨기며 물었다.

“그럼…… 내가 착하지 않으면, 싫어질 수도 있겠네……?”

웅얼거리는 듯한, 혼잣말에 가까운 질문이었으나 단박에 해가준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어쩌면 백선우는 투정에 가까운 말을 한 것일지도 몰랐다. 평소의 가준을 생각하면 그는 그렇지 않다고, 대체 무슨 헛소리냐고 반응할 테고, 그러면 금방 가라앉을 마음이었다. 그러니 가준이 곧바로 부정해줄 것이라 기대했는데…….

해가준이 침묵했다.

조금 놀라고도 당황한 눈빛. 입술이 두어 번 달싹거리다가 끝내 꾹 닫히고, 턱 끝에 고인 물방울이 떨어졌다. 소리 없는 추락이었으나 그 순간 백선우는 무언가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얼굴이 살짝 하얗게 질린 채로 백선우가 재빨리 사과하려 했다. 이 주제를 피하고 싶었다.

“미안해. 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아니, 사과할 게 아니라, 그냥 아예 상상이 안 돼서…….”

“……응?”

“네가 든 예시가, 나한텐 누나가 착하단 소리랑 비슷하게 들려서 좀 당황하고 있었는데…….”

해가준이 떨떠름하게 답했다. 이제 백선우는 웃어야 할지 고민하는 낯이 되었다.

처음에 가준은 백선우의 말에 곧바로 무슨 헛소리냐고 반응하려 했다. 그러다 문득 그가 착하지 않은 경우를 상상해 보려 했는데, 아예 상상 자체가 되지 않았다. 아주 조금이라도 백선우가 나쁜 행동을 저지르는 게 그려지지 않았다.

이내 가준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네가 나쁜 일을 저지르더라도, 그건 그렇게 만든 상황이 문제일 거란 생각밖에 안 드는데.”

“…….”

“그리고 애초에 나는 능력 때문에 널 좋아한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 대체 무슨 걱정이야? 능력 때문에 너한테 약한 걸지도 모르겠다고 했지만 그건 좋아하는 것과 별개지.”

단호하게 이어지는 목소리를, 백선우는 멍하니 듣기만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안하게 뛰던 심장이 어느새 평온을 되찾았다. 아니, 평온을 넘어서 기쁨으로 뜀박질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있어 해가준은 언제나 말 한마디만으로도 상태를 바꾸게 하는 존재였다.

쿵, 쿵, 쿵. 심장 고동이 크게도 울렸다.

“또 능력의 영향으로 너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다르게 생각하면 오히려 너한테 유리하지 않나? 나는 능력 때문에 네 본성이 착하다는 걸 깊이 느끼니까, 너는 그대로 가만히 있기만 해도 나는 널 좋아할 수밖에 없는 거잖아.”

백선우가 착한 성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다. 애초에 해가준은 그의 타고난 천성을 느낄 수 있고, 그러한 성품은 쉬이 변하는 종류가 아니었다.

상황에 따라 흐려질 수는 있을지언정 변질되지 않는 본질이 있었다. 눈짓 한 번으로 타인을 무릎 꿇릴 수 있는 복종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누군가를 낮잡아보거나, 스스로의 우월감에 취하지 않는 모습만 보아도 확실했다.

“굳이 따지면 나는 널 좋아할 운명인 거려나…….”

가준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에 백선우가 흠칫했다. 숨기려 하지만 귀 끝이 붉어지는 것이 훤히 보여서 가준이 실소하자, 백선우가 민망해하며 다급히 화제를 돌리려 했다.

“그럼, 그러면 만약 나보다 더 착한 사람이 나타나면-.”

-쪽, 소리가 그대로 말을 끊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난 소리와 입에 닿은 감촉에 백선우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해가준이 아예 말을 막을 요량으로 입을 맞췄다는 걸 알면서도 차마 항의할 수가 없었다.

또한 전신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변화도 멈출 수 없었다. 마침 수영복을 입고 있어서 숨기지도 못했다. 가준은 그런 변화를 느긋이 지켜보며, 한껏 붉어진 백선우의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그런 짓을 저지르면 내 능력이 자폭시킬 확률이 높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 아니, 그건…….”

“하여간, 너는 ‘만약에’라는 상상을 좀 줄여야 해. 툭하면 불안해하고.”

“……너도 ‘만약’에 기반한 걱정은 많이 하잖아.”

“뭐?”

“내가 다칠까 봐 불안해서 오늘 계곡에도 못 들어가게-.”

“이거랑 그건 다르지.”

가준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나는 실재하는 위험을 대비하는 거라니까? 바위에 잘못 부딪히면 골절될 수도 있고, 또 물에서 놀다가 수심이 깊은 곳으로 쓸려 갈 수도 있고.”

줄줄이 이어지는 가정에 백선우는 어쩐지 긴장이 풀려버렸다. 이제는 익숙해진 걱정에 그저 웃음만 나왔다.

가준은 고개까지 내저으며 다르다고 주장했으나 백선우에겐 두 가지가 비슷해 보였다. 그래서 외려 조금 전 가준의 반응이 이해가 되었다.

자신이 다칠까 봐 걱정하는 가준의 불안이 제게는 어떻게 보이는지, 그리고 제가 나빠지면 가준의 마음이 변할까 불안해하는 것이 그에게는 어떻게 비칠지. 아마 똑같을 듯했다.

“계곡에서 일어나는 연간 사고 건수가-.”

-쪽, 쪽, 쪽, 소리가 역으로 말을 끊었다. 이번엔 백선우가 가준을 붙잡고 입을 맞추면서 난 소리였다. 심지어 아하하, 맑은 웃음소리도 함께하여 가준이 잠깐 그를 노려보았으나, 결국에는 헛웃음과 함께 백선우의 뒷머리를 붙잡았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깊이 입을 맞췄다.

가준은 제 말을 끊는 백선우의 행동이 발칙한데 그 와중에 그의 몸은 붉으니 귀엽단 감상만 들어서, 참 이것도 이상한 사고의 편향이라 생각하며 몸을 움직였다. 사실 조금 전 대화 속에서 몇 번이고 ‘좋아한다’는 단어를 언급하면서 속이 간지럽던 차였다.

어쩌면 오랜만에 즐겁게 물에서 논 영향도 있을 테고, 또 함께한 사람이 백선우인 영향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제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반응할 만큼 자신만 바라보는 그에게 애정을 확인시켜 주고 싶단 마음이 불쑥 들어서.

분위기에 취하듯 가준이 백선우의 허벅지 위로 올라타며 입맞춤을 쏟았다. 백선우가 잠시 움찔했으나 이내 조심히 가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 손이 떨린다는 것을 느낀 가준이 키스하던 중 작게 실소했다.

입술 새로 간질간질한 숨결이 퍼졌다.

“이것도 매번 떨리고 설레?”

“……응. 언제나.”

백선우의 답은 모든 방면에서 진심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가준의 눈동자에 비치는 것이 그러했고, 또 옷 한 겹 없이 맞닿은 상체에서 느껴지는 심장 박동이 그러했다. 가준은 새삼 제 심장 고동 또한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로운 장소와 색다른 상황이 감정을 더욱 키우고 부추기는 것만 같았다. 어쩐지 숨이 차서 내뱉은 숨이 꼭 달뜬 한숨처럼 들렸다. 가준은 충동적으로, 어쩌면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던 일을 시도했다.

고개 숙인 가준이 백선우의 목덜미를 잘근잘근 깨물며 흔적을 남겼다. 백선우는 제 목에 닿는 그의 숨결에 움찔했다가, 이내 그 또한 숨을 토해내며 가준의 등허리를 매만졌다. 손길이 짙어질수록 몸에 남은 물기가 열을 머금었다.

수영장이라 소리가 은근하게 울렸다. 츕, 츄웁, 가준이 목덜미와 쇄골 부근을 빨면서 나는 소리나 백선우의 입에서 터지는 한숨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가준은 제가 올라탄 허벅지가 점점 단단해지는 변화를 고스란히 느끼며 입술을 내렸다.

하얀 몸에 남는 붉은 자국이 퍽 마음에 들었다. 제가 남긴 자국의 위를 입술로 가볍게 훑으며, 간간이 신음을 토해내는 백선우의 얼굴을 감상했다. 자신이 주도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먼저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주어지는 자극에만 응하는 얼굴이 지극히도 야했다.

옅은 숨결에마저 흠칫흠칫 떨다가, 조금 괴로운 듯 백선우가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평소에는 한없이 착하고 순수하게마저 보이는 얼굴이면서, 이렇게 색욕에 흐트러진 모습을 마주할 때면 배덕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배덕감은 기묘할 정도로 중독적이었다.

새삼 가준은 백선우의 걱정이 황당하다 생각했다. 본인이 더는 착하지 않으면 제 애정이 식을까 봐 걱정하다니,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진짜 나쁜 인간이라면 그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와 자신을 비교 선상에 두면, 지금 그의 얼굴이 색욕으로 물드는 것을 즐거워하고 심지어는 곧 우는 모습을 볼지도 모른단 기대감마저 드는 자신이 더 나쁜 쪽에 가까웠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돌연 웃음이 비식 새어 나왔다. 가준이 쇄골에 입술을 묻은 채로 웃자 백선우가 물었다.

“갑자기, 하아, 왜 웃어?”

“내가 새삼 쓰레기 같아서.”

“가준이는, 자아 성찰을 자주 하는 편이구나…….”

“……아니라고 부정부터 해야 하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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