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2/137)

102화.

순간 가준이 멍해졌다. 자신이 언제 그런 말을 했는지 천천히 되짚다가, 가까스로 어제의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 그것까지 신경 쓰기엔 피곤할 듯하고…….’

가준의 입이 벌어졌다. 당시 왜 자신을 좋아하냔 혼잣말에 백선우가 답하려는 순간, 그렇게 말하면서 답을 막았었다. 그땐 갓 일어난 백선우도 혼란할 테니 굳이 들쑤시고 싶지 않아서 했던 말이라지만…….

“그게,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탄식에 막막한 기운이 서렸다. 사실 그 발언에 알고 싶지 않아 하는 마음이 정말 단 한 줌도 없었는지 확신할 수 없어서,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해명하는 것조차 자괴감이 들었다. 가준은 조금 더 스스로가 쓰레기 같아졌다.

그즈음 신승민이 돌아왔다.

“뭐야, 분위기가 갑자기 왜 이렇게 바뀌었어……?”

순식간에 어두워진 분위기가 당황스러운 듯 신승민이 안경테를 들어 올리며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둘 중 아무도 그를 쳐다보지 않아서, 결국 신승민은 머쓱하게 테이블에 서류만 올렸다.

“이 상태에선 네가 누군가에게 종속된 영향을 크게 받거든. 그러니까-.”

“그거 저예요.”

“……응?”

놀란 신승민의 옆으로 백선우가 빤히 가준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백선우가 진실을 일부러 숨기고 있었는데 가준이 냉큼 그것을 밝혔다.

“선우가 종속된 사람이 너라고……?”

“네. 수련원에서 너무 많은 일이 벌어져서 충동적으로 종속 맺었던 건데, 혹시 이걸 풀 방법이 없을까요? 이거 풀면 얘 영혼, 아니, 생명력에 도움 되겠죠?”

“…….”

“종속된 상태만으로도 정신적 부담이 있을 테니까 빨리 해결할 방법 찾아야-.”

“아, 진짜 고마워!”

갑자기 신승민이 덥석, 가준의 손을 붙잡았다. 양손으로 감싼 행동이 무척 간절하여 순간 가준도, 백선우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가준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해결할 방법 찾으려 해서 고맙다고요……?”

“아니, 너한테 종속돼서 정말 다행이라고! 사실 생명력이 10% 밑이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거든? 그런데 얘가 버티고 있는 게 종속 때문이야!”

“……?”

가준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소리라 어리둥절하게 있으니 곧 신승민이 테이블에 종이를 펼쳤다. 졸라맨을 그리는 손길이 다급했다.

“종속된다는 건 상대방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게 되는, 일종의 강박이 생기는 것과 똑같아. 다르게 비유하자면 사명이 생긴다고 해야겠지. 이런 사명은 아주 강한 의지기 때문에, 그게 외려 선우의 생명력을 끈질기게 하고 있단 소리야!”

“……저를 지키기 위해서 버티고 있다는 소리인가요?”

“오, 너 이해 빠르구나. 바로 그거야!”

“하지만, 제가 위험해지면 백선우가 저를 지켜주는 과정에서 죽을 수도 있잖아요?”

“그렇지. 그래서 지금 선우 상황에 종속은 양날의 검인데, 그 대상이 너잖아.”

“……?”

신승민이 다시금 가준의 손을 꼭 붙잡았다.

“너, 이번에 신수 계열로 각성한 해가준 아니야? 아직 언론에는 공개되지 않았다지만 H.N엔 다 알음알음 퍼졌어.”

“……그게, 무슨 연관이 있나요?”

“네가 쉽게 위험해질 리 없다는 소리지! 무려 신화급 이능력자에, 가족 인맥도 빵빵. 만에 하나 네가 선우의 약점이라는 게 퍼지더라도 감히 너를 인질로 삼으려 들 인간조차 없지. 선우 선까지 올 것도 없이 네 가족 선에서 막히니까!”

그의 가족 정보도 모두 알고 있다며 신승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수 계열의 이능력자에 대한 정보는 기본적으로 파악해야 했다. 개인 정보 보호 차원을 넘어서, 그 ‘개인’ 자체를 제대로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간혹 이능력자를 삿되게 이용하려는 인간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해가준은 그런 위험에서 완벽하게 안전하다고 해도 되었다. 할머니는 저명한 S급 이계 연구원에 H.N의 공동 창단자, 누나는 이능청 부서장, 그리고 부모님은 일반인이지만 어머님은 대검찰청 소속 검사에 아버님도 대기업 임원. 친척에도 큰 문제가 없다.

신승민은 지금껏 고민한 것이 싸악 해결되는 기분을 만끽하며, 그대로 가준의 손에 얼굴을 묻고 훌쩍였다. 사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막내 단원 앞에서 최대한 침착하게 행동하느라 애를 썼던 그였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그리고 너희 친하지?”

“……갑자기 그건 왜요?”

“종속된 상대랑 가까이 붙어 있으면 선우 생명력 회복에 더 좋-.”

“실장님, 괜찮아요.”

백선우가 다급히 신승민의 말을 끊었다. 다소 차가운 기운마저 서린 목소리였으나, 가준은 신승민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가까이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게 정확히 무슨 소리인데요?”

“말 그대로야. 둘이 함께해야, 즉 네가 안전하다는 게 선우에게 보여야 좋다는 거지. 종속되면 기본적으로 상대방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게 되니까, 그런 부담을 덜어주는 게 스트레스 해소에도 도움이 된다는 소리인데…….”

신승민이 슬쩍 가준의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그래서 나는 솔직히, 가준이 네가 선우 집에서 며칠만이라도 머물러 주면 좋겠-.”

쾅! 기어이 백선우가 책상을 내리치며 일어섰다. 신승민은 제 발언에 해가준이 난감해할 줄 알았는데 외려 백선우에게서 반응이 왔다. 단순히 착한 성격이라 남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한다는 반응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다 못해 화난 기운까지 어렸다. 순간 놀라서 입술만 달싹이는 신승민을 뒤로한 채로, 그대로 백선우가 검사실을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가 문고리를 잡기 직전.

“백선우. 나가지 마.”

해가준의 한마디가 백선우의 모든 행동을 멈추게 했다. 마치 그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의사를 거스르지 못했다. 겨우겨우 힘겹게 손을 움직여 문고리까진 잡았지만, 차마 밀어 열 수가 없었다.

백선우가 가준을 돌아보았다. 혼란과 당황스러움을 가득 담은 눈동자가 어쩐지 울먹거리는 것만 같았다. 신승민이 잠시 그들을 놀랍게 보는 사이, 가준이 머리를 헤집다가 질문했다.

“정확히 며칠 머물러야 좋은데요? 짐 챙기려면 알아야 하니까.”

***

-삑… 삑… 삑….

디지털 도어록의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가 무척이나 느리게 이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천천히 누른다 해도 평생을 끌 수는 없었다. 결국 문이 열렸고, 하얀 손이 손잡이를 잡아당겼다가…… 그대로 또 열지 못하고 한참 망설였다.

“……야. 뭐 하는 거야?”

결국 해가준이 한마디 건넨 후에야, 백선우가 문을 열었다.

기어이 둘이 함께 집에 들어섰다.

현관에 선 가준이 속으로 감탄사를 삼켰다. 널따란 공간에 환하게 쏟아지는 햇살이 아름다웠다. 커다란 창문, 탁 트인 전경. 화이트 우드 색감으로 인테리어 된 집은 흡사 모델하우스처럼 보였다. 기와집 주택에서 살던 가준은 고층 오피스텔의 풍경이 새로웠다.

현재 상황은, 가준이 끝내 백선우의 집에 쳐들어온 상황이었다. 방문했다는 온건한 표현보다는 무작정 밀고 들어왔다고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며칠, 아니 가능하다면 2주 정도라도 함께 있으면 조금 나아질 건데…….’

약 한두 시간 전, 가준은 신승민에게 ‘기한’을 안내받았다. 당시 신승민은 백선우가 이 상황을 굉장히 싫어한다는 걸 파악한 듯 은근히 그의 눈치를 살폈다. 막내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사실장으로서 H.N 단원을 안전히 지켜야 할 사명이 있었고, 그런 강박은 해가준에게도 있었다.

‘2주 함께하면 생명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는데요?’

‘아마 15%, 잘 되면 20% 정도 회복될 거야.’

‘그 정도밖에 안 된다고요?’

‘지금이 너무 낮은 상태여서 회복이 더딘 거라, 20%만 넘어도 그나마 안정기에 들어서서 차근차근 회복될 텐데…….’

물론 그 당시에도 백선우가 반대하여 여러 소란은 있었지만, 끝끝내 가준은 신승민에게 여러 정보를 들었다. 이후엔 H.N에서 추가적인 검사를 위해 백선우를 붙잡고 있는 동안 가준이 집에 다녀왔다. 혹시나 그가 먼저 집으로 숨어들어선 문을 꽁꽁 걸어 잠글까 봐 다급히 움직였다.

그렇게 H.N에 들어갈 때는 따로 이동했지만, 나올 때는 나란히 나와서 백선우의 집까지 왔다.

집까지 오는 내내 백선우는 말이 없었다. 안색이 어두웠고, 혹시나 눈이 마주치려 하면 휙 고개를 돌려 버리기까지 했다. 게다가 기어이 집에 들어온 이후에도 백선우는 음울하게 침묵하여, 결국 가준이 그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그는 못 박힌 듯 현관에 서 있었다. 먼저 가준이 안으로 이동하며 어디서 머무르면 되냐고 질문했는데도 답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듣지도 못한 기색이었다. 얼굴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내가 들어온 게 그렇게 불편해?”

확, 백선우가 고개를 들었다. 그게 아니라는 듯 냉큼 고개를 내저었으나 또 곧바로 말하기엔 어려운지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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