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5/137)

95화.

지금 수련원에서 벌어졌던 일에 할머니가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다른 가족들도 모두 걱정하고 있는데 그 상황에서 회귀 사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눈앞에서 학생들이 죽는 걸 몇 번이나 보았단 것도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그 반복을 설명하려면 필연적으로 첫 번째에 자신이 죽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게 될 테니까.

그리고 아직 회귀에 대한 정보는 아무도 파악하지 못한 듯했다. 백선우와 마지막으로 이야기한 H.N 단장도 그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으니…….

언젠가는 밝혀질지도 모르겠지만 가준은 일단 이 모든 이야기를 숨기기로 했다.

그런 판단에 따라 수련원의 일은 오직 마지막 회차에서 겪은 것들만 말했다. 우연한 기회로 관리실에 들어가고, 캡슐 도안을 발견하고, 지하를 추론하고, 그 일당을 만나고……. 우연에 우연이 겹치는 상황은 다소 작위적으로 들릴 수도 있었으나 가준은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또한 캡슐을 부숴서 영혼에게 ‘길’을 알려 준 것은, 각성하자마자 자연스레 깨닫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하면 모두를 되살릴 수 있을 것 같단 직감이 왔다고.

해가온은 ‘쟤가 저렇게 똑똑하다고……?’라는 혼란이 가득한 낯을 했다. 물론 동생이 수련원에서 현명하게 행동하고, 또 각성한 후에도 방향을 잘 잡아 모두를 살린 건 아주 대단한 일이다.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그것을 모두 한 번에 해냈다는 점이 놀라웠다.

그리고 그건 해가온뿐 아니라 취조실에 있던 전원이 보인 반응이었다. 각성자가 새로운 힘에 눈뜨면서 기적 같은 일을 선보이는 일은 가끔 있으나, 이번 건은 고양된 감각만으로 하기엔 어렵지 않냐는 의아함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우연과 깨달음이 가능하냔 의문이 쏟아지더라도, 결국 그렇게 탈출했으니까. 명확한 결과 앞에서 과정의 애매함은 힘을 쓸 수 없었다. 해가준은 끝까지 ‘아무튼 그렇게 해냄’을 주장했다.

“저도 그곳의 일을 떠올리는 게 힘들어서…….”

게다가 해가준이 이런 연기까지 벌이니, 조사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희한하단 눈빛을 날리던 해가온이 당장 그만하자고 요청하고, 할머니도 나서서 이만 쉬어야 한다며 가준을 데리고 나가려 했다.

그저 마지막까지 H.N의 단장이 묘한 눈으로 해가준을 바라볼 뿐.

“…….”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는 꼭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으나, 가준은 태연히 고개를 돌렸다.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능력은 해가준에게만 있었다. 비록 지금은 그가 거짓말하는 상황이긴 하지만, 그는 조금 더 뻔뻔하게 행동했다.

다만 파하기 전, 단장이 어디까지 수색되었는지 간략히 알리며 가준에게 한 가지 소식을 전했다.

“링크의 수장, 연미정이 계속 너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하더군.”

“저는 만나기 싫은데요.”

“그래, 어차피 불가능하다고 하려 했다.”

“……? 좋네요.”

단호한 사람 두 명이 나눈 깔끔한 대화였다.

연미정은 현재 마나 구속구가 채워진 채로 독방에 갇혀 있었다. 조사 결과 연미정은 예전부터 이계와 연결되어 그곳과 소통하고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이문을 열기 위해 인근의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여 차근차근 재료를 모았다. 험한 산맥이라 실종자 소식이 쉽게 묻혔고, 그들은 오래전에 죽었던 터라 이번 사건으로 되살아나지 못했다.

아무튼 이토록 연미정이 오래간 준비한 계획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또 눈앞에서 이문이 닫혔다. 게다가 구속구 때문에 더는 이계를 찾을 수조차 없으니 큰 충격으로 이상 반응을 보인다 했다.

가준은 그런 인간과 만날 의사가 조금도 없었다. 그녀에게서 들을 이야기도 뻔했다. 이계를 통해 대의를 이룰 수 있다느니, 이 땅을 더 이롭게 할 수 있다느니. 가준은 전혀 흥미가 없었고, 어쩌면 그것을 파악한 연미정이 새로운 제안을 할지도 모르지만…… 그 제안 자체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악은 관심을 줄수록 크기를 키운다. 연미정은 일평생 제 계획과 함께할 사람들을 모으며 이상을 꿈꿨던 인간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아예 계획에 관심조차 주지 않는 무시가 특효였다. 그러면 점점 그 인간의 외침은 공허해질 테니까.

다른 이들이 제 큰 뜻을 몰라본다며 정신 승리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 봤자 그녀가 맞이할 끝은 고독이다. 연미정은 능력 차단 주술이 걸린 이후 감옥으로 갈 예정이었다.

사실 가준은 마지막에, 수련원 지하에서 이문을 닫기 전 연미정을 이계로 보내 버릴까 생각했었다. 가준에게는 이계의 ‘악’이 너무나 선명히 느껴지는데 연미정은 그걸 알고서도 이용할 수 있다 여기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지 계속 이계의 효용만 주장했다. 그러니 그렇게 좋아하는 이계로 가 버리라고 떠밀까 고민했으나…….

그것이 찰나라도 그 인간에게 기쁨을 줄까 봐 선택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계에서 다른 수를 도모할지도 모르니 경계한 것도 있지만, 가준은 연미정을 이곳에 묶는 일이 그녀를 더 비참하게 만들 것이라 생각했다.

그토록 깔보고 무시한 이 세계에서 벌을 받게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가 각성한 신수의 영향일 수도 있었다. 이 땅의 정의를 오래도록 수호한 존재로서, 감히 이곳을 하찮게 여겨 다른 세계를 끌어오려 한 자를 이곳의 규율로써 다스리고자 했다. 다행히도 가준의 바람대로 연미정의 정신은 차근차근 무너져 가고 있었다.

이후에도 가준은 사건 조사뿐만 아니라 이능력 검사도 몇 번 더 추가로 받았다. 한국에서 아주 드문 신화 계열의 이능력자가 등장했으니, 그의 능력을 면밀하게 살폈다. 세분화된 검사가 여러 차례 진행되었고, 결과는 며칠 뒤에 나온다 하였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엔 틈틈이 학생들이 찾아왔다. 그들도 환자면서 굳이 링거 밀대를 끌며 방문한 목적은…….

“살려줘서 고마워.”

“각성했다는 소식 들었어. 우리 구해줘서 정말 고마워…….”

바로 해가준에게 감사를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아직 이능력 관리청에서 공식적으로 해가준을 각성자로 발표하진 않았다. 수련원 진상 조사가 완성 단계에 들어서면 함께 공개할 계획이라고 했다. 하지만 당장 병원에 입원한 학생들, 죽었다가 살아난 경험을 한 이들에게는 정보가 안내되어야 한다고 가준에게 양해를 구했다. 당사자와 보호자 모두 혼란스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말을 알게 된 학생들은 해가준에게 감사 인사를 하러 왔다. 보호자에게 대신 전해달라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직접 찾아와 고마움을 표했다.

소강당에서 죽었다가 되살아난 2반 반장 김주완도, 고래 몬스터에게 삼켜져 부상 입었던 김시형도, 또 지하 진입을 돕는 과정에서 크게 다친 남형욱과 학생회들도.

가준은 이런 상황이 몹시 당황스럽고 부담스럽기마저 했다. 제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분위기가 유행처럼 번지기라도 하는 건지 2학년 전교생이 인사하러 오는 듯했다.

특히나 안영아와 이동훈, 심도경은 이 소식에 눈이 동그랗게 커진 채로 찾아왔다. 이동훈은 몸도 좋지 않으면서 절뚝절뚝 목발을 짚고 왔다.

“와, 그때 수련원에서 솟은 푸른빛이 해가준이 쏘아 올린 거라니.”

“너무 대단하다, 가준아…….”

“우리 그래도 같이 다녔는데, 저번에 만났을 때 이야기해주지!”

특히나 안영아는 장난스레 서운함을 표했다. 그들 셋은 이미 해가준이 길을 찾아내어 탈출할 수 있었다고 예상했고, 어쩌면 예언의 존재와도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고 어렴풋이 추측했었다. 다만 예언의 ‘뿔이 가리킨 방향’이란 표현과 해가준이 대체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 수 없었는데, 이제야 진실을 들었다.

해태는 바르지 못한 자, 옳지 못한 자를 구분하여 뿔로 들이받는다는 전설이 있으니까. 해태의 뿔이 하나인 일각수인지, 아니면 신양으로서 두 개인지에 관해선 논의가 많지만 일단 뿔이 존재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만약 내가 각성자였으면 사방팔방 알리고 다녔을 텐데.”

“그러니까. 일반 계열도 아니고 무려 신수 계열, 신화급…….”

연달아 쏟아지는 말에 가준은 침묵으로 응수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다가오는 시선이 있어, 결국 눈동자를 슬쩍 옆으로 굴리며 답했다.

“……어떻게 보면 나 때문에 고생한 것도 있으니까.”

수련원에서 링크가 ‘예언의 존재’를 찾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인다고 했었다. 그 소리를 들은 학생들 모두 이 상황의 주범이자 문제가 링크란 것은 알지만, 은연중에 예언의 학생이 얼른 나타났으면 했을 것이다. 어떻게든 빨리 수련원을 벗어나길 원했을 테니까.

물론 해가준이 그것으로 주눅 들지는 않았다. 다만 제가 조금 더 빨리 진실에 도달했으면, 학생들이 아예 죽는 경험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되살아났다고 한들 그런 경험은 무척 충격적일 테니까. 조금은 그들의 죽음을 덤덤히 넘긴 걸 의식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가준의 행동에, 셋은 놀란 시선을 주고받았다.

“뭐야, 백선우랑 같이 지내다 보니 물들었나.”

“가, 가준아. 많이 피곤해?”

“역시 영혼이 바뀐 걸지도…….”

“뭐라는 거야, 대체.”

해가준은 짜증스레 베개를 던지며 축객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렇게 그들이 빠져나간 후에는, 침대에 대자로 누워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심장이 두근두근, 느리지만 선명하게 뛰는 것이 새삼스레 낯설게 느껴졌다. 오늘 아침부터 끝없이 쏟아진 인사는 여전히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어쩌면, 이 기분은 크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언제 일어나는 거야…….”

그를, 백선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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