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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94/137)

94화.

희한한 감상이지만 수학여행 내내 독립적인 모습만 보이던 해가준이 누군가에게 동생 취급을 받는 것이 신기했다. 그러다 안영아의 시선이 그녀의 셔츠 앞자락에 닿았다.

[이능력 관리청 몬스터 연구부 부서장, 해가온]

단박에 안영아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능력 관리청, 줄여서 이능청이라 불리는 그곳은 국가에 존재하는 이능력자 관리 최고 기관이다. 그리고 그런 곳의 부서장이란 소리는 몬스터 연구의 정점에 오른 사람이란 뜻이었다. 분명 그녀를 언급하는 해가준의 어조는 심드렁하기만 했었는데!

그사이 셋과 모두 인사한 해가온이 당장 가준에게 힐책의 눈빛을 날렸다.

“할머니한테 말이라도 하고 갔어야지.”

“……화나셨어?”

“그걸 말이라고!”

-저벅, 열린 문틈으로 또 다른 존재가 들어왔다.

“화 안 났다.”

쪽빛 정장풍 한복을 입은 노인에게서는 특유의 묵직한 분위기가 풍겼다. 구름이 가득한 신산 속의 암자에 갔을 때 느낄 법한 고요한 공기. 그 존재가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아침 녘 산의 향기가 풍기는 듯했다.

체구가 작은 노인이지만 노쇠한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가준을 바라보며 차분히 건넨 한마디가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그저 걱정했을 뿐이지.”

“……죄송합니다.”

당장 해가준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아이들은 그의 당황한 얼굴에 놀랐다. 날카로운 눈매가 기막히게 닮아서 곧바로 가준의 할머니란 건 알아보았다. 수련원에서 들은 정보에 따르면 이계를 연구하는 분, 그리고 가준에게 ‘안경’을 주었던 분.

조금 전 해가온과 인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던 심도경과 안영아가 또다시 기립하고, 이동훈도 또 어색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할머니는 말없이 고개만 내저었다.

그사이 가준의 부모님까지 병실로 들어왔다. 약 나흘 만에 일어난 가준이 병실에서 사라졌으니 한바탕 난리가 났던 듯했다. 셋은 일어나자마자 자신들을 찾으러 온 가준에게 감동해야 하는 건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래도 이제 인사는 모두 끝마쳤겠지 생각했는데, 뒤이어 또 낮은 구두 굽 소리가 다가왔다. 이번엔 대체 누가 더 오는 거냐고 병실 입구를 쳐다보았다가…… 다들 그대로 얼어붙었다.

“조사해야 하는데 갑자기 이렇게 나가는 건 곤란하다, 해가준 학생.”

똑 떨어지는 단발에 차가운 인상. 정장 재킷을 어깨에 걸친 채로 들어와 가준의 돌발 행동을 지적하는 그녀는 바로 H.N의 단장이었다. 몇 시간 전 안영아가 보고서 영광스럽다 했던 존재.

셋은 잠시 놀란 시선을 주고받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준이 이번 수학여행 사건의 핵심 인물이니 H.N 단장이 직접 찾아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 불가능한 일까진 아니니까.

그런데 그때 단장의 시선이 가준의 옆, 쪽빛 한복을 입은 할머님에게 향했다. 잠시 그녀의 눈동자가 커지는가 싶더니 곧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은사님.”

“그래. 가준이가 친구들이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었나 보네. 아이니까 너무 힐책하진 말게.”

짧은 대화가 오가는 모습을 셋은 멍하니 보았다.

H.N의 단장이 해가준의 할머니에게 정중히 예를 갖추는 모습에 놀라야 하는지, 아니면 할머님이 가준을 ‘아이’ 취급하는 일에 반응해야 하는지, 보호자에게 둘러싸인 가준의 모습이 낯설어서 신기해해야 하는지…….

그들은 너무 놀라면 말이 잘 안 나올 수도 있다는 경험을 했다. 셋이 입만 뻐끔거리고 있으니 앞에 모인 사람들이 곧 사과하며 물러났다.

“우리가 병실을 너무 소란스럽게 했네요. 얘 데리고 얼른 나갈게요.”

해가온이 살갑게 푹 쉬라고 인사하며 나갔다. 완전히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셋은 눈만 끔뻑였다.

“뭐, 뭐야. 뭐가 지나간 거야?”

“해가준도 분명 부모님이 있긴 하겠지만, 아니, 이거 진짜 패드립 같은 발언인데, 왜 이렇게 놀랍냐……?”

안영아와 이동훈이 차례로 감상을 나눴다. 그들 사이에서 해가준이란 존재가 꽤 컸기에 지금의 모습이 더 놀라운 눈치였다. 한때 외동일 거라고 착각했었는데, 실제로 보호자들과 함께하는 해가준은 너무나도 ‘막내’의 모습이었다.

부모님이 그의 상태를 신경 쓰고, 또 할머님도 무뚝뚝하지만 은근히 막내 손주를 감싸고. 물론 누나와는 티격태격하지만 그분도 동생을 걱정해서 복도를 뛰어다녔다 했다. 해가준의 가족 관계가 무척 좋아 보인다는 점이 새삼스레 놀라웠다.

“해가준 멘탈이 튼튼한 게 이것 때문이었나. 건강한 관계가 주위에 많을수록 건강한 멘탈이 만들어진다던데…….”

“어머님이랑 엄청 닮은 것 같더라. 누나분도, 해가준도 완전 판박이던데.”

“오, 맞아맞아. 그런데 그분 이능청 부서장이던데. 곧바로 오셨는지 명찰 달고 계시더라구.”

안영아의 이야기에 이동훈이 놀랐다. 그 또한 처음 안영아가 가진 감상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 듯 입을 떡 벌렸는데, 그때쯤 심도경이 갑자기 ‘헉!’ 하고 소리를 높였다.

둘의 시선이 향하자 그가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다, 단장님이 가준이 할머님을 ‘은사님’이라고 했잖아. 어디서 뵌 것 같아서 찾아봤는데…….”

심도경은 현 H.N 2대 단장의 팬이었다. 그래서 그 단장님이 ‘은사’라고 칭하는 사람을 예전에 기사에서 보았던 게 기억나서 검색했고, 그것의 결과를 확인했다.

“H.N 공동 창단……?”

“1대 단장님의 절친한 친우?”

이계 연구에서 저명한, S급 마나 감응 능력자란 기사를 읽은 안영아와 이동훈이 고장 난 것처럼 눈만 깜빡였다. 갑작스레 쏟아진 정보가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안영아가 멍하니 탄식했다.

“해가준이 인맥도 숨김…….”

***

해가준은 일어난 날부터 아주 긴 조사를 받았다.

우선 진행된 것은 능력 재검사였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그를 위해 이능력 관리청이 친절히 측정 기계까지 챙겨 와 주었다. 가준은 거부하지도 못하고 캡슐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 결과는 A급, 신수 계열. 그리고 그 신수는 ‘해태’.

시비와 선악을 판단하는 영험한 눈을 가졌으며, 물을 다루는 능력으로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신수. 한국에서는 신성한 양, 신양으로 인식된 존재.

조선 시대에 한양이 풍수지리적으로 배산임수에 위치한 명당으로 평가받긴 했지만, 관악산이 ‘불’의 기운을 품어 위험하다고도 보았다. 그 산의 능선이 타오르는 형상인 만큼 불의 기운을 품어 수도가 취약하다 보았고, 이 때문에 경복궁 광화문 앞에 해태상이 생겼다는 설이 있다.

화재를 막는단 점에 따라 여러 궁궐에 조각되기도 했으며, 정조 때 편찬된 동국세시기에선 정월 대보름마다 부엌에 해태를 그려 붙였단 기록도 있었다. 또한 해태는 선악을 구분하고 시비를 가린다는 점에서 사헌부의 상징이었으며, 대사헌은 해태가 수 놓인 관복을 입었다.

현대로 넘어와서도 비슷한 논지로 대검찰청 앞에 해태상이 놓였다. 또한 국회의사당이 지어질 때도 한국전쟁 이후 나라의 민주주의가 펼쳐질 공간이 화재로부터 안전해야 한다는 이유로 해태상이 자리했다.

현재에 와선 존재 의의가 많이 잊혔으나, 그래도 신수는 신수. 즉 희귀한 정도로는 S급보다 더한 신화급으로 각성했다는 소리인데, 해가준의 보호자들은 모두 침착한 반응이었다.

특히나 그의 할머니는 측정 결과 앞에서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결국 이렇게 된 게지…….”

언젠가는 각성하게 될 것이라 예상했다는 어조였다. 다만 그 각성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질 줄은 예측하지 못했고, 이 또한 무언가의 뜻이라고 보기엔 다분히 강제적으로 이끌어진 상황이었다.

할머니는 가준의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네가 이런 식으로 노려질 줄 알았더라면, 어떻게든 너를 눈뜨게 할 걸 그랬구나.”

아직 각성하지 않은 신수의 영혼은 취약하니까, 이계가 일부러 그 상태를 노려 접근한 것이다. 정신적인 충격을 주어서 자신들의 입맛대로 이용하려고.

“네가 이렇게 험한 일을 겪게 될 줄은…….”

해가준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가족들이 진작부터 제 능력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고서도 침묵했고, 그 주동자가 할머니였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어서는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안경을 구해서 제 눈을 가려준 사람이 할머니니까 일찍이 추론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이 현장에 이능청장과 H.N 단장까지 함께해서 눈치를 본 것도 아니다. 투명해야 할 이능력 검사에서, 그의 능력 측정이 잘못되었단 걸 알면서도 묻어둔 가족들이 받게 될 심문을 걱정한 것도 아니다. 아니, 이건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때 가준이 가족들의 표정을 보고서 얻은 벼락같은 깨달음이 하나 있었다.

이들 앞에서 절대로 여러 번 회귀했다는 사실을 말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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