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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91/137)

91화.

연미정이 윤회까지 언급하며 가준을 설득하고자 했다. 하지만 가준이 더 답하지 않고 다시금 캡슐의 입구를 내리찍으려 하자, 연미정이 ‘잠깐!’이라고 다급히 외쳤다.

스윽, 가준의 시선이 돌아가자 그녀가 지친 낯으로 말했다.

“그래, 이제 말로 설득하는 건 피차 피곤해지는 일인 것 같구나. 이계와 가까운 곳에서 그분들의 힘을 직접 느껴 봐야만 정신을 차리겠지.”

이문의 주위로 검붉은 마나가 불길하게 일렁였다. 캡슐을 완전히 덮쳐 버릴 듯 꿈틀거리는 기세가 살벌하고 위협적이었다. 조금만 더 허튼짓을 벌이면 이제는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이.

연미정은 해가준을 아예 이문 안으로 밀어 넣을 생각이었다. 마침 문도 활짝 열렸으니 그곳에서 이계의 힘에 세뇌되든, 아니면 그대로 이성이 망가져 버리든, 어떻게든 더 대화하기 편한 상대로 만들어야 할 듯했다.

스멀스멀 검붉은 기운이 캡슐을 타고 올라 그의 발목을 붙잡아 끌어내릴 것처럼 일렁였다.

“아, 이계…….”

그때쯤 가준이 나직이 탄식했다. 연미정은 이제야 생각이 바뀌었나 싶어 고개를 들었다가, 그의 입꼬리가 비죽이 올라간 것을 확인했다.

가준이 발치의 검붉은 마나를 툭, 발로 찼다.

“내가 거절하면 이곳에 들어올 방법도 없잖아.”

첫날 별관 강당에서 들은 예언을 수십 번 곱씹으며 눈치챘다. 이계는 예언의 존재가 있어야만 진정한 개문을 이룰 수 있다. 그래서 한때는 가준이 먼저 그를 찾아서 설득하거나, 아니면 없애 버려야겠다는 생각도 한 적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 가준의 앞에서 이계가 ‘손을 잡아달라’고 했던 것. 현재 수련원 일대가 이계의 영역으로 설정되었다지만, 그것도 이 구역으로만 한정될 뿐 아니라 일시적이었다. 이계가 완전히 이 세상을, 이 나라를 뜻대로 다루려면 해가준의 존재가 있어야만 했다.

신양, 해태. 조선 왕조를 수호하며 나라를 ‘화(火)’로부터 지켰던 존재. 현대에 와서 그의 존재가 희미하게 잊혔을지언정 여전히 그는 석상의 형태로 궁궐 앞을 수문장처럼 지켰다. 그것은 여전히 상징적인 위치기에, 이계는 다른 많은 관문을 거치는 대신 그 하나를 거쳐 완전히 이 세계에 침입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은밀히 침입하면, 이 땅의 생물들은 이계의 손아귀에 떨어진 것조차 모른 채로 살아갈 테니까. 그것이 곧 이계가 바란 것이자 링크가 세워 온 계획이었다.

그래서 가준에게 가치를 되찾아주겠다며 끊임없이 꾀어내려 한 것이나…….

“편법 부리지 말고, 또 여기서 학생들 목숨으로 행패 작작 부리고 이제 꺼지라 그래.”

해가준은 망설임 없이 캡슐을 내리찍었다. 몇 시간 전에는 이계의 힘을 듣고서 잠깐 혹했던 그이지만, 그 힘을 이용해 이곳을 안전히 빠져나가기를 기대했던 그이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것의 재료가 영혼이란 점을 넘어서, 가준은 또 다른 진실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가준을 직접적으로 붙잡지 못하는 이계가 대신 그의 앞에 새까만 마나를 흩뿌렸다. 시야를 막으려는 움직임이었으나, 가준의 봉 끝은 다시금 정확한 위치를 찾아갔다.

그의 눈은 더 이상 어둠에 가려지지 않았다.

-쩌저적!

이윽고 입구가 완전히 깨지며 대기가 진동했다.

캡슐이 억지로 뜯기면서 쏟아져 나오는 영혼과, 그것을 억누르려는 몬스터의 대치가 이어졌다. 이계도 그것을 막으려는 듯 마나를 어지러이 움직였다. 검붉은 마나가 흡사 해무처럼 주위로 퍼졌다.

빛의 구체가 붉은 안개 속을 방황했다. 그것은, 그 영혼들은 육신을 잃고 구천을 헤맬 뿐이기에 방향을 찾아가지 못했다. 저승으로도, 이승으로도,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허공을 떠돌았다.

‘네가 찾아 나가는 길이 옳을 테니까.’

불현듯 가준은 조금 전 백선우에게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그뿐만 아니라 안영아와 심도경, 이동훈의 마지막 눈빛도 떠올랐다.

그들은 모두 해가준이 길을 찾아낼 것이라 믿었다.

마지막에 희생을 결심하는 그 순간까지도, 가준을 믿기에 기꺼이 그러한 선택을 하는 것처럼 망설임 없이 행동했다. 심지어 그들뿐만 아니라 수련원을 나오는 순간 대화했던 남형욱도, 그리고 돕기 위해 지하 복도까지 들어온 학생들에게서도 그러한 눈빛을 보았다.

해가준은 그저 백선우 한 명을 구하려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한 명을 지키려 했던 일이, 이윽고 모두를 구하는 선(善)의 길이 되었음을, 가준은 받아들이기로 했다.

마침내 해가준의 눈동자가 새파랗게 빛났다.

화마가 땅을 덮치지 못하도록 수백 년을 막아 온 존재. 악재로부터 이 땅의 존재를 수 세기 지켜 온 그의 의지가, 선과 악을 구분하며 바른길을 수호하고자 하는 힘이 공간에 들이닥쳤다. 파도처럼 쏟아진 푸르른 기운이 지하를 휩쓸고, 용오름처럼 솟구쳐 올라 허공의 빛들을 감싸 안았다.

깜깜한 밤하늘을 방황하는 그들을 달래듯 보듬고, 그들에게 올바른 ‘길’을 알려주니.

-파아아아!

비로소 영혼이 제 자리를 찾아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계의 삿된 마나가 그것을 억누르려 했으나, 더는 방황하지 않는 그들을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생사의 구분이 불분명한 세계, 유명의 다름이 희미한 공간. 그곳에서 길을 아는 존재들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기운의 충돌 끝에 이윽고 새파란 빛이 쭉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하늘에 겹겹이 쌓였던 먹구름이 한꺼번에 확 뚫리며 대기가 크게 진동했다. 더는 부정한 것에 수그러들지 않겠단 기세가 무시무시했다. 몬스터가 꿰뚫리며 사라지고, 이계의 마나가 우그러지듯 아래로 꺼지기 시작했다.

지하에선 캡슐의 주위로 초신성이라도 터진 것처럼 기운이 퍼지면서 모두가 벽면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마지막으로 이문의 앞에서 버티려던 연미정도 결국 뒤로 날아가다가 마침 닫히던 이문과 부딪치며 그대로 쓰러졌다.

해가준 역시 여파에서 멀쩡하지 못했다. 그도 캡슐 위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으나, 그의 눈동자만큼은 여전히 하늘에 고정되어 있었다.

빛의 기둥이 하늘 끝까지 솟아오르는 듯한 광경의 뒤로…….

연노란 빛무리가 둥글게 퍼져 나갔다. 수련원 일대를 뒤덮을 듯 넓게, 광활히 퍼지다가 이윽고 작은 알갱이로 부서지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마치 유성우가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

다분히 비현실적인 광경을 해가준이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바닥에 대자로 누워 버린 채로, 일어날 기력도 없이 그저 하늘에서 펼쳐지는 장관을 눈에 담기만 했다. 쿨럭쿨럭, 잔기침에 피가 섞였다.

처음 각성하자마자 무리해서 능력을 끌어쓴 탓에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한계까지 사용하다 못해 밑바닥의 바닥까지 아득바득 긁어서 쏟아부은 듯했다. 지금껏 능력으로부터 도망친 죗값을 치르는 걸까.

“가, 가준아.”

그때쯤 백선우가 다가왔다. 절뚝절뚝 걸어오는 모습이 무척 힘겨워 보였으나 끝내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겨우 해가준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선 울듯이 말했다.

“이렇게 죽으면 안 돼…….”

더듬더듬 얼굴을 쓰다듬는 손길이 간절했다. 꽤 높은 캡슐에서 굴러떨어진 데다 피까지 토하고 있으니 죽은 사람처럼 보이는 듯했다.

가준은 황당하다는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 상태가 어떤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일단 부상의 정도가 그보다 심각하지 않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의 부탁대로 링크를 유인해주면서 더 많이 다친 백선우였다.

자신보다 더 힘들어 보이는 존재에게 걱정받는 기분이 어찌나 황당한지. 그러나 한편으론 우습기도 하여, 그에게 따져 묻는 것 대신 다른 말을 건넸다.

“내기, 내가 이겼지?”

속삭이는 목소리에 옅은 웃음기가 배었다.

그대로 우뚝 백선우가 멈췄다. 이곳을 살아 나가는 모습을 서로에게 보여주기로 한 내기. 그것에서 자신이 이겼다고 말하는 가준을, 백선우는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일순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얼굴로 정신없이 가준만을 바라보다가.

이내 천천히 그 얼굴 위로 웃음이 퍼져 나가면서.

“응, 네가 이겼어.”

“……너도 이겼다고 답해야지.”

해가준이 어이없단 목소리로 그의 말을 정정해주었으나, 그는 그저 웃기만 했다. 제 눈앞에서 살아남은 해가준의 존재가 너무나 감격적인 사람처럼, 1회차 때와는 다르게 이제는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그의 행동이 더없이 기쁜 듯이.

지하로 들어온 이후 내내 창백하게 질려 있던 백선우의 얼굴에 마침내 생기가 돌았다. 유순한 눈매가 휘며 자아내는 미소에, 잠깐 가준은 시선을 빼앗겼다.

백선우에게 하고픈 말이 너무나 많았지만, 그에게 따지고픈 것들도 한가득이지만…… 그의 웃음을 보는 순간 갑자기 맥이 탁 풀렸다. 허탈해졌다고 해야 할지, 허무하다고 표현해야 할지.

그렇게 개고생을 했는데, 백선우의 웃는 얼굴 하나로 모든 기분이 풀렸다.

눈앞에 백선우가 살아 있으니 다 괜찮다는 생각만 들었다. 안도감, 만족감, 후련함, 혹은 그 모든 것을 넘어선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지만 달가운 그것이 가슴을 빠듯하게 들이 채웠다. 가준은 대충 제가 회귀를 반복하다 미쳤겠거니 생각했다.

멍하니 백선우의 미소를 올려다보던 해가준이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 상태지만 충동적으로 움직였고, 그에 곧바로 백선우가 반응했다. 손을 마주 잡아 오며 무슨 일이냐고 묻기에 가준이 눈가를 찌푸렸다. 붙잡지 말라는 듯한 반응이라 백선우가 멈칫하며 손을 물리는 순간, 가준의 손이 그의 볼에 닿았다.

툭, 손끝으로 스치면서 가까워졌다가 이윽고 뺨을 감싸며 보듬었다.

“…….”

잠깐 놀란 듯 그를 바라보던 백선우가 이내 환하게 웃으며 손바닥에 고개를 기댔다. 햇살이 부서지듯 눈부시게 맑은 미소였다.

어쩐지 반짝이는 것처럼도 보여서, 가준은 제 눈이 정말 이상해진 것 같다고 생각하다가 한 박자 늦게 진실을 알아차렸다.

해가 떠올랐다.

셋째 날의 아침이 밝으면서 지하로 햇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새벽 내내 내렸던 폭우의 끝에 마주한 맑은 하늘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백선우도 뒤늦게 하늘을 돌아보며 탄식했다.

가물가물한 시야 속, 가준은 언뜻 헬리콥터의 모양도 보았다. 뿐만 아니라 저 먼 곳에서, 누군가가 운이 좋게도 가장 먼저 깨어난 듯 소리를 치는 것도 희미하게 들렸다. 가준은 실소했다.

기나긴 밤의 끝.

그들이 마침내 햇빛 아래에서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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