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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88/137)

88화.

몇 분 전, 이곳에 내려오자마자 가준은 주위를 파악했었다. 캡슐의 개폐 장치를 찾아보면서 한편으론 문 형태의 기계, 즉 이문의 역할을 하는 것도 살폈다. 가준의 시선이 똑바로 그것을 향했다.

“뭐, 뭐 하려는 거지?”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에 링크가 어리둥절하게 서로를 보았다. 그가 달려가는 방향에 탈출로가 있는 것도 아닌데 대체 왜 뛰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곧 가준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아챈 링크가 외쳤다.

“일단 잡아!”

그곳엔 강제 개방 버튼이 있었다.

문을 일시적으로 활짝 여는 버튼. 지금보다도 문이 더 열리면 일대에 마나가 불어닥칠 것이다. 외려 몬스터는 더욱 많이 쏟아져 나올 것이고 일대를 가두고 있는 결계도 한층 강해질 테다.

하지만 문이 일순간 열렸을 때 쏟아질 마나는 이곳을 잠시 혼란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장기적으로는 수련원의 학생들을 죽일 버튼이지만 당장 주위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데에는 효용이 있다. 다들 가준이 그것을 노린다 생각하고 그를 막으려 했다.

달려드는 요원들을 피해 내달린 가준이 이윽고 봉 끝으로 버튼을 눌렀다. 꿰뚫어 버릴 듯 과격한 손길에 콱! 버튼이 눌리는 것과 동시에.

-쿠구구구구!

거대한 문이 열리며 거세게 마나가 터져 나왔다. 해일처럼 쏟아지는 마나의 홍수에 링크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쓰러졌다. 몇몇은 벽면으로 날아가 처박히기도 했다.

그 속에서 유일하게 한 존재만이 오롯이 서 있었다.

해가준은 도망가지 않고 이곳에 돌아오기로 결심한 순간, 기어이 백선우를 택한 그 순간 마지막 퍼즐 조각을 맞췄다. 지금껏 내내 찜찜하게만 넘겨 왔던 것들을 모으자 드러난 진실이 하나 있었다.

수련원에 나타난 몬스터들의 속성. 그리고 그것들의 형태와 그에 기반하는 설화. 이 모든 건 예언의 아이를 각성시키기 위해 맞춰졌다고 했다.

그것들을 상대하며 때때로 가준이 느꼈던 위화감. 불에 휩싸일 뻔한 순간에 느낀 역설적이게도 차가운 감각. 그리고 몬스터에게 잡아먹혀 익사할 뻔할 때 분노를 터트리자 출렁이던 위액이 멈췄고, 기어이 몬스터를 꿰뚫어 길을 찾겠단 의지를 가진 순간, 그를 따라 형체를 갖춘 마나는…….

‘뿔’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해가준의 이능은 어둠에 가려지지 않는 눈,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는 능력.

동양 설화 속, 시비를 구분하고 선악을 판단하는 신수가 있었다. 거짓을 고하는 자를 찾아내어 뿔로 찌르고 진실을 수호하는 신수. 정의를 바로 세우고 악을 규탄하는 존재. 그는 조선의 정도를 상징하는 위치에 있었으며 또한 왕조를 ‘화’로부터 막아내었으니.

-솨아아…….

이문에서 쏟아지는 마나가 마치 바다의 울림처럼 다가왔다. 또 해수면에서 용오름이 만들어지는 순간처럼 막대하고도 웅장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

해가준이 이문 앞에 섰다. 이제 그는, 왜 이계가 백선우의 거래에 응했는지 알 수밖에 없었다. 링크에게도 조금의 힘만 내어주던 그곳이 어째서 백선우와 거래하며 이 세계의 축을 돌릴 수 있었는지. 당시 그의 손에 묻은 피는 누구의 것이었으며, 또한 그가 살고자 바란 존재가 누구였는지.

이계의 뜻이 어째서 백선우의 뜻과 맞물렸는지.

활짝 열린 이문 너머로 보이는 세계가 찬란하게 빛났다. 수십, 수백 개의 빛이 저마다의 색으로 발한다. 꽃의 군락이 피었다가 지듯, 은하가 탄생했다가 소멸하듯…….

일시적으로 개방되었으니 금세 다시 닫혀야 하건만, 이문은 닫히지 않고 버텼다. 그것에서 쏟아지는 마나가 바로 앞의 존재와 연결되며, 이 땅에 한 발자국 더 다가올 수 있게 되었다. 이계는 눈앞의 탐나는 존재를 홀리게 하려는 것처럼 자신의 모습을 보였다.

이윽고 해가준이 천천히 돌아섰다.

쏟아지는 검붉은 마나 속에서도 그의 눈동자만큼은 새파랗게 빛났으며, 또한 이마 위로 두 개의 뿔이 투명하도록 푸른빛을 내며 뻗어져 나왔다. 끝이 날카로운 두툼한 뿔이 둥글게 말려 나와, 마치 신성한 양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신양(神羊), 이 땅에서 해태라 불리는 존재.

“……너였어.”

연미정의 탄식이 충격과 희열을 담고 파르르 떨렸다. 주위의 링크는 바닥에서 무릎을 꿇은 채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계의 마나에 짓눌리듯, 혹은 마침내 이 땅에 돌아온 신수를 경외하듯.

비로소 예언의 존재가 이계의 부름을 받아들이고 그들 앞에 섰다.

[이 나라의 ‘화’를 막는 존재여…….]

이계의 속삭임이 아스라하게 공간에 떨어졌다.

활짝 열린 문에서 쏟아져 나오는 마나가 해가준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와 닿고 싶은 듯하나 발끝에도 다가가지 못했다. 하지만 신성한 기운에 짓밟히듯 고꾸라지면서도 마나는 끝없이 움직였다.

[아주 오래도록 네가 눈 뜨기만을 기다렸노라…….]

별관 강당에서 들은 목소리보다도 훨씬 더 선명한 음성이었다. 마침내 고대한 존재를 맞닥뜨린 흥분과 욕망이 그 속에 진득하게 담겼다.

[우리의 손을 잡으면, 그 땅에 그대의 정의를 다시 세워 주겠다.]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가 아닌, 마나를 통해 의지를 전달하여 이루어지는 소통. 그렇기에 이계의 속삭임은 마치 뇌 안에 찐득하게 들러붙는 것만 같았다.

계속해서 그들은 가준에게 말을 걸었으나, 가준이 보인 반응은 탄식뿐이었다.

“하, 머리 울리니까 그만 좀…….”

목소리에 깊은 짜증이 서렸다. 무릎 꿇은 채로 경건하게 이계의 이야기를 듣던 링크가 일순 당황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예언이 가리킨 존재, ‘뿔’을 각성한 존재. 그 아이가 처음으로 내뱉는 말에 담긴 감정이 정제되지 않은 형태라 놀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해가준은 잠시 이마를 쥔 채로 심호흡했다. 정말로 완전하게 눈을 뜨는 순간부터 온몸의 마나가 요동치고 있었다. 피가 혈관을 타고 내달리는 감각마저 느낄 정도로 신경이 예민하게 솟았다.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그대로 피가 역류할 것만 같았다.

가준은 일부러 이계의 마나를 받았다.

모든 단서를 조합한 결과, 달갑지는 않지만 그 자신이 ‘예언이 가리킨 아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도박처럼 이문을 강제 개방시켰다. 이계는 예언의 존재를 강렬히 원하니, 그런 욕망이 가득 담긴 마나를 받으면 필연적으로 각성까지 이어지리라 예상했다.

그리고 예측대로 홍수처럼 쏟아진 마나를 바로 앞에서 맞이하는 순간, 온몸의 감각이 깨어났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감각을 아주 어릴 때도 느낀 적이 있단 걸 어렴풋하게 떠올렸다.

‘아가. 어느 순간, 눈을 떠야 될 때가 올 거야.’

그래, 바로 그 말을 들었던 순간에.

어릴 적 해가준은 능력을 감당하지 못했다. 사고하게 된 순간부터 자연스레 발현한 능력은 어린아이가 다룰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눈앞에서 보이는 사람의 선과 악, 거짓과 진실. 새까맣게 보이는 사람들이 두려워 도망쳐야만 했다. 그래서 할머니가 그의 능력을 억눌러 주었고, 시간이 지나며 차츰 그것을 잊었다.

하지만 지금, 가준은 제 의지로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지금껏 억지로 피해왔던, 억눌러 왔던 힘이 속에서 터져 나오며 전신을 휘도는 감각이 낯설었다. 까딱 잘못하면 그대로 휩쓸려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런 가준이 있는 곳으로 연미정이 다가왔다.

“그래, 너였구나. 그래서 그랬던 거였어.”

희열에 가득 찬 눈동자가 번뜩였다. 해가준이 예언의 존재라면 진실을 파헤치고자 했던 행동이 모두 이해된다고, 진작 눈치챘어야 했다는 말이 빠르게 이어졌다. 그녀는 몹시도 흥분한 상태였다.

마침내 연미정이 멈춰 선 곳은 이문의 앞이었다. 그녀는 드디어 모두 열린 문이 감격스러운 듯 두 손을 모아 잡고 환희에 떨었다.

“가준아. 나는 오래도록 공간을 탐사해 왔어…….”

연미정의 이능력, 공간 탐사. 신해고에선 D급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A급으로, 그녀는 능력이 발현된 순간부터 온갖 공간을 탐색하고 다녔다. 그 공간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힘이 스며들어 있는지……. 연미정은 모두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세계는 다른 이들보다 더 깊고 넓었으며, 그래서 차츰 욕심이 생겼다. 더 많은 세계를 알아보고 싶다, 숨겨진 힘을 느끼고 싶다. 전 세계를 돌아다녔지만 연미정의 흥미는 이 땅에 있지 않았다. 이계와 연결되었던 공간에서 느껴지는 마나만이 그녀를 짜릿하게 만들었다. 미지의 힘을 향한 강렬한 이끌림.

그때부터 연미정은 ‘이계’를 본격적으로 탐사하기 시작했다. 이능력 관리청은 정도 이상의 탐색을 금하나 연미정은 이미 시시한 탐사에 질렸다. 현 세계는 조사해 봤자 흥미를 이끄는 것이 없었다.

“이 땅을 연구하면 할수록 가망이 없는 곳이란 것만 알게 되었지. 마나가 드물고, 자원도 희박하고, 이기심이 들끓는 땅덩어리.”

원래도 선악의 구분이 희미해지고 정의가 짓밟힌 사회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능력이 나타나고, 이능력자에게 ‘등급’이 매겨지자 경쟁은 더욱 가속화되었으며, 질투와 시기에서 비롯된 더러운 일들이 많아졌다. 이능력자든, 일반인이든. 서로의 권력과 힘, 재력만을 탐하는 추악한 세상.

그에 반해 이계는 넘치는 마나와 풍부한 자원, 알지 못하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가득했다. 연미정은 그곳을 연구하다가, 마침내 이계의 속삭임을 들었다.

[그 세상의 가치를 바로 세워 주겠노라…….]

세상을 쥐고 흔들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힘을 가진 곳의 속삭임을.

“아아, 드디어…….”

연미정이 이문 앞에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한참 동안 힘을 찾아다닌 그녀에게 어느 날 말을 걸어온 이계가, 이 희망 없는 땅덩어리를 유토피아로 바꿔 줄 힘을 가진 세계가 눈앞에 있다.

“이제 새로운 세계가 찾아오는 거야.”

그녀는 무척 기뻐 보였으나, 일련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해가준의 반응은 묘하기만 했다.

“이래서 악당 중에 박사가 많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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