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해가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모든 정보가 조합된 순간 그것은 하나의 정답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것을 인지하자 가준의 눈동자에 기이한 모습이 잡혔다.
진실을 꿰뚫어 보는 눈에 담긴 현실은…….
백선우의 목에 감긴 붉은 사슬, 그리고 그것과 연결된 자신의 손. 마치 자신이 백선우의 목줄을 쥐고 있는 듯했다.
……백선우가 제게 종속된 것만 같다.
해가준의 얼굴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종속은 영혼에 족쇄를 채우는 힘인가? 그래서 자신이 위험할 때마다 백선우가 반사적으로 뛰어왔고, 몇 시간 전 몬스터에게 잡아먹혔을 때는 그가 자신을 구하지 못해서 이성이 망가졌던 건가?
눈앞에서 종속된 상대가 죽을 뻔한 충격으로 백선우가 과거를 기억해냈다고 추측할 수 있었다. 1회차일지, 아니면 모든 순간일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그가 과거를 떠올렸다.
이윽고 가준이 백선우의 멱살을 재차 쥐었다. 한꺼번에 밀려온 진실에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산산조각 난 것을 억지로 기워서 버티고 있는 듯하다.
“너, 떠올랐으면서 왜 말 안 했어. 기억해냈으면 진작……!”
“내 길은 틀렸으니까.”
“……뭐?”
“내가 했던 선택은, 모두 실패했으니까. 그래서 괜히 네 선택을 방해할까 봐 말할 수 없었어. 네가 찾아 나가는 길이 옳을 테니까.”
백선우가 흐느꼈다. 중간중간 피를 토하면서도 끝끝내 완성시키는 말이 낯설게 귓가를 울렸다.
순간 가준은 잊혀진 1회차 속에서 보았던 캡슐의 상태를 떠올렸다. 지금보다도 빛의 구체가 훨씬 더 가득 차 있었다. 즉 그만큼 학생들이 많이 죽었단 소리였으며 어쩌면 전교생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길은 아닌 것 같아, 가준아. 제발, 너 혼자서 도망가면 살 수 있을지도 몰라.”
울먹이는 목소리로 백선우가 애원했다. 다시금 마나 통로로 빠져나가는 길을 알리고, 뒷산의 어두운 숲에 숨어들어 은신 아티팩트를 사용하면 링크의 추적을 피할 수 있을 거라 이야기했다. 밤눈이 좋으니 몬스터도 피할 수 있을 테고, 그렇게 아침까지만 버티면 H.N에서 움직일 거라고…….
그때쯤 해가준은 불쾌한 깨달음을 얻었다. 이제야 깨닫게 된 진실이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잠깐 연결시키지 못했던 퍼즐 조각이 하나 있었다. 지금 제게 도망가라고 하는 백선우와, 1회차 때 그가 이계에 바랐던 것이 맞물리며 또 다른 진실이 드러났다.
해가준이 멍하니 탄식했다.
“……네가, 아니었어.”
백선우가 회귀의 기준이 아니었다. 그가 죽을 때마다 시간이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이계가 시간을 돌렸다. 값을 실현시키기 위한 또 다른 현실을 만들었다.
‘가능성이 1% 밑으로 떨어지면, 다시 새로운 값을 찾는단 거지.’
지금껏 백선우가 죽은 순간엔 링크의 존재를 몰랐고, 선생님들의 배신도 파악하지 못했다. 게다가 지하까지 밀고 들어오려면 백선우란 전력은 필수불가결한 수준이었다. 수십 명에 달하는 인파를 단번에 처리할 정도로 강력한 복종 능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모든 진실을 알아냈고, 이제 오히려 백선우가 죽음의 문턱에 선 상황인데도 시간이 돌아가지 않았다. 현 상황에서 그 ‘값’이 이뤄질 가능성이 1%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단 소리였다.
백선우는 그것을 파악하고 계속해서 도망가라 말하는 것이다.
“…….”
-콰광!
돌연 위에서 굉음이 터졌다. 문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에 그제야 가준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동훈이 지하 진입로를 막으러 올라갔단 게 뒤늦게 떠올랐다.
“야, 해가준! 이제… 얼마 못, 버텨!”
힘겨운 목소리로 이동훈이 외쳤다. 하지만 가준은 어떤 말도 해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해결할 거라고 믿는 듯한데, 대체 어떻게?
가준은 혼란했다. 지금 알게 된 진실들의 충격을 차치하더라도 당장 저 캡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주위에 캡슐의 개폐 버튼이 있는 것도 아니고, 폭발로도 흠집 하나 내지 못한 단단한 물건이다.
-쾅! 콰광!
“가준아, 제발. 도망가야 해. 더 늦기 전에 빨리….”
점점 위에서 들리는 소란이 커지고, 그 상황에서 백선우는 계속해서 도망가라 말했다. 해가준은 제 손에 들린 은신 아티팩트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사고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백선우가 아예 해가준을 마나 통로 쪽으로 이끌었다. 피를 토하는 그는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지만 가준을 붙잡은 손길만큼은 간절했다. 마나 통로는 지하 입구의 맞은편에 있어 그쪽까지 계단을 올라야만 했다.
-삐이이이이!
-콰과과광!
그 순간, 큰 초고주파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연이어 굉음이 터졌다. 아예 링크가 문을 박살 내고 들어온 것이다.
문 앞을 막던 이동훈이 폭발에 휩쓸려 계단으로 굴러떨어졌다. 퉁, 퉁, 퉁. 몇 번이나 구른 그가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바르작대다 이내 축 늘어졌다. 손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쐐애액! 지하로 진입하자마자 링크가 백선우에게 포박용 무기를 쐈다. 장총처럼 생긴 마나 건이 새하얗게 달궈지는 것과 동시에 포승줄이 그에게로 날아왔다. 상급 몬스터의 발을 묶는 용도로 사용하는 물건인데, 그것으로 백선우를 포박했다.
쿵! 계단을 오르던 백선우가 붙잡히며 옆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추락하면서도 해가준을 조금 더 마나 통로를 향해 떠밀었다.
“…….”
멍하니 가준이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이 반대편에서 저벅저벅 소리가 들렸다. 기나긴 한숨 소리도 함께했다.
“가준아.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니?”
연미정.
그녀가 맞은편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공간에서 일어난 소란을 확인하는 연미정의 눈동자에 깊은 피로가 담겼다.
현재 가준은 어느덧 마나 통로의 바로 앞에 있었다. 두어 발자국만 빠르게 이동하면 통로로 도망쳐 나갈 수 있는 위치. 가준이 가만히 있으니 링크가 우선 백선우부터 완전히 제압하려 하고 있었다.
이쪽으로 다가오던 연미정이 돌연 멈춰 서며 인이어로 누군가와 소통했다.
“뭐? 정문으로 애들이 더 들어오고 있다고? 참……. 다들 왜 이렇게 고생하는 걸까.”
학생회가 뚫은 길로 계속해서 추가로 학생들이 들어와 소란을 벌이고 있었다. 지난 시간 동안 해가준과 백선우가 했던 일들이 차츰 소문으로 번지면서, 그들을 도와야 한다며 찾아오는 것이다. 연미정은 골이 아프다는 듯 침음했다.
그사이 백선우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가준아…….”
팔이 붙잡히고, 무릎으로 등이 짓눌려 일어나지도 못하는 자세였다. 그 상태로 백선우는 가까스로 고개만 들어 가준을 올려다보았다. 입 모양으로 제발 도망치라고 전하는 행동이 간절했다. 만약 이대로 가준이 도망친다면 추적은 뒤따르겠지만 그들은 아직 그가 가진 은신 아티팩트를 몰랐다.
문득 해가준은 이 상황이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백선우 한 명을 구하려고 했을 뿐인데 어째서인지 그 길에 모두가 따라왔다. 마치 그것이 전교생을 구하는 길인 양 기꺼이 위험 속으로 몸을 내던진다.
그런데 이제 와 백선우는, 그 착하고 책임감이 넘치던 백선우는 지금 제게 혼자 도망쳐서 살아남으라고 말하고 있다. 오직 중요한 것은 자신뿐이라는 듯이.
“…….”
백선우의 말대로 도망간다면, 자신은 살 수 있을지 몰라도 그는 분명 죽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하로 몰려온 학생들, 그리고 아직 지상에 있는 학생들도 모두 죽을 테다. 하지만 자신은 살아서 이 공간을 빠져나가니, 백선우의 거래는 이루어져 그것이 ‘현실’로 설정될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열두 번째 회차로 넘어가면…… 그때 백선우는 어떻게 되는 거지?
해가준의 시선이 백선우의 가슴팍에 새겨진 숫자 12를 스쳤다가, 캡슐 옆의 측정 판으로 향했다. 조금 전 백선우가 손을 댄 순간 뜬 영혼의 가능성은 0이었다.
제 열두 번째에 백선우는 존재할까? 아닐 것만 같다는 직감이 서늘하게 심장을 짓눌렀다.
더는 백선우가 해가준의 기준이 아니다. 그를 살려야만 반복되는 회귀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지금은 그를 버려야만 수련원을 빠져나갈 수 있다.
그러나 되레 이렇게 모든 게 명확해진 상황 속, 해가준은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혼란을 느꼈다. 원래는 자신이 죽었다는 충격, 백선우가 기준이 아니란 허탈감. 겨우 그러모았던 이성이 모래알처럼 파스스 흩어져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만 같다.
본래 해가준은 그다지 착한 편도 아니고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무신경했다. 백선우를 신경 쓰기 시작한 이유도 그를 회귀의 축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책임감 넘치는 백선우가 다른 학생들 때문에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이 먼저 그들을 도왔다.
해가준이 나선 모든 이유는 백선우 때문이다.
밝혀진 진실은 그 모든 것이 오해고 착각이라 알려주며, 현실도 그가 지금껏 가져온 기준을 버려야만 한다고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니, 그래서.
가준은 제 현실과 진실을 똑바로 보기로 했다. 착각이라 할지언정 그 오해 속의 강박에 기대 버텼고, 존재하지 않는 현실에서 습득한 기억들을 이정표 삼아 여기까지 걸어왔다. 백선우만을 바라보며 온 길이 이윽고 모든 학생이 함께하는 길이 되었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자신은 이곳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제 11번째 회차는, 백선우가 준 두 번째 기회로 가능했던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씨발, 내가 왜 도망가!”
그것에 가준은 책임을 지기로 했다.
이윽고 가준이 계단 난간을 붙잡고 아래, 이문의 근처로 뛰어내렸다. 그를 생포하려고 조심히 계단으로 올라오던 링크 요원들이 당황했다. 가준은 그들을 뒤로한 채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