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몇 번이나 수련원을 반복하면서 그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가준은 예언의 내용에만 집중했을 뿐 링크가 덧붙인 말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 그 사내의 말이 떠오르면서 섬찟한 예감이 들었다.
소강당이 폭발한 순간 보았던 수십 개의 아지랑이, 그리고 기계 조작실에서 안영아가 자폭한 순간에 본 십여 개의 빛 조각. 또 조금 전 심도경이 문 너머로 사라진 후, 공간에서 흘러나온 희미한 빛줄기 하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충격이 머리를 덮치고 불쾌감이 울컥 솟았다. 왜 연미정이 구태여 학생들을 소강당에 모아 치료하는 수고를 들이는가 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캡슐 안의 재료, 영혼인 것 같….”
-삑.
가준이 힘겹게 말하며 고개 드는 순간 앞에서 소리가 났다. 어느새 이동훈이 백선우를 끌고 와 계기판 위에 손을 얹게 하면서 난 소리였다. 해가준의 숫자로 뜬 1이 잘못된 건지, 아니면 어떤 규칙이 있는 건지 궁금했다.
백선우는 정말 하기 싫은 기색이었지만 탈진한 상태로 이동훈을 밀어내기 어려웠고, 기어이 손이 판에 닿자 화들짝 놀라며 물러났다. 뒤늦게 이동훈이 그의 표정을 확인하고 사과할 즈음.
[0]
숫자가 떴다.
그때 마침 고개를 들었던 해가준은 다소 멍해진 낯으로 그 숫자를 눈에 담았다. 이동훈 역시 숫자와 백선우를 번갈아 쳐다보며 당황했다.
그는 백선우가 측정 불가능한 상대라 0이 뜨는 걸 수도 있단 말을 횡설수설하게 내뱉다가, 한 박자 늦게 해가준의 말을 상기했다.
“자, 잠시만. 이 캡슐 안에 있는 빛 알갱이들이 영혼이라고?”
당장 이동훈이 가준의 손에 들린 서류를 빼앗아 읽었다. 그리고 그 또한 단서를 조합하는 데에 성공한 듯 얼굴빛이 파리하게 질렸다.
“그러면 이걸, 이 캡슐의 재료를, 아니, 이곳의 영혼들을 풀어주면 애들이 살아나? 그냥 영영 죽는 거 아니야?”
캡슐을 망가뜨려서 링크를 저지할 계획이었는데, 캡슐 안에 학생들의 영혼이 있었다. 이미 죽어서 영혼이 모인 것이지만 이동훈에겐 캡슐을 깨뜨리는 일이 마치 그들을 두 번 죽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진실을 깨달은 충격, 링크를 향한 경멸, 그리고 제물이 된 친구들에 대한 슬픔. 휘몰아치는 감정 속에서 이동훈이 손을 떨며 캡슐을 매만졌다. 그는 조금 전 확인한 숫자들을 완전히 잊은 눈치였다.
“…….”
해가준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분명히 단서를 하나하나 맞춰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턴가 조각이 맞지 않는다. 영 모양이 다른 퍼즐 조각 하나를 들고 헤매고 있는 기분이다. 자신이 퍼즐을 맞춘 바닥부터가 틀린 듯한, 그런 혼란한 기분이 든다.
대체 어디가 안 맞는 거지? 자신이 놓친 게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가준은 지금껏 알아낸 것들을 차근차근 정리했다.
이계. 세상의 흐름을 조절하는, 즉 현실을 조작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곳. 그 힘을 이용하여 원하는 값이 나올 때까지 다시 실험하던 링크.
그리고 수련원을 계속해서 ‘다시’ 겪고 있는 자신.
“……백선우.”
해가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백선우를 쳐다보았다. 조금 전 그가 기계에 손을 댄 순간 뜬 0은 뭘까. 왜 지금 그는 자신의 시선을 피하고 있을까.
-쿠구구구!
하지만 가준이 물어보려는 때, 위쪽에서 둔중한 소리가 들렸다. 비밀번호를 바꾸었던 문이 기어이 열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링크 요원들이 우르르 쏟아지듯 내려오며 공격했다. 촤르륵! 마나 총이 발사되는 소리와 이능력이 사용되는 소리가 시끄럽게 공간을 울렸다.
“헉……!”
이동훈이 당황하며 뒷걸음질 쳤다. 바로 코앞으로 마나 탄이 날아와 박혔다. 새파란 스파크가 아찔하게 시야를 물들여 단숨에 공포감이 솟았다. 정말 죽을 뻔했다.
가준 역시 놀란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캡슐 근처에 있으니 마나 총은 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러나 그들은 과감하게 진격했고, 그 탓에 셋이 주춤 물러나자 더더욱 맹렬한 공격이 쏟아졌다.
화르륵! 심지어 화속성 이능력자까지 있는지 앞으로 불벼락이 내리꽂혔다. 가준이 입술을 짓씹으며 뒤로 피했다. 백선우의 상태도 좋지 않을뿐더러 맞설 무기도 없다. 일단 피할 곳부터 찾아야 한다.
주위를 둘러보던 가준의 시야에 뒤편의 조작판이 잡혔다. 몇십 분 전, 몬스터 소환실에서 안영아가 자폭했을 때, 그곳에서 이계의 마나가 담긴 조작판이 불길 속에서 더 크게 폭발하는 걸 목격했다.
가준이 조작판에 연결된 전선을 순식간에 끊어내고, 곧바로 그것을 계단 방향으로 밀쳤다. 갑작스러운 공격을 막기 위해 링크의 이능력자가 다시금 불벼락을 화르륵, 내리꽂았으나 그와 동시에 예상한 대로 조작판이 거대한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콰과광, 쾅!
일순 귀가 멍멍해질 정도의 폭음과 함께 연기가 자욱하게 퍼졌다. 그 폭발은 내려오는 계단의 일부를 녹였다. 또한 조작판의 잔해가 곳곳으로 튀어 추가적인 공격으로 이어졌다.
순간 도망가던 이동훈이 놀란 눈으로 캡슐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것이 깨져서 링크의 계획을 저지하길 바라는지, 아니면 친구들의 영혼이 안전하길 바라는지. 둘 중 무엇도 선택할 수 없는 혼란한 눈빛이었다.
가준 또한 미미한 기대감과 불편함을 가진 채로 캡슐을 바라보았다가.
“…….”
그것이 흠집 하나 없이 온전한 것을 발견했다. 분명히 폭발의 여파에 휩쓸렸는데 어떠한 손상도 가지 않은 것이다.
폭발시키는 걸로도 캡슐을 터트리지 못하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갑자기 막막한 기분이 들어 멍하니 눈만 깜빡일 무렵.
-파지직! 마나 탄이 스파크를 일으키며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고, 시야 한쪽이 새파랗게 물들어서.
“가준아!”
백선우가 비명을 내지르며 해가준을 옆으로 떠밀었다.
그대로 넘어진 가준이 깜짝 놀라며 백선우를 바라보았다. 링크의 기습보다도, 먼 벽면에 대피시켜두었던 백선우가 순식간에 이곳까지 왔단 점이 충격적이었다. 심지어 자신을 구하는 과정에서 백선우가 팔을 다쳤다.
가준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제가 맞았겠지만, 자신도 팔 한 짝 정도는 맞을 각오를 했다.
“야, 내가 안전한 곳에 있으라고……!”
가준이 반사적으로 백선우를 다그치려다가 일순 대기가 찌르르 울리는 걸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백선우의 눈동자가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이미 탈진한 상태면서 다시금 힘을 한계까지 끌어모으는 것이다. 그의 사고를 벗어난, 어떤 강박적인 목적에 따른 행동.
마침 계단에서 포박 공격이 날아왔다. 주저앉아 있는 그들을 덮치려는 것처럼 그물 형태의 마나가 쏟아졌다가.
“건드리지 마!”
백선우의 새빨간 기운이 확! 터지는 것과 동시에 벽면으로 처박히듯 날아갔다.
그리고 그의 능력은 방어에 그치지 않았다. 투명하게 붉은 마나 사슬 십여 개가 백선우의 주위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그대로 적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학살에 가까운 현장이 펼쳐졌다.
마나 사슬로 링크를 포박해서 벽면으로 내던지고, 천장에 처박히게 하거나 서로 충돌시켰다. 우득, 뼈가 부서지다 못해 우그러지는 소리가 살벌하게 공간을 울렸다. 천장에 거대한 맹수의 발톱 자국 같은 것이 새겨지고, 피가 뚝뚝 떨어졌다. 조명이 깨지면서 그 아래로 전깃줄이 흔들렸다.
링크가 모두 쓰러지기까지는 채 몇 초가 걸리지 않았다.
“우욱…….”
그리고 그들을 다 해치우는 것과 동시에 백선우가 울컥, 피를 토하며 앞으로 쓰러졌다. 해가준이 그의 상체를 받아 안으며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둘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지켜본 이동훈은 경악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너무 놀라서 테이블 아래 숨어 있었던 그는 손끝을 떨다가 금세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일단 내가 문 좀 더 막아볼게……!”
지금 백선우가 만들어준 틈을 놓치면 안 되었다. 다른 링크 요원들이 더 들이닥치기 전에 문을 막아야만 했다. 비밀번호를 재설정하든지, 아니면 문 앞에 다른 물건들을 쌓아 막든지. 이동훈은 이를 악물고 뛰었다. 어떻게든 해가준이 이 상황에서 올바른 길을 찾아낼 거라 믿으면서.
“…….”
그러나 현재 가준의 눈동자엔 충격만이 자리해 있었다. 난전 속에서도 멀쩡한 캡슐이나 이문에 대한 감정은 아니었다. 백선우의 능력도 이미 복도에서 보았으니, 지금 상황에 새삼 놀라운 것도 아니다.
이 공간이 익숙하다.
자신은 이 모습을 이미 본 적이 있는 것만 같다. 난장판이 된 공간, 계단에 쌓인 시체들. 바닥에 뚝뚝 떨어져 고이는 피의 웅덩이까지.
‘……시간…… 열두 번…….’
그래, 그 속삭임을 들은 꿈속에서.
“백선우, 너…… 아니, 잠깐만. 어깨가 다쳤잖아!”
가준이 얼어붙은 얼굴로 무언가 질문하려다가 백선우의 부상을 발견했다. 이미 그의 하얀 니트가 얼룩덜룩해졌다지만, 이번엔 아예 어깨부터 가슴팍까지 길쭉하게 찢어져 피가 흘렀다. 사슬에 붙잡힌 링크가 저항하는 과정에서 난 상처였다.
가슴팍까지 이어지는 상처에 해가준이 기겁했다. 일단 지혈부터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손을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그의 행위가 뚝 멎었다. 허공에 뜬 손이 파르르 떨렸다.
피범벅 사이로 보이는 어떤 상처. 아니, 상처가 아니라 숫자.
“야, 이거…… 씨발, 너 이거 뭐야.”
백선우의 가슴팍엔 숫자 12가 새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