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조용히 뇌까리는 목소리가 기계 같다. 의식적으로 감정을 죽이려는 사람의 목소리가 저러할까. 어쩐지 이동훈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해가준의 침착한 태도가 비인간적으로 보였으나, 다시금 맞닥뜨린 그의 고요함은 어딘가 어그러진 것만 같았다.
멈칫한 이동훈에게서 시선을 거둔 해가준이 다시금 아래로 움직였다. 기나긴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셋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사실, 가준은 이 상황이 너무 이상했다.
안영아도, 심도경도, 그리고 중간에 갑작스레 합류한 학생들도. 가준의 눈에는 모두 이상하게만 보였다. 자신은 그저 백선우 한 명을 살리려 했을 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되었지? 그들은 대체 뭘 위해서 이렇게까지 행동하지?
이미 수많은 죽음을 보아 왔고, 안영아와 심도경의 죽음도 바로 눈앞에서 본 적 있었다. 그러나 그땐 지금 같은 이상한 기분을 느끼지 않았다. 어쩌면 이번에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그들의 죽음이 다르게 다가오는 걸까? 다음 회차가 없으면 그들도 끝이니까?
가준은 속이 울렁이려는 것을 애써 꾹 눌러 참았다. 괜한 감상에 잡힐 때가 아니라고 스스로의 이성을 다잡았다.
그렇게 점점 셋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거대한 마나의 흐름을 느꼈다. 이동훈이 멍하니 탄식했다.
“이게 대체…….”
눈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기계가 지하의 중앙에 자리했다. 사진으로 미리 보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기계가 눈앞에 있었다.
정중앙에 자리한 문. 그리고 그것의 옆으로 연결된 원통형 캡슐.
그것들로부터 일정 반경을 두고 조작판 여러 대가 자리해 있었다. 아마도 저것이 이문을 여는 데 일조하는 기계이자, 또 이문 너머의 힘을 측정하고 실험한 장치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그건 시선을 이끌지 못했다.
거대한 문이 살짝 열려 있다.
겨우 손 한 뼘만큼 열렸지만 문 너머로 보이는 모습이 어마어마한 압도감과 충격을 안겼다. 세상의 온갖 색이 뒤섞인듯 혼란하고도 찬연했다. 어떤 색이 탄생했다가 또 다른 색의 탄생에 묻히고, 이지러지고. 우주가 탄생하는 과정처럼 보여 계속 구경하다간 홀릴 것만 같았다.
뿐만 아니라 문의 주위로도 검붉은 빛 마나가 일렁였다. 수상한 모습이지만 막대한 기운에 기가 짓눌리는 것만 같았다. 당장에라도 저 너머의 기운이 문을 박차고 터져 나올 듯 강렬했으나, 일정 범위 이상 커지지 못했다.
하지만 문틈으로 내보내는 기운만으로도 수련원 일대를 장악하고 또 몬스터를 소환했다. 그러니 저것이 모두 열렸을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감히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링크는 저 문을 완전히 열고 이계와 연결되고 싶은 것이다.
이동훈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야야, 저거 닫을 수 있는 거야? 손도 못 대겠는데?”
“……설마 손으로 닫으려 했어?”
“…….”
“…….”
잠시 해가준과 이동훈 사이 고요한 시선이 오갔다. 예상보다도 더 거대하다지만 애초에 예상만으로도 손으로 밀어 닫을 크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동훈은 ‘이문을 닫아야 한다.’는 가준의 말을 꽤 직관적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결국 가준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먼저 아래로 움직였다. 마침 지하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은 내려오는 문을 막았다지만 어떻게 들어올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만 했다.
먼저 그들이 향한 곳은 원통형 캡슐 앞이었다.
“……?”
가준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멀리서 볼 때부터 이상하다 싶었는데 가까이 다가오자 기시감이 확 느껴졌다. 아니, 이건 단순히 익숙한 정도가 아니다.
투명한 캡슐 안에는 연노란색 빛 알갱이가 둥둥 떠다녔다. 아지랑이처럼 길쭉하게 일렁이기도 하지만 대개 구체의 형태로 둥실둥실 부유했다. 전체적인 모습 자체는 환상 같다고 여겨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가준은 구체 하나하나를, 지금껏 소강당과 기계실에서 보았다. 또한 조금 전, 문이 닫히고 저편에서 들리던 고음이 아스라하게 끊긴 순간에도.
“대체 이게 뭐지?”
이동훈이 대신 가준의 고민을 소리 내어 말해주며 캡슐의 주위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사방에서 확인해 봤자 안의 빛 알갱이가 무엇인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그저 지금껏 추론한 대로 이 캡슐에 모인 재료가 이계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 필요한 재료라는 것밖에.
그 점을 곱씹으며 가준이 캡슐을 가볍게 손으로 툭툭 쳐 보았다. 캡슐의 두께가 꽤 있었다.
“일단 이 재료를 모두 없애야 이문이 닫힐 것 같은데…….”
“어? 캡슐을 부숴서?”
“그럴 수 있으면. 이게 이계의 힘을 사용하는 재료일 뿐만 아니라, 이문을 여는 기초적인 에너지일 테니까. 캡슐을 부숴서 텅 비게 하면 문도 열린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겠지.”
가준은 처음 캡슐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부터 이것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캡슐 안에 든 재료가 무엇인지는 아직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일단 링크가 수학여행이 시작되기 전부터 재료를 모아서 이문을 열었단 건 확실했다. 실제로 최소원도 그렇게 말했고.
이동훈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해가준에겐 다 계획이 있다는 말이 퍽 어색하게 흘러나왔다. 아마도 조금 전 말다툼을 벌인 것을 의식하는 눈치였으나, 처음부터 가준은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두 사람은 분주히 주위를 돌아다니며 방법을 찾았다. 뒤편의 조작판을 살펴보고, 또 문과 연결된 전선을 끊을 수 있는지도 확인했다. 이동훈이 손도끼로 열심히 내려쳐 보았으나 영 가망이 없어 보였고 또한 억지로 뽑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계의 검붉은 마나가 넘실대어 손조차 대기 어려웠다.
“캡슐을 부수는 방법밖에 없나…….”
아무리 조작판을 뒤져 보아도 캡슐의 개폐 버튼이 없으니, 아예 부수는 방향밖에 없는 듯했다. 그러나 캡슐도 두꺼워서 쉽게 부서지진 않을 것 같은데…….
툭툭, 캡슐을 두드리던 가준은 혹시나 백선우가 무언가를 알지 않을까 싶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곧 가준의 얼굴에 의아함과 걱정이 떠올랐다.
“……백선우, 왜 그래?”
“응?”
“너 표정이 왜…….”
백선우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것 자체는 지쳐서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만, 지금 본 얼굴빛은 창백한 걸 넘어서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기까지 했다. 마치 끔찍한 기억을 떠올린 것처럼 손까지 떨고 있었다. 가준이 그의 손을 내려다보자 백선우가 슬그머니 뒤로 숨겼다.
그러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희미하게 웃는데, 가준은 그것이 익숙하면서도 묘하게 낯설다 생각했다. 어쩐지 지금의 백선우는 관조적이다. 제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만 고요히 지켜볼 뿐, 어떤 말도 하려 하지 않았다.
자신이 몬스터에게 잡아 먹혔다가 나온 이후부터 백선우의 태도가 묘하게 달라졌다고 느끼긴 했다. 하지만 어딘가를 콕 집어 말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그 이질감이 더 커졌다.
탈진해서 그런가? 가준은 조금 찝찝한 기분 속에서 고개를 돌리려다, 백선우의 시선이 어딘가로 향한다는 걸 확인했다. 캡슐 인근에 존재하는 작은 기계. 디지털 계기판처럼 보이는 것의 화면 위로 숫자가 계속 지지직, 떠오르고 있었다.
[1102]
조금씩 숫자가 바뀌긴 하나 대체로 1102이란 수에 고정되었다. 언뜻 보아도 캡슐 안의 빛 덩어리보다 많은 숫자다. 캡슐 안에는 현재 약 이백여 개 조금 넘게 있었다.
이동훈도 옆으로 다가와 계기판을 살펴보았는데, 그 과정에서 그의 손이 계기판에 닿았다.
“야, 조심……!”
혹시나 무언가 잘못 건드릴까 놀라서 가준이 그를 붙잡았으나,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저 판 위의 숫자가 갑자기 사라지는가 싶더니, 삑- 소리와 함께 새로운 숫자가 떠올랐을 뿐이다.
[5]
“……뭐야, 이 하찮아진 숫자는.”
갑자기 훅 작아진 숫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이동훈이 인상을 썼다. 그사이 해가준은 다시금 주위에 변화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자신도 손을 올려 보았다. 혹시 손을 올리는 상대에 따라 숫자가 변하는가 확인해 볼 요량이었다.
[1]
“…….”
“……이, 숫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걸지도.”
해가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외려 이동훈이 당황해서 계기판이 이상하다고 이야기했다. 조금 전 그가 하찮다고 평했던 숫자보다도 더 작은 숫자라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가준은 그저 고요히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1이란 숫자가 계속해서 지지직 떨렸다. 이동훈이 만졌을 땐 이런 현상이 없었는데, 가준의 앞에선 마치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불현듯 가준의 머릿속에서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렸다.
‘……열두 번…….’
자신은 열한 번째 회차고, 만약 열두 번이 마지막이라면 이제 제게 남은 기회는 한 번뿐이다. 몇 시간 전 숙소에서 제 몸에 새겨진 숫자 11을 발견해서 그런지 이상하게 번뜩 떠올랐다. 그러나 이 기계가 대체 뭐라고 그런 기회까지 파악한다는 말인가?
이게 무슨 가능성을 측정하는 것도 아니고-.
“어?”
순간 해가준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었다. 바로 조금 전, 연구실에서 보았던 서류. 그것에 적힌 내용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떠돌아다녔다. 각 개체가 품은 가능성이 다르고, 순수하고 강한 개체일수록 더 많은 가능성을 지닌다는 분석.
그가 주머니에 챙겼던 서류들을 재빠르게 꺼냈다. 잔뜩 구겨진 종이를 제대로 펼칠 틈도 없이 글자를 읽어내렸다. 가능성이 모일수록 기회가 많아진다.
‘심상치 않은 재료가 사용되는 게 확실해. 웬만한 에너지로는 세상의 흐름을 다루기 어려울 테니까.’
회의실에서 최소원이 했던 추측도 함께 떠올랐다. 어떤 의지든 실현해낼 수 있고, 세계의 법칙마저 바꿀 정도로 강력한 이계의 힘.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재료.
불현듯 가준은 첫째 날, 별관 강당에서 링크가 지껄였던 소리를 되짚었다.
‘혹시나 각성하지 못한다 해도 상심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모두 위대한 문을 위한 제물이 될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제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