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순간 해가준은 울컥했다. 본인이 쓰러질지도 모를 상황에서마저 의연한 태도나, 또 이곳 외에는 길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그의 행동에 반박하고 싶었다. 분명히 백선우 하나를 살리려고 나선 길인데 그에게 너무 많은 부담을 안기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런 대화도 결국 시간 낭비란 판단이 서서, 가준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백선우는 옅게 웃더니 곧 문 옆의 인식기로 이동했다. 그의 중얼거림이 나직하게 떨어졌다.
“이제 마지막이니까…….”
가준이 의아하게 그를 보았다. 이제 이문에 도착할 테니 한 말인가? 하지만 물어볼 틈은 없었다. 백선우의 주위로 붉은 마나가 천천히 일렁이는가 싶더니, 이내 인식기에 집중되어 폭발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쿠우우우…….
무언가를 때려 부수는 것도 아니건만 공기가 크게 울렸다. 대기를 고무줄처럼 팽팽하게 잡아당겨 뚝, 뚝 끊어내는 것 같기도 했다.
인식기 위로 [Error!] 글자가 뜨며 시끄러운 경보를 울리려는 듯했으나 그런 스피커마저 고장이 났는지 지지직거리기만 했다.
시작과 동시에 백선우가 헐떡였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파리해지며 식은땀을 쏟았다. 가준은 지금이라도 말려야 되는가 고민했으나, 그 찰나 쿠구구- 소리와 함께 문이 조금씩 열렸다.
“빨리 움직여.”
겨우 사람 하나 지나갈 틈이 벌어졌다. 오래 열어둘 수 없다는 걸 파악한 해가준이 당장 아이들을 재촉하며 움직였다. 그가 먼저 안쪽으로 들어가고, 그다음으로 이동훈이 들어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심도경이 들어오려는 때.
-쿵쿵!
“이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당장 문 부숴!”
연구실 바깥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기어이 링크가 이곳까지 쫓아온 것이다. 잠근 문을 열려는 듯 쿵쿵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가준이 입술을 짓씹으면서도 안쪽 화면에서 초기화 코드를 눌렀다. 길고 복잡한 코드를 눈으로 읽고, 손으로 재빨리 그것을 입력하면서 머릿속으론 상황을 계산했다. 하필이면 폭발 아티팩트는 이미 이곳까지 오는 길에 모두 썼다.
이제 심도경과 백선우까지 들어온다고 해도 약 1~2분 동안 문을 잠글 수도 없으며 억지로 열릴 경우엔 비밀번호 재설정이 중단된다. 언뜻 들어도 바깥엔 열 명 이상이 있다. 과연 저들을 상대로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가준이 초조하게 방안을 찾는 때, 갑자기 심도경이 뒤로 물러났다. 그까지 들어와야 백선우도 움직일 텐데 돌연 뒤돌아서 나간 것이다. 경각을 다투는 상황에 대체 무슨 짓인가 싶어 확, 그를 쳐다보았다가.
“내, 내가 시간 끌게…….”
울먹이는 심도경을 마주했다. 그 한마디를 내뱉는 것이 너무나 두렵고 떨리는 듯 입술마저 파르르 떨리고 있었으나 그는 끝끝내 그것을 말했다.
곧 링크는 방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심도경은 그때, 착란 이능력을 사용하여 그들이 문으로 다가가지 못하도록 막겠다고 이야기했다. 이 문은 너무도 두꺼워 안쪽에선 능력을 사용해 봤자 소용없을 것이다. 당장 이계의 마나를 막아내는 용도로 특수 제작된 문일 테니 당연했다.
그러니 링크의 침입을 막기 위해선, 이 방 안에서 능력을 써야만 한다. 겨우 1분 남짓 상대를 착란에 걸리게 하는 능력이지만 지금은 그 1분이 너무나도 중요했다.
“야!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도경아, 안에 먼저 들어가면 내가 어떻게든…….”
“아니야, 선우야. 내가, 아니, 나도 도움이 되고 싶어.”
이동훈과 백선우의 말에 심도경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눈에선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으나 어조에서만큼은 그런 두려움이 묻어나지 않았다.
“영아가 만들어준 길을 이렇게 망칠 수는 없잖아.”
계속, 끝없이, 심도경은 그 생각을 했었다. 기계 조작실에서 자신에게 겨눠진 총에 움츠러들지 않았더라면. 가준이 제게 눈짓으로 신호하기 전에 먼저 행동했더라면. 그들이 들어오자마자 재빨리 이능력을 써서 틈을 벌었더라면…….
그랬다면 영아는 죽지 않았을까.
자신의 나약함이 괴로웠다. 마나 통로를 뛰면서 내내 울었고, 그런 스스로가 또 한심해서 울었다. 링크에게 추적당해 복도로 떨어졌을 때도 백선우의 이능에 업혀서 탈출했다. 그가 나설 때까지도 자신은 복도에 주저앉은 채로 무서워서 울기만 했었다.
해가준이 길을 뚫고, 폭발 아티팩트를 이용하라 지시하는 와중 이동훈도 제 한몫을 든든히 해냈다. 제대로 던지지 못하는 자신에 비해 이동훈은 높은 명중률을 보일 뿐만 아니라 날쌔게 뛰어 적들을 혼란에 빠지게 했다.
자신도 어떻게든 도움이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에 이곳에서 매뉴얼을 열심히 읽었는데, 지금 링크에게 붙잡히면 그것마저 끝이다.
심도경은 제 노력을 완성시키고 싶었다.
처음으로 제 능력이 쓸모 있다고 생각하게 해준 그들이다. 원래의 그였다면 몬스터 사냥에 나서는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덕에 해냈으니 이번엔 자신의 판단으로, 제 의지로 해내고 싶었다.
더 시간 끌 수 없다는 듯 심도경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더니, 그대로 있는 힘껏 백선우를 밀쳤다. 이미 탈진한 상태인 백선우가 휘청이며 문 안쪽으로 떠밀리는 것과 동시에 천천히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틈만 열렸던 문이기에, 조금만 닫혔을 뿐인데도 다시 나올 방안이 없어졌다. 안쪽에서 이동훈이 당황하면서 개폐 버튼을 찾았으나 이미 재설정을 시작해 다른 버튼이 비활성화되었다.
당황하는 그들 앞에서 심도경이 울면서도, 후련하게 웃었다.
“나, 이번엔 정신 똑바로 차릴 거야.”
-쿠우웅…….
완전히 문이 닫혔다. 이제 들리는 것은 오직 인식기가 비밀번호 재설정을 진행하며 내는 기계음뿐이었다. 셋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화면을 확인하지도 못한 채로 그저 닫힌 문만 바라보았다.
저편에서 아득하게 누군가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렸다. 집중하지 않으면 제대로 들리지조차 않는, 아주 영영 먼 공간에서 울리는 것처럼 희미한 소리. 그러다 마침내 그 모든 것이 아스라해지는 때.
[재설정이 완료되었습니다.]
화면이 바뀌었다.
-덜컹! 저편에서 문을 밀치는 느낌이 났다. 그제야 해가준은 자신이 여전히 문손잡이를 쥐고 있단 것을 깨달았다.
링크가 문을 열려는 듯 몇 번이고 손잡이를 흔들고, 또 카드키를 인식시키려는 듯 삐빅- 소리가 났으나 끝내 문은 열리지 않았다. 심도경의 분석이 정확하게 맞아 들었다. 링크의 카드키는 바뀌었고 현재 키로는 이곳에 들어오지 못한다.
얼음장 같은 침묵 끝에 이동훈이 힘겹게 물었다.
“……야. 이게, 이렇게 가는 게…… 맞는 거야?”
다분히 생략된 표현이지만 가준은 그 모든 내용을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어떤 답을 해줄 수는 없었고, 애초에 그도 대답을 기대했던 것은 아닌지 두 손에 얼굴만 파묻었다. 숨소리가 우는 사람처럼 떨렸다.
가준의 시선이 고요히 문에 머무르다 이내 등을 돌렸다.
“……내려가자.”
손잡이를 놓는 순간엔 잠시 머뭇거렸으나 막상 문을 등진 이후로는 망설임 없이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지금 당장은 비밀번호를 바꿔서 길을 막았다지만 이 기계가 원래 링크의 소유인 이상 언젠가는 밀고 들어올 것이다. 냉정하고 당연한 판단이었다.
그런 행동에 이동훈이 뒤에서 울컥한 목소리로 외쳤다.
“야! 너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지금 애들이……!”
“애들이, 뭐.”
“……뭐라고?”
“그래, 애들이 죽었지. 안영아도 죽고, 심도경도 죽고. 아마 지금 학생회랑 함께 온 애들도 복도에서 죽고 있겠지. 그래서 뭐 어쩌자고? 묵념할까?”
“야! 내가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잖아! 너는, 넌 슬프지도 않냐? 어?”
외려 이동훈이 말하다가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듯 팔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지금껏 벌어진 일에 어떤 반응도 없는 해가준이 이상하게만 보였다.
몇 계단 아래에서 그를 올려다보는 해가준의 시선이 고요했다. 새까만 눈동자엔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듯했다. 그저 이렇게 반응하는 이동훈이 신기하다는 감상만 희미하게 스쳤다.
자신도 처음엔 저랬던가? 아니, 이제 그땐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았다.
가준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모르겠어.”
“너 정상 아닌 것 같아, 해가준.”
“그건 맞지.”
“……?”
욱해서 내뱉은 비난에 가준이 덤덤히 동의했다. 되레 이동훈이 당황해서 그를 보았다가, 가준의 표정에 입을 다물었다.
문득 이동훈은 고래 몬스터에게 잡아먹혔던 때, 지친 것처럼 보였던 해가준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때와 지금의 모습이 겹치면서 새삼스레 그의 무표정한 낯이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해가준은 아이들의 죽음에 무관심한 것이 아니고, 무덤덤한 것도 아니었다.
아주 많은 길을 걸어 이곳까지 도달한 사람처럼, 온통 닳아서 마모된 사람의 낯을 하고서.
“……일단 지금 여기서 시간 끄는 게 옳은 일이 아니란 것만큼은 알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