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137)

82화.

“매뉴얼?”

“으응. 잠금 설정 방법이라 나와 있어.”

최근까지 열어 본 듯 페이지가 펼쳐져 있고, 그 위로 볼펜도 올라와 있었다. 가준은 혹시나 이문과 연관이 있는가 싶어 곧바로 살폈으나 디지털 기계 조작 방법을 안내한 책자란 것만 확인했다.

김이 샌 가준이 매뉴얼에 관심을 끄고서 다른 서류를 읽었다.

“각 개체가 품은 가능성? 이건 또 대체 뭐야.”

“어우, 난 서류 더 분석하기 싫은데.”

이동훈이 부러 과장되게 몸을 떨었다. 현재의 무거운 공기를 떨쳐내려는 듯한 반응에, 해가준은 별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지금은 애초에 서류를 분석할 만한 시간이 없었다. 그저 내용만 한 번 훑는단 생각으로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각 개체마다 품은 가능성이 다르며……]

[순수하고 강한 개체일수록 더 많은 가능성]

[……가능성이 모일수록 기회도 많아진다.]

[그러나 설정값의 난이도에 비례하여 변화가 있을 수……]

반복되는 문장이나 페이지의 마지막 ‘결론’ 항목에 있는 문장, 그리고 고맙게도 밑줄이 그어진 문장을 위주로 눈에 담았다. 원래 이 연구실에 있던 사람은 필기를 잘하는 사람인 듯했다. 조금 전 매뉴얼에도 볼펜이 올라와 있더니.

얼굴조차 모르는 연구원에게 고맙다는 감사를 전할 즈음, 이동훈이 물었다.

“그런데 이 공간에 더 지하로 내려가는 문이 대체 어디에 있단 거야? 유달리 휑하긴 한데…….”

“이, 이쪽 벽면이 아닐까?”

“……지금 심도경이 짚고 있는 위치에서 딱 1m 왼쪽에 있잖아?”

가준의 의아하단 답에 외려 둘이 이상하단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그런 눈빛을 주고받은 후에야 서로 진실을 깨달았다. 다른 아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해가준은 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문을 발견한 것이다.

“와. 이상하게 네가 문부터 안 찾는다 싶더니.”

“가준이 눈 정말 신기하다…….”

그들의 감탄에 가준은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공간을 훑었다. 자신은 당연히 그들도 보이는 줄 알았기에 당황스러운 감도 있었다.

몇 시간 전, 소강당 앞에서 선생님들의 거짓말을 구분한 이후로 시야가 한층 선명해졌다. 마치 눈이 새롭게 뜨이듯이. 원래도 어둠 속에서 길이 잘 보인다 생각했는데, 이젠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해졌다. 카메라로 따지면 화질이 올라갔다.

해가준_11.Pro.max가 말했다.

“아무튼 이곳은 더 챙길 거 없으니 이제 카드키로 열고 내려가야…….”

하지만 그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말꼬리가 서서히 흐려지는가 싶더니, 돌연 테이블을 쾅! 짚으며 당장 문으로 달려갔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얼굴이 사납게 굳었다.

“뭐, 뭐야. 왜 그러는데?”

“가준아……?”

심상치 않은 반응에 다들 놀라는 동안 해가준이 품에서 카드키를 꺼냈다. 오늘 아침에 링크 연구실의 문을 열어주고, 또 지하로 내려가는 문을 열어준 카드키. LINK 영문자가 하얗게 적힌 카드키가 인식기 위에 올라갔다.

삐비빅. 하지만 인식기에서 난 소리는, 그들이 지금껏 문이 열릴 때 들은 소리와 달랐다.

[Error!]

붉은 글자가 뜬 화면에 모두의 시선이 몰렸다. 링크가 출입키를 바꿔 버린 것이다.

“하…….”

해가준이 욕을 짓씹었다. 왠지 이 방에 잠금 설정 매뉴얼이 있다 싶더니, 연미정이 전체적으로 출입키를 바꿔 버리라고 지시한 게 틀림없다. 아침에 가준이 카드키를 들고 있는 걸 보았으니까.

별관에서 처음 카드키를 획득한 순간부터 언젠가는 키가 바뀔 거라 예상했었다. 그런데 그게 하필 지금이라니. 어떻게 보면 또 너무 당연한 상황이라서 허탈감만 들었다.

손잡이를 찾아서 쥔 가준이 문을 당겨보고, 또 밀어보았다. 당연히 열리지 않지만 들썩거리는 정도로 이 문은 밀어서 여는 것이란 걸 알아챘다. 그리고 이번 문이 유달리 두껍다는 것도. 이 아래로 내려가면 이계와 일부 연결되어 있으니 마나를 차단하기 위해 두껍게 제작한 것이다. 쉬이 부수지도 못할 문이다.

그즈음 이동훈도 당황한 얼굴로 매뉴얼을 들고 왔다.

“우리가 이걸로 기계를 조작할 수는 없나?”

“이, 일단 열고 들어가서 안쪽에서 바꾸는 것 같은데…….”

“바뀐 열쇠가 뭐지? 문신? 지문? 손가락? 눈알?”

해가준이 갈수록 다소 험악한 후보들을 내뱉었다. 만약 그것들이라면 당장 바깥으로 나가서 링크의 시체라도 가져올 기세였다. 하지만 그사이 꼼꼼히 매뉴얼을 읽기 시작한 심도경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카드키에 변화가 있었던 것 같아. 아마 지하에 있는 링크는 기존의 키에 추가적인 처리를 받은 듯하고…….”

심도경은 이렇게 분석하는 일에 끈기와 재능을 보였다. 몇 시간 전에도 회의실에서 자료를 분석할 때 가장 빠르게 핵심을 정리했던 그였다. 속독하듯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 매뉴얼을 훑었다.

그사이 이동훈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말했다.

“이거 열고 들어가서 우리가 비밀번호 바꾸면 대박일 텐데.”

그건 마침 가준도 생각했던 계획이었다. 어차피 이 카드키로 문을 열고 들어갔더라도 링크가 뒤쫓아오지 못하도록 막을 방안이 필요했다.

심도경은 완전히 매뉴얼에 집중한 듯 팔랑팔랑 종이를 넘기다가, 마침내 어느 페이지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비밀번호를 재설정하는 방법이 있어. 안에 들어가서 초기화 코드를 입력하고, 그다음에 바꿀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된대. 그게 등록되는 데에 소요되는 시간은 1~2분 정도고.”

“아무 숫자나 입력하면 돼? 0000?”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심도경이 보내는 눈빛에 당장 이동훈이 얌전해졌다. 그저 당황한 게 아니라 ‘어떤 머리여야 저런 발언을…….’ 같은 충격을 담은 눈빛이라 그랬다. 그 심도경에게서 그런 시선을 받자 굉장한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심도경은 헛기침하며, 가준이 들고 있는 카드키를 가리켰다.

“이런 카드마다 각자 내장된 코드가 있어. 그러니까 만약 안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초기화 코드를 입력한 후에 새 비밀번호로 이 카드를 등록하는 거야. 그러면 카드가 바뀐 링크는 더 들어올 수 없겠지.”

“오……!”

초기화 코드는 꽤 길고 복잡했다. 외울 수 없을 듯해서 가준이 아예 그 페이지를 죽 찢었다가, 옆에 자그맣게 적힌 내용을 발견했다.

[재설정하는 동안에는 잠금 버튼이 활성화되지 않으며, 다시 문을 열 경우 재설정이 중단된다.]

가준이 그 문구를 읽는 동안 심도경은 계속해서 책자를 훑었다. 비밀번호를 재설정하는 방안이 있으니 혹시나 키가 없는 비상시에 문을 여는 방법도 나와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두툼한 매뉴얼을 끝까지 살펴볼 때까지도 그런 내용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실망한 심도경은 풀이 죽은 채로 마지막 페이지만 만지작거렸다. 어쨌든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다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 심도경의 눈에 아주 작은 글자가 잡혔다.

“주의할 것, 기계의 주위에 아주 강한 마나 파동이 일어나면 문이 열리는 에러가 생길 수도 있음…….”

스르륵, 심도경과 이동훈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백선우에게 향했다. 아주 강한 마나 파동이란 설명을 보자마자 떠오른 사람이 그였다. 현재 등급은 A-급이나 잠재력은 S급이라 측정된 존재. 그리고 조금 전 보인 모습으론 S급이라 칭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사람.

실제로 몇 시간 전 최소원도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지하 입구의 감지기 때문에 진입하지 못한단 소식에, 석판의 마나를 이용해 강력한 파동을 일으켜 고장 내면 된다고 제안했었다. 그러니 백선우가 아예 인식기에 손을 얹어서 마나를 쏟으면…….

하지만 잠깐 백선우를 보았던 둘은 해가준의 시선을 받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심도경은 다급히 책자에 얼굴을 파묻고, 이동훈은 다른 단서를 찾아보자며 움직이다가 벽에 발을 박았다.

그러나 사실 가준의 시선이 아니었어도 그들은 차마 백선우에게 부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애초에 백선우의 얼굴은 심각할 정도로 핏기가 빠져 창백하고, 또 바로 조금 전에도 그가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 그에게 무리하기를 강요할 순 없었다.

헛기침이 오가는 상황 속, 백선우가 물었다.

“혹시 에러가 일어나면, 다시 못 잠그는 건 아냐?”

“어, 어어? 그런 말은 안 나와 있어서 모, 모르겠는데…….”

“그러면 일단 한번 해 볼까?”

“백선우!”

가준이 기겁하며 그를 붙잡았다. 하지만 백선우는 고개를 내저으며 너무나도 당연하단 어조로 말했다.

“지금 당장 문을 열 방법은 이것밖에 없잖아. 아예 고장 날 수도 있겠지만, 이곳에서 가만히 있다가 잡히는 것보단 차라리 조금이라도 이문과 더 가까워지는 게 낫지.”

다시 문을 잠글 수 없게 되면 안에서 물건을 끌어와 막거나, 그때 새로운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옳단 이야기였다. 평소의 가준이었다면 그의 말에 동의했을 테지만 지금은 백선우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그를 과보호하려는 게 아닌 객관적인 사실이었다. 그는 더 무리하면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탈진했다.

“기다려 봐. 차라리 다른 길을 찾아볼 테니까…….”

“이 문밖에 없어.”

“아니면 문을 여는 다른 방법이라도-.”

“가준아.”

말을 뚝 끊으며 백선우가 가준의 손을 잡았다. 만류하는 손을 천천히 떼어내며, 똑바로 눈을 마주하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시간이 없다고 조곤조곤 속삭이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차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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