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바로 앞에서 묘한 시선이 날아오거나 말거나 가준은 무신경하게 고개를 돌렸다.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천장만, 즉 식도로 추정되는 구멍만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곧 피곤하게 되었단 듯 시선을 내렸다. 역시나 내장이 꿈틀거리는 모습은 꽤 역겨웠다.
사실 아이들과 다시 만나 무얼 시도해 보고는 있다지만, 해가준이 처음 바닥에 닿은 순간 느낀 감정은 허무함이었다.
죽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백선우의 죽음을 또다시 눈앞에서 본다면 더는 못 버티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몬스터에게 삼켜지면서 이번엔 백선우를 구했단 안도감과 함께, 더는 이 지긋지긋한 수련원을 반복하지 않아도 되겠단 후련함을 느꼈다.
그런데 결국 이곳에서 눈을 떠 학생들과 다시금 살아 나가려고 궁리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그는 조금, 아니, 꽤 많이 피곤해졌다.
“여기서 죽으면 더 반복은 안 되려나…….”
해가준이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그는 처음에 자신이 죽었더라면, 그저 운이 없었다고 여기며 눈을 감았을 법했다. ‘계속 눈앞에서 친구가 죽는 모습을 보며 수련원 11번 반복하기’ vs ‘한 번 죽고 끝나기’ 중에선 후자를 선택했으리란 소리였다.
그는 절대로 자살 희망자가 아니고, 지금껏 살면서 단 한 번도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는 건강한 정신머리의 소유자지만…… 회귀를 반복하니 지쳤다.
그는 늘 현재에 만족하며 평온하게 살았기에 만약 본인이 죽었더라면, 물론 허탈하긴 하겠지만 전교생을 대상으로 벌어진 참사니 별다른 발악도 없이 눈을 감았을 것이다. ‘아, 어쩐지 알감자가 맛있어서 운수가 좋더라니….’ 정도의 감상만 가지면서.
하지만 백선우, 그 녀석이 자꾸 자신을 지키면서 죽으니까-.
“……어?”
문득 해가준이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 거의 매번, 백선우는 위험한 순간에 자신을 구하면서 죽었다. 기억을 되짚자 첫 번째로 맞닥뜨린 죽음에서도, 복도 코너를 꺾어서 몬스터가 나오자마자 그는 자신부터 옆으로 밀쳤다. 백선우가 아니었으면 자신이 그 몬스터의 발에 공격당해 죽었을 테다.
심지어 감금한 회차에서도, 몬스터의 돌진으로 죽어가는 백선우를 붙들고 당황했을 때. 뒤에서 다른 학생들이 만약 백선우가 방에서 소리를 내어 몬스터를 유인하지 않았더라면 자신들이 있었던 곳으로 달려왔을 거라 이야기했다. 당시 가준은 그런 이야기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지만, 제 손을 붙잡은 백선우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기억했다.
죽어갈 때마다 백선우는 늘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아주 옅은 미소였지만 그 순간이 하나하나 떠오르자 해가준은 몹시 이상한 기분에 시달렸다. 단순히 저 대신 희생하면서 웃는 착해 빠진 녀석이 황당해서가 아니었다.
더듬더듬 해가준이 제 입꼬리를 매만졌다. 자신도, 조금 전에 그런 표정을 지었던가?
“…….”
답은 알 수 없다. 가준은 잠시 숨을 참았다가…… 결국 그것을 헛웃음으로 흘려보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저 우연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백선우가 매번 대신해서 희생하려 들던 자신이 없어졌으니 이제 그는 괜찮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불쑥 솟았다.
비록 상황은 좀 꼬였지만, 배후는 알게 되었다. 마나 형상화도 할 수 있으니 만약 그가 본인의 안위만 최우선으로 둔다면, 혼자서는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하를 습격하거나, 아니면 몇 시간만 버텨서 내일 날이 밝으면…….
그때, 갑자기 뒤에서 서채경이 외쳤다.
“얘들아! 우리 목소리 들려?!”
[지지직- 너희- 살아… 있어?!]
가준이 천천히 그곳을 돌아보았다. 학생회도 나름대로 수련원을 수색하고 다니면서 무전기를 구한 듯했다. 핸드폰 신호가 통하지 않는 장소에서 무전기는 아주 훌륭한 연락책이다.
꽤 멀리까지 움직였던 가준이 느릿느릿 그곳으로 돌아갔다. 일단 바깥의 소식을 들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뚝, 뚜욱……. 위에서 떨어지는 위액이 조금씩 굵어졌다.
“혹시 우리를 잡아먹은 몬스터, 어디에 있는지 보여?!”
[어어- 어…! 2층 위쪽에, 거의… 3층에 떠 있어! 공격은- 했는데, 하나도… 안 먹혀서…!]
서로의 생사를 확인한 후 곧바로 정보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예상한 대로, 바깥에서도 이 몬스터는 고래처럼 보인다고 했다. 처음에 거대하게 입을 벌려 학생들을 잔뜩 삼키더니 지금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마치 바다를 유영하는 것처럼.
그래서 남은 인원이 다 함께 몬스터를 공격했으나, 외피엔 어떠한 흠집도 가지 않는다 했다. 너무 단단해서 바위를 두드리는 것 같다는데, 안쪽의 물컹한 내벽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
“그래서, 지금 복도 상황은 어때? 다른 몬스터는?”
[그게… -지직- 소란으로, 몬스터가 더… 몰려왔는데….]
다가오던 해가준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가기 시작했다. 바깥에 전투 인력이 줄어든 상황에서 몬스터가 더 몰려왔다고? 심지어 한두 마리가 아니라 했다.
하지만 정작 상황을 전하는 학생의 목소리엔 공포가 서리지 않았다. 그저 당황스럽기만 한 듯 몇 번쯤 더듬거리다가, 가까스로 말했다.
[백선우가… 거의, 혼자서- 다 상대하고… 있어….]
“응? 뭐라고? 혼자……?”
서채경이 의아해할 즈음, 무전기를 통해 저편의 소란이 들려왔다.
[백선우 지, 진정해!]
[……쟤, 좀- 지직- 말려 봐!]
[누, 누가 말려……!]
[저러다 쟤 죽… 겠다고!]
뭐 씨발?
당장 해가준의 눈동자가 돌아갔다. 심드렁하게 있던 그의 눈이 확 커지면서 살벌한 기운이 흘렀다. 내가 지금 무슨 이유로 대신 잡아 먹혔는데, 누가 죽는다고?
성큼, 다가간 해가준이 무전기를 빼앗아 물었다.
“지금 백선우가 뭐?”
[아니… 몬스터가- 아… 으아악…!]
[지지직- 쾅, 콰광!]
[…야, 쟤 막아야… 죽… 는다고!]
무전 상태가 좋지 못했다. 저편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굉음이 연달아 이어지고, 마지막엔 심지어 무전기까지 떨어뜨린 듯한 소음이 났다. 도망치란 소리가 아득하게 울렸다.
몬스터가 몰려오고, 학생들은 도망치는 듯한 상황 같았다.
“……바깥으로 나가야겠어.”
무전기를 꾹 쥔 해가준이 짓씹듯 중얼거렸다. 약간의 초조한 기운마저 어린 목소리였다. 이전의 무신경했던 표정은 어디로 가고, 이성을 놓기 직전의 낯으로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동훈은 그의 변화가 황당하면서도 한편으론 달가웠다. 그가 방향을 찾고자 한다면, 어떻게든 찾아낼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마침 안쪽의 상황도 좋지 않게 흘러갔다.
“무, 물이 차츰 차오르고 있어.”
“위에서도 더 많이 떨어지는, 으악!”
조금 전부터 점점 굵게 떨어진다 싶던 위액의 방울들이 더욱 크기를 불렸다. 심지어 멀리서 들린다고 생각했던 찰랑거리는 소리도 어느새 가까워졌다. 또한 그 소리의 울림도 커져서, 물이 더더욱 높이 차오르고 있단 걸 알렸다.
-뚝…….
-치지직.
소화액이 옷자락에 떨어지자 곧바로 타는 소리가 나며 옷이 까맣게 스러졌다. 모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서서히 다가오는 웅덩이, 아니, 이젠 바다처럼 보이는 그것에 닿으면 죽을 것이다. 심지어 그 바다는 철썩, 철썩 파도까지 치면서 이곳으로 다가왔다.
마치 밀물이 차오르는 광경처럼 보였다. 제때 벗어나지 못하면 빠져 죽을 것이란 점까지 똑같았다.
“저곳.”
그때쯤 해가준이 한 위치를 가리켰다. 고래 몬스터의 내벽은 간간이 꿀렁거렸는데, 한 위치가 경직된 듯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내부가 어두컴컴해서 다른 아이들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그에겐 정확히 보였다.
해가준은 아마도 그곳이 바깥의 학생들이 집중적으로 공격한 위치라고 예상했다. 바깥에선 큰 흠집을 내지 못하지만, 안쪽에서도 그곳을 공격하면 분명히 효과를 보일 테다.
희미한 손전등 불빛으로 그곳을 확인한 학생들이 동의하며 함께 공격해 보았다. 곧 그들의 얼굴에 환희가 들어찼다.
“정말로 늦게 아물어!”
“살 최대한 벌려서 폭탄 깊이 넣고, 뒤로 피하자.”
아무리 깊이 심어도 폭발의 영향은 받겠지만,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만 했다. 학생들도 모두 의지를 굳힌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안영아가 부회장과 해가준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나보다 SPI 높은 사람이 마나를 넣는 게 낫겠지?”
아티팩트는 사용자의 마나가 깃들어야만 가동한다. 아주 소량의 마나만 사용하면 되기에 F-급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으나 안영아는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자 했다. 그녀는 기왕이면 귀한 무기가 더 정확하게 사용되었으면 했다. 그러니 신해고에서 SPI가 높은 학생회에 넘길지, 아니면 신뢰도가 높은 해가준에게 넘길지 고민했다.
그러나 가준이 그녀가 내미는 아티팩트를 거절했다.
“아니, 네가 해. 네 행운이 필요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