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아득히 어두운 공간 속에서 그의 눈동자가 서늘하도록 푸르게 빛나는 순간. 우르릉- 쾅! 천둥이 내리꽂히며 환한 빛이 거세게 공간으로 들이닥쳤다.
-솨아아아! 빗줄기가 세차게 창문을 때렸다.
세상의 모든 빛을 죽이고 소리를 차단하는 것만 같은 사나운 폭우였다. 사방이 시끄러운 듯하나, 모순적이게도 수련원 내부는 싸한 정적에 휩싸였다. 숨소리마저 울릴 정도로 기이한 공간이다.
해가준이 말하는 순간에 찰나 모든 공기의 흐름이 그에게로 쏠리는 것만 같았다. 그랬기에 어수선한 공간의 소음이 뚝 끊기며 모두 그를 돌아보았다.
“무, 무슨 소리야……?”
“선생님들이 거짓말한다고? 대체 뭐를…….”
안영아와 이동훈이 차례로 당황한 반응을 비쳤다. 일순 해가준의 주위로 일렁인 푸르른 빛에 홀린 듯 그를 보았다지만, 그가 한 말은 믿기가 어려웠다. 갑작스럽고 뜬금없기마저 했다. 잠깐 멍하니 굳어 있던 아이들도 하나둘 정신을 차리며 뭐냐고 수군거리려는 때.
“찾았어.”
백선우가 회의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화면에 뜬 ‘음성녹음파일 01’이 모두의 시선을 이끌고, 해가준의 눈짓까지 있은 후에야 마침내 재생 버튼이 눌렸다.
[…지직- 직… 슬슬 성가시단 말이지….]
기계의 소음과 누군가의 숨소리가 뒤섞인다. 고통스럽게 간신히 숨만 몰아쉬는 듯한 소리의 뒤로, 한 존재가 중얼거리는 목소리만큼은 똑똑히 울렸다.
조금 전, 회의실을 빠져나올 때.
당시 가준은 최소원의 부상을 목격하고, 석판을 찾겠단 명분으로 다시 바깥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나오면서 핸드폰 녹음을 켜 놓고 몰래 소파 밑에 숨겨두었다. 최소원이 곧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안색이었으니, 만약 그녀가 잠깐이라도 정신을 잃는다면…….
그땐 회의실엔 오직 연미정만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일말의 가능성에 기대 숨겨 놓은 핸드폰이다. 그리고 창고에서 폭탄을 챙겨 돌아오며, 백선우에게 조용히 이에 대해 알렸다. 그리고 이쪽 복도에 도착하면 그에게 먼저 회의실로 들어가 핸드폰 녹음 파일을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복도가 소란스러운 동안 백선우는 내내 핸드폰 녹음 파일을 확인하고 있었고, 마침내 그곳에서 증거를 찾아냈다. 원래는 파일을 확인한 후 조금 더 차분하게 대응할 계획이었는데, 최소원의 돌발 행동으로 상황이 꼬였다. 사실 그녀가 수련원으로 들어온 이상 언제든 벌어질 수 있었던 갈등이긴 했지만 하필 지금일 줄은.
[가까이에서… 충분히 봤으니… 이만 처리해야겠어.]
[다른… 애들도 모이라고- 지직, 해.]
어느 순간부터 더는 잔 소음에 묻히지 않는, 그 목소리만이 복도에 퍼졌다.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고 알려진 수련원에서 그 존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다른 존재와 통화로 이야기했다.
[학생들을 꽤 많이 모았네. 전부 몰살되면 나머지가 정신 차리고 움직이려나. 지금까지 사상자가 안 나와서 충격이 부족한가 봐. 처음 강당에서 최소 네다섯 명은 죽었어야 했는데…….]
[……뭐? 1반 애들 몇 명은 빼달라고? 그새 정이라도 들었니?]
싸한 침묵이 복도에 사정없이 쏟아진다. 그 정적이, 고요가 머리를 거세게 내려치는 것만 같다. 학생들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복도의 선생님들을 바라보았다.
신해고의 모든 학생과 친한 연미정 선생님. 언제나 상냥하게 웃으며 다정히 안부를 묻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핸드폰에선 한없이 이질적인 울림을 품고 나왔다.
[박인후.]
[네가 최소원 제대로 죽였으면 이 꼴이 안 났잖아?]
-솨아아…….
마침 빗줄기가 약해지는 순간에 나온 말소리가 공간을 아득하게 떠돌아다녔다. 학생들은 잠깐 멍하니 굳었다가, 곧 비명을 내지르며 오른쪽으로 달려왔다.
“꺄아아악!”
“도, 도망쳐야 해!”
왼쪽엔 선생님들이 있고, 오른쪽엔 해가준과 백선우가 있었다. 소강당으로 들어가려던 아이들이 무의식적으로 백선우의 뒤로 숨고자 했다.
최소원을 제외한 모든 선생님이 이 사건의 배후다. 지금껏 그들이 의지하고 믿었던 존재의 이면은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다. 수련원뿐만 아니라 학교에서의 기억이 뒤섞이며 공포와 상실감에 눈물을 터트린 이들도 있었다.
김시형도 그중 하나였다. 그녀는 아예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털썩, 쓰러졌고 안영아가 급히 그녀를 챙겼다. 그리고 이동훈과 심도경이 절뚝이는 최소원을 챙겨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그때쯤 가준이 외쳤다.
“다들 숙여!”
-촤르르륵!
기어이 저쪽에서 마나 총을 꺼내어 발사했다. 4반 선생이 품에 손을 넣는 걸 본 순간 가준이 재빨리 주의했으나, 채 피하지 못한 학생 한 명이 팔을 감싸며 쓰러졌다. 김시형. 그녀의 팔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그 상황을 확인한 백선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것과 동시에, 그의 주위로 새빨간 마나가 위협적으로 일렁였다.
-콰광, 쾅!
-쩡!
곧바로 붉은 마나 사슬이 그들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백선우의 공격이 그들에게 닿기 직전, 복도에 짙푸른 막이 철창처럼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박인후를 결계로 가두는 척하던 3반 담임 김성민이 냉큼 방향을 바꾼 것이다.
결계는 마치 방어막처럼 작용하여, 백선우의 마나 사슬을 튕겨 냈다.
“이건…… D급이, 아닌데…….”
백선우가 나직이 탄식했다. 분명 신해고 교사진은 대부분 D급 이능력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는데, 그의 앞에 드리운 결계는 절대 D급으로 보기 어려웠다. 그랬더라면 마나 형상화로 쏟은 공격 앞에 허무할 정도로 쉽게 부서졌을 테니까.
하지만 결계는 마나 사슬과 충돌하고도 견고했다. 최소 B+급. 백선우가 더 강하게 몰아붙이면 깨질 듯하나 이 공방은 짧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몇 분은 소요될 텐데 상대는 총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목 부근에서도 무언가 붉게 빛났다.
가준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오전에 링크 연구실에서 보았던 목걸이, 저항력을 높이는 아티팩트.
‘이번에 마나 형상화를 깨달은 거니?’
‘다시 사용할 수는 있을 것 같고?’
지하실에 다녀오는 길에 연미정이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가준이 욕을 짓씹었다. 어쩐지 계속 백선우에게 능력에 관해 묻더니, 그를 대비하려는 속셈이었다. 신해고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대상이니까.
가준은 백선우의 표정에서 상황의 위험성을 깨달았다. 일단 다급히 그를 붙잡아 뒤로 이끌려는 때, 연미정이 손을 들었다. 일순 모두가 경계하며 몸을 움츠렸다.
“…….”
그러나 연미정의 손은, 마나 총을 든 사내의 팔을 붙잡아 내렸다. 그러지 말라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기까지 했다. 작은 몸짓에 불과했으나 그가 빠르게 총을 치우며 고개를 숙였다. 순응하는 듯한 몸짓에서, 가준은 한 가지를 깨달았다.
연미정이 바로 링크의 ‘그분’이다.
백선우가 다시금 마나 사슬로 공격하려 했으나, 다른 선생 네 명이 동시에 그를 노려보았다. 기세가 흉흉했다. 이대로 전투가 벌어진다면 위험했다. 백선우 혼자라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이곳엔 학생들이 많고, 결국 그것이 전투 내내 백선우의 발목을 붙잡을 것이다.
가준이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조금 찜찜한 눈으로 소강당을 보았다. 연미정이 학생들에게 소강당으로 대피하라고 안내하는 순간부터 들었던 불쾌감이 아직 속을 마구 긁고 있었다. 일단 그것을 막아야 한다는 직감으로 벌인 일이지만 여전히 소강당 안에 학생들이 많았다.
대체 저곳이 뭐라고 이렇게 불안할까.
초조하게 상황을 계산했다. 폭발 아티팩트가 저 결계를 뚫을 수 있을까. 외려 이쪽에 피해가 올 수 있으니 창문을 넘어 외벽으로 이동해 뒤에서 기습할까. 김시형의 아티팩트가 들켰다지만 다른 인원까지 모두 파악된 건 아니다. 그러니 저들이 김시형과 백선우만 주의하는 때를 노리면 될 텐데, 비가 와서 외벽을 타고 이동하기가 위험했다. 그래도 밧줄을 이용하면 영 길이 없진 않은 듯한데…….
묘한 대치가 이어지는 동안, 연미정이 천천히 앞에 모인 학생들을 훑어보았다. 겁에 질리고 덜덜 떨면서 눈물 흘리는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안타깝다는 듯 제 눈매를 누그러뜨렸다. 그녀의 얼굴에 담긴 감정은 가식이 아니다. 작위적인 연기가 아니다.
연미정은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었다.
이러한 반응에 학생들이 하나둘 당황하며 서로 두리번거렸다. 조금 전 핸드폰 녹음 파일에서 들은 연미정의 음성이 꼭 착각이었던 것만 같다. 소강당 안에서 다급히 문을 걸어 잠근 아이들이 창문으로 복도 상황을 살폈다.
그러나 해가준만이 인상을 찌푸리며 노려보고 있었다.
“가준아. 너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울음기를 머금은 듯했다. 연미정은 말하다 말고 제 입을 가린 채로 심호흡했는데, 격한 감정을 참아내는 듯한 행동이 무척 이상했다.
“이렇게 선생님을 의심하고 싶었니?”
“……?”
“네가 처음부터 나를 의심했다는 건 알아. 휴게소에서 그런 모습을 봤으니 모든 일에 주의하는 건 당연하지. 그래도 선생님이 얼마나 정성 들여 너희를 돌보고, 또 도왔는데…….”
가준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감시하려는 목적으로 가까이 둔 걸 돌봤다고 표현하는 행동이 황당했다. 갑자기 분위기를 중재하기에 무슨 대화를 하려나 싶어 들어 봤는데, 별 이상한 헛소리를 지껄였다.
그러나 가준의 차가운 시선에도 연미정은 슬픈 낯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선생님은 네가 계속 의심하며 괴로워한 것이 안타까운 거야. 물론 수련원에 갇혀 몬스터에게 쫓기는 일도 고통스럽겠지. 하지만 가준이 너는 거기에 더해 계속 나를 의심하고, 이 일을 벌인 배후를 알아내려고 했잖니? 겨우 학생이 부담하기엔 너무나 큰 짐이었을 텐데.”
가준이 입술만 벙긋거렸다. 어디에서도 말로는 지지 않겠단 소리를 들어온 그이지만 지금은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대화를 할 수 없다는 게 이런 상황을 가리키는 걸까.
그리고 더욱이 그가 말을 잇지 못하는 이유는, 연미정이 하는 모든 말이 더없는 ‘진심’이기에. 이제 가준의 눈에는 상대가 하는 말의 진실과 거짓, 선과 악, 진심과 가심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그러나 희미한 기운만 구분하는 상황에서조차 연미정의 말은 선명하도록 진실된 마음을 품고 있다.
그것이 충격적이고 역겨워서, 그래서 말문이 막혔다.
지금껏 가준은 선생님들과 함께할 때 미미한 두통을 느꼈었다. 하지만 연미정과 있을 땐 그런 두통이 없어서 무의식중에 경계를 줄였는데, 어쩌면 저항 아티팩트를 착용한 것에 더불어 그녀가 순수악에 가까워 거짓을 느끼지 못한 걸지도 몰랐다. 이계와 연결되어 만들어질 세계를 진심으로 유토피아라 믿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