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지금 그가 능력을 쓰지 않는데도, 그리고 이때껏 함께한 경험으로 절대 자신들을 복종시키려 들 성정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차마 반대하는 의견을 낼 수 없을뿐더러 어떠한 말도 하기 어려운 위압감이 목을 짓눌렀다.
“회의실에 다녀오는 사이에 없어질 수도 있으니까, 일단 물건부터 챙기는 게 좋겠어.”
조곤조곤 이어지는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평소보다 조금 가라앉아 있을 뿐이건만 아이들이 긴장하고, 결국 눈치를 보듯 고개를 끄덕였다.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기도 했다.
그에 가준은 잠깐 놀란 눈으로 공간을 둘러보았다. 분명 이런 상황은 백선우부터가 달갑지 않을 텐데 그가 구태여 문을 막아섰다. 그들의 안전을 위한 것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론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서일 테다.
“…….”
씁쓸한 낯의 백선우와 눈을 맞춘 가준이 입 모양으로 ‘고마워.’라고 조용히 전했다. 그의 얼굴에 느릿한 웃음이 번졌다.
곧 다 함께 폭탄을 챙기기 위해 움직였다.
단순히 상자 안에 가득한 폭탄을 옮겨 담으면 끝일 줄 알았는데, 상자들을 연결한 끈 위에 작은 기계가 붙어 있었다. 게다가 가까이 다가가 살핀 폭탄의 모습도 조금은 친숙했다.
“어라, 이거 일반 폭탄이 아니라 아티팩트 아닌가?”
“맞아. 그리고 위에 붙은 기계는 원격 기폭 장치처럼 보이는 것 같은데…….”
백선우가 답하며 상자를 꼼꼼히 살폈다. 손바닥 크기만 한 새까만 구체, 아티팩트가 상자에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폭발 아티팩트는 일반 폭탄보다 훨씬 구하기 어려운 만큼 성능이 뛰어났다. 아마 이곳에서 모두 터진다면 복도 일대가 완전히 날아갈 테다.
또한 그런 아티팩트를 연결한 기계는 원격 기폭 장치로, 링크가 가동하면 곧바로 마나를 불어넣어 폭발을 유도할 것이다.
다들 새삼 충격받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 위치 비상계단 쪽이잖아.”
“애들이 바깥으로 도망치려고 이쪽까지 오면 터트릴 속셈이었던 거 아냐?”
“허…….”
이동훈의 추측에 다른 아이들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지금 이곳에서 폭탄을 없앤다면 다른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겠단 생각은 들지만, 그보다도 훨씬 더 걱정이 앞섰다. 갑자기 터지지는 않을지 무서웠다.
주춤대는 아이들 앞으로 가준이 나서 기폭 장치를 살폈다. 주기적으로 빨간빛이 깜빡일 뿐 지금 당장 터질 것 같진 않았다. 공간을 둘러보아 CCTV가 없단 것을 확인한 그가 품에 챙겨둔 맥가이버 칼을 이용해 조심히 줄을 끊었다. 아주 얇은 줄로 폭탄을 연결해놓아 혹시라도 충격에 반응할까 봐 신중히 움직였다.
이 일에는 김시형도 함께했다. 몇 시간 전에 챙겨둔 과도를 꺼내 꽤 능숙한 손길로 줄을 끊어냈다. 해가준보다 더 섬세하고 정확한 손놀림이었다.
막힘없이 줄을 끊는 모습에 안영아가 감탄했다.
“칼 든 미대생한테는 개기면 안 된단 소리가 돌더니…….”
“……원래 칼 든 사람한테는 개기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이동훈이 황당하게 반응하는 동안에도 둘은 꾸준히 칼을 움직였다. 이제 안영아와 이동훈이 투닥거리듯 대화하는 소리는 일상 asmr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모두 줄을 끊은 후엔 백선우의 확인하에 기폭 장치를 멀리 떨어뜨렸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폭탄을 가동하는 기능에만 그쳐 다른 변화는 감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렇게 기계를 치워내고 재빨리 폭탄을 가방에 넣었다. 발견한 과정이 놀라웠을 뿐, 폭탄을 챙기는 일 자체는 상대적으로 쉬웠다.
마침내 폭탄을 모두 챙기고 돌아가는 길.
눈앞의 폭탄을 보고 많이 망설였지만 막상 가방에 담자 무척 든든해졌다. 아티팩트는 비싸서 일반적으론 쉽게 볼 수 없는 물건이나 그들 모두 사용하는 법을 알았다. 신해 고등학교에서 가르친 내용이며, 실제로 학교에서도 사용되었다.
딱 다섯 개 있는 가방은 백선우를 제외한 아이들이 각각 들었다. 그가 자신은 마나 형상화를 할 수 있으니 다른 아이들이 갖는 게 낫겠다고 양보했다. 가준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S급에게 폭탄을 주기 위해 F급들의 호신용품을 뺏을 수는 없었다.
아이들이 저마다 가방을 보며 눈을 빛냈다.
“이제 이걸로 웬만한 몬스터는 상대할 수 있겠지?”
“공간 계산 잘 해서 사용해야 해. 잘못하면 폭발에 휩쓸릴 수 있으니까.”
“에이, 그 정도는 당연히 알지!”
“몬스터 서너 마리, 아니, 다섯 마리는 거뜬히 해치우겠어……!”
해가준의 주의에 이동훈이 능청스럽게 답했고, 심도경도 눈을 반짝였다. 수련원 안의 모든 몬스터를 상대할 수는 없겠지만 충분히 위협적인 무기다. 김시형도 새삼스레 뿌듯한 듯 제 가방 안의 아티팩트를 조심히 만지다가 문득 질문했다.
“대체 그곳에 폭탄이 있단 건 어떻게 안 거야?”
모두가 갖고 있는 의문이었다. 비록 챙겨오진 못했다지만 3층의 폭탄 위치도 알았고, 또 2층에서도 폭탄을 찾아냈다.
가준이 눈동자를 슬쩍 옆으로 굴리며 답했다.
“원래 그곳이 유엽화, 불덩어리 몬스터가 있는 공간이거든. 그래서 그 창고에서 불덩어리들이 빠져나왔으니 내부엔 뭐가 남았나 확인했던 거야.”
“뭐? 그 몬스터가 그곳에 있었단 건 대체 어떻게 안 거야?”
“……몬스터의, 습성상, 가장 숨을 확률이 높은 곳이라.”
다소 어색한 기운이 묻어나는 변명이었다. 하지만 어느덧 김시형을 제외한 다른 아이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들은 어제부터 해가준과 함께하면서 납득하는 범위가 넓어졌다. 의문이 생기는 부분은 물론 있지만, 그와 함께하면 안전만큼은 확실하니 기본적으로 따르고자 했다.
그저 김시형만 멍하니 눈을 끔뻑이다가 물었다.
“그럼, 다른 위치도 알고 있다면…… 그곳에도 폭탄이 있는 거 아냐?”
“헐, 그러게!”
“폭탄이 그렇게 많다면 충격적이겠지만, 확인해 볼 만한 일인 것 같기도 하고?”
안영아와 이동훈이 동시에 반색했다. 심도경도 눈을 반짝이며, 어젯밤 가준이 지도에 표시해준 위치를 몇 곳 읊었다. 마침 그 지도는 잘 말아두어 회의실에 뒀다.
수련원에 존재하는 모든 폭탄을 빼돌리면 이 무리가 엄청나게 강해질 것이다. 심지어 링크의 함정을 역으로 이용하는 느낌이라 더 통쾌하기도 했다.
“돌아가서 쌤한테 말씀드리고 다 같이 찾아보자!”
“안 돼. 말하지 마.”
해가준의 단호한 목소리가 묘한 정적을 이끌었다. 신나게 달아올랐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단숨에 어색해졌다. 가준은 제가 생각 이상으로 싸늘하게 답했단 걸 인지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폭탄의 위치를 안다고 말했다간 또 빼돌려질 수도 있다.
“아. 호, 혹시 기가 선생님이 우리 말릴까 봐?”
“쌤이 걱정이 많으시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 전 일 때문에라도 폭탄의 필요성에 동의하실 것 같은데?”
심도경의 추측엔 냉큼 김시형이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수련원에 온 순간부터 연미정과 함께했기에 각별한 친밀감을 가졌다. 그리고 사실 그런 이슈가 없더라도 기본적으로 어른을 믿고 의지하게 된다. 연미정은 선생님이고, 학생들보다 등급이 높은 이능력자니까.
지금껏 연미정이 보인 태도는 그저 걱정이 많은 선생님이라고 여길 법했다. 단지 해가준에게 더는 그것이 걱정으로 다가오지 않을 뿐.
가준의 침묵에 이동훈이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다, 마침 창밖을 확인하고 탄식했다.
“아, 맞다. 그 안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올 수도 있겠네. 이제 곧 비 내릴 때라 달빛도 전혀 없고…….”
밤 10시에 가까운 지금, 하늘에 불길하도록 어두운 먹구름이 가득했다. 9시가 넘은 순간부터 때때로 쿠구구- 울리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 당장에라도 거센 천둥이 치며 폭우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창문이 꼭꼭 닫힌 수련원인데도 비 내리는 날의 냉기가 서늘하게 공간에 가라앉았다.
모두 새삼스레 바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엔 달빛이 드는 때를 노려 몬스터를 처리했다지만, 오늘은 먹구름 사이로 달이 보일 일이 없을 듯했다.
“그래도 침착하게 반응하면 그것들이 흥미 잃는다 하지 않았나? 차분하게 움직여서 들고 오면 될 듯한데.”
옆에서 안영아가 ‘오, 이동훈이 제일 못할 것 같은 일.’이라고 사족을 붙였지만 결국 그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애들 말에 동의해. 어차피 회의실 돌아가면 쌤한테 폭탄 보일 텐데, 곧바로 이야기하는 게 낫지 않아?”
“…….”
“와, 표정 봐. 꼭 쌤도 의심하는 것 같은….”
장난스레 웃던 안영아의 말이 뚝, 끊겼다. 조금 전 창고에서부터 내내 이상했던 해가준의 행동이 모두 이해되는 이유였다. 처음 연미정과 합류한 순간부터 경계했단 건 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받아들인 줄 알았다.
다들 놀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고, 특히나 김시형이 가장 경악했다.
“설마 선생님 의심해서 그런 거였어? 그럴 분이 아니잖아! 너, 너희한테 지하로 내려가는 길도 알려주고, 또 엄청 많이 도와줬는데……!”
한껏 커진 눈동자는 꼭 배은망덕한 사람을 보는 듯했다. 원래 김시형은 퀭한 인상에, 대부분의 일에 기력 없이 반응하며 나직이 말하는 편이었으나 지금만큼은 목소리가 높아졌다. 얼마나 그녀가 큰 반감을 갖는지 알려주는 반응이었다.